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만나면서 제일 적응하기 힘들었던 부분이 무언가 작은 일을 해도 꼭 상의하는 것이었다.
나는 늦둥이에 거의 혼자 커서 무언가를 할 때 항상 혼자 판단하고 움직여오던 게 습관이 되있었는데 남편은 주변에 꼭 한 번씩 물어보거나 상의를 한 후 결정을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켜보다 보니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상의를 하는 이유가 자신의 의견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서지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그에 따를 생각은 크게 없는 것 같았다. 나도 이런 부분을 알고 상의하는 척을 하고 내 맘대로 했다. 평화주의자인 내게는 그게 맞는 거 같았다. 부부가 함께 살기 위해선 상의하는 게 당연하긴 했다. 원래 어떤 일에 대해 상의를 하면 좀 더 좋은 결과를 내고 서로의 의견과 생각을 교환하면 좋지만 우리의 신혼만큼 풋풋했던 그래서 어설프기도 했던 기록들을 남겨본다.
그중 하나가 신혼집을 구할 때다.
결혼식 날짜를 잡기 전부터 남편은 오랫동안 어머니와 살던 빌라를 내놓았는데 서울 역세권 빌라여서인지 결혼식을 올리고 몇 달 뒤 집이 나갔다. 이사 날짜를 잡아야 했기에 넉넉히 날짜를 잡고 우린 집을 알아보기 위해 다녔다. 우리에겐 세 달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다. 우린 집을 보러 다니며 상의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부동산 사장님 중 집이 다 주인이 정해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정말 맞는 거 같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살 전셋집을 구하러 다닐 때도 내가 정해두었던 원칙과는 다른 내 눈에 반짝반짝 빛나 보이던 집을 택했다. 실제로 더 좋은 집이어서가 아니라 눈에 딱 들어오는 집이 있었다. 그리고 곧 그 집을 내놓았을 때도 여러 사람이 보고 갔지만 실제로 계약을 하러 온 사람은 한번 대충 보고 간 사람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아버지께서 청약에 당첨되셔서 살던 집 보다 넓은 아파트로 이사 가게 된 이후로 나에게 아파트는 좋은 보금자리 이미지를 강렬히 갖게 되었다. 내방이 생긴 것도 이때 처음이었다. 그래서 신혼집도 기왕이면 아파트나 오피스텔 같은 형태의 집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신랑은 정반대였다. 오랫동안 빌라에서 살아왔고 신혼집도 단독주택이나 빌라를 원했다.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아파트가 무섭다는 말에 골고루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청난 상의가 시작되었다. 역시나 고소공포증이 있다 해서 아파트 1층도 알아보고 오피스텔형 아파트도 알아봤지만 신랑은 고민하는 듯 보이며 망설였다. 서울보다는 좀 더 가격 대비 넓은 집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었다. 평일엔 일하고 주말엔 거의 집을 보러 다녔다. 계속해서 다녔지만 이 사람도 나도 함께 원하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사날짜가 다되어도 집을 구하지 못할 경우까지 대비해서 이삿짐센터에 짐을 맡기고 어머니 집과 우리 집을 월세로 지낼 생각까지 해냈었다. 이쯤 되니 난 마음을 비웠고 우리가 직접 알아보러 다니는 것도 귀찮아져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연락된 빌라 전문가를 만나 그분의 차를 타고 소개해주는 빌라를 차분히 구경했다. 그래도 우리 맘속엔 신혼에 대한 기쁨이 있었다. 그렇게 매니저가 소개해주던 신축빌라 중 우리 둘 눈에 들어온 빌라가 있었고 신중한 신랑이 마지막으로 고민하는 동안 난 이미 마음을 비웠기에 계약을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막상 우리 둘이 마음에 들어 했던 곳이 처음이었기에 다른 생각 길게 하지 않고 이 사람도 덜컥 계약을 했다. 그렇게 빌라를 매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우리가 봤었던 아파트를 비롯해 전국의 아파트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신혼집 자체로써 의미가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이 속상했던 나에게 엄마는 집으로 돈을 못 벌었다는 생각보다 이 집에서 앞으로 얼마나 행복하게 살지를 더 생각하라던 말씀이 다시 한번 제대로 방향을 잡게 해 주셔서 위로가 됐던 게 생각난다.
그렇게 시작된 신혼생활 우리의 상의는 계속되었다. 우리 신혼집에서 가게까지는 버스를 세 번 갈아타 야했었다. 지역 특성상 차가 필요하긴 했지만 가게일을 하느라 하루하루 미루다 보니 시간이 자연스레 흘렀다. 가게까지의 거리는 가까웠지만 한 번에 가는 교통편이 없어서 갈아타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 임신을 하고 보니 교통편이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신랑은 그때부터 부랴부랴 차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신중하고 상의하지만 허당인 이 사람의 캐릭터를 알기에 급한 내색 없이 지켜보기로 하고 기다렸다. 주말마다 차를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고 또 책자를 공부하며 혼자 맞는 차를 찾기 위해 고민이 시작되는 듯 보였다. 나는 장기전이 될 것을 예상하고 임신도 했고 일도 해야 했기에 당장 필요한 대로 택시를 타고 다니 자고 했다. 남편은 좋은 생각이라고 하고 또 가게 근처에서는 차가 많이 막히니 버스를 타고 중간 정도 갔을 즈음에 내려서 택시를 타자고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상의하는 게 귀찮아진 나는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렇게 서서히 가게에서 무리하지 않기 위해서 아르바이트생도 쓰고 초기 시절을 잘 지나가고 있을 무렵 나이가 들어서인지 무리를 해서인지 아가가 떠나버렸다. 소리 소문 없이.. 참 놀랐던 일이었지만 잘 추스르고 지나갔다.
그렇게 우리의 버스반 택시 반 시절이 어영부영 계속되고 다시 아기가 찾아왔다. 나는 처음보다 모든 면에서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이때쯤 사람들이 많이 사는 차 종류는 모두 꾀고 그림자만 보고도 어떤 차종인지 맞히는 경지에 이르렀고 내 안의 타노스도 다시 꿈틀대기 시작해 포효를 하고 나서야 차를 사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신혼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