4. 유약한
술이 깬 아버지는 급격히 위축되어 갔다. 전날 자신이 저지른 행동과 다시 찾아온 유약함에 억압되어 한없이 허물어져 갔다. 어머니와 자식들에게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지게를 지고 밖으로 나갔다. 해 질 무렵 한가득 나뭇동을 짊어지고 나타날 때 가지 집안을 잠시의 평온함을 맛본다. 평화가 길었으면 혈서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내가 봤을 땐 동네 다른 아저씨에 비하여 작으면 작았지 결코 크지 않은 나뭇동, 그것만 해도 아버지한테는 대단한 노동임을 나중에 알았지만, 지게를 벗어 놓고 컬컬한 목을 한 모금의 막걸리로 축였으면 혈서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유약한 분이 맞다. 갈등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켜서 애써 외면해야 마음이 편한, 굳세게 맞서 이겨내라? 아버지한테는 해당 없음이다. 귀찮은 것은 싫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모두 싫다. 싫으면 그만이다. 안 보면 되는 것이다. 다음에 또 나타나면? 그때도 또다시 외면하고 도망가면 된다. 최선의 해결책은 도망가는 것, 외면하는 것. 철저히 외면이라도 했으면 차라리 나으련만. 아버지의 양심에, 모질지 못한 여린, 아니지, 유약한 마음이 그것을 용납 못 하는 것이다. 차라리 끝까지 무책임했더라면, 그것으로 누군가는 얻는 이익이랄까 편함이랄까 도 있을 것을. 외면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자니 마음이 너무 아파. 곁눈질해서 보면 더 아프다. 아프면 달려가 해결할 능력은 안 된다. 유약함을 날려 버려야 해. 미친 듯이 막걸리 몇 잔을 들이켜면 어느덧 강인함이 다시 찾아와 두 어깨를 들쳐 올렸다. 아버지의 강인함은 언제나 가족에게 향했다. 다행이랄까? 아버지는 술로 인하여 밖에서 일으킨 문제는 없었다. 가족과 자신 외에는. 그래 다행이지. 술에 취해 어느 골목에 처박혀 있다 들어와도, 얼굴이 엉망이 될 정도로 뒹굴어 떨어져 들어와도 결코 다른 사람과 시비가 있거나 한 적은 없었다. 대부분 가정이 그러하듯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술로 생긴 강인한 행동을 했다. 어쩌면 자신과 같은 유약한 성향을 보이는 장남이 안타까워 그랬을 것이다. 계집애처럼 곱상하게 생긴 모습이 안타까워 그랬을 것이다. 맞을 거다. 자신의 유약함이 밉도록 싫은데 장남도 유약함을 보이니 얼마나 안타까웠겠어. 유약한 아버지의 어깨를 짓누른 것은 지독한 궁핍이었다. 궁핍만 아니었다면 아버지의 유약함은 아버지를 빛낼 훌륭한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수첩에 적어 놓은 감상문, 청년 시절 포부를 적은 글귀들. 당시 농촌에서 아무나 갖지 못한 자산이 빛을 볼 수 없게 궁핍이라는 검은 구름이 덮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