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일본어 카피라이팅 도전기
'뭘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어.(何が言いたいのか分からない)'
내가 처음 작성한 카피에 대한 평가는 차가웠다.
역시 외국인이 일본어로 카피라이팅 같은 거 하는 게 아닌데, 하며 후회할 뻔했다.
나의 첫 회사는 일본계 인터넷 광고회사였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광고나 마케팅에 크게 관심이 없었고, 애초에 ‘3,4년 다니고 퇴사해서 번역 공부 해야지’라는 다짐을 하며 입사를 했을 정도였으니 아무튼 언어, 말, 문장에 대한 공부가 하고 싶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통신제 대학 일본어학과에 들어갈까. 그런데 편입해도 2년은 좀 긴 거 같은데. 안 그래도 야근 많은데 어떻게 다녀.
이래저래 궁리하다 찾은 답이 ‘카피라이팅’이었다.
광고회사이긴 하지만 나는 숫자를 보는 퍼포먼스 마케팅에 가까운 영역에 있었기에 업무상 카피를 쓸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겨우 언어, 말, 문장과 지금 업무의 교집합으로써 찾은 것이 카피라이팅이다.
나는 내가 찾아낸 답에 만족하며 나름의 거금을 들여 유명 카피라이터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수업에 등록했다. 매 강의마다 다른 카피라이터 혹은 광고인이 등단해 수업을 하고, 사전 과제도 있는 반년 간 이어지는 강의코스였다.
첫 과제는 일본 국민 음료 ‘칼피스 원액’의 카피를 쓰는 과제였다.
그 과제를 낸 카피라이터는 '카피라이팅이란 새로운 생활을 정의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머릿속에 새기고, 지금까지 마셔본 적 없는 칼피스 원액까지 사 마셔보며 내 나름대로 칼피스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생활'을 생각해 봤다.
그렇게 만들어낸 카피가 ‘조금 용기가 필요한 여행에, 언제나의 칼피스(少し勇気の要る旅に、いつもの カルピス)’. 여행에 가서 입맛이 안 맞거나 일본의 맛이 그리워질 때, 칼피스 원액을 챙겨가면 물만 있으면 언제든 일본의 맛을 느낄 수 있겠다,라는 발상에서 나온 카피였다. 하지만 돌아온 평가는 씁쓸했다. 실제로 수업을 듣는 것이 무서워져 보강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을 핑계로 결석하기도 했다.
다른 강사는 카피라이팅을‘사회 안에서 암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나는 일본어를 10년 이상 공부하고 일본에서 7년 정도 살고 있었음에도 ‘사회 안에서 암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까지 빠삭하게 알지는 못했다. 보통 '암묵적'인 것들은 오래전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내가 아는 일본은 2018년 3월 이후의 일본 뿐이었으며, 필요성은 느끼지 못해 집에 TV를 두지 않았던 터라 일본에 살면서도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전국민적 공통인식에 둔감했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어른이 되고 보니 고길동이 성인군자네’하는 대화와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하는 무도밈들 사이에서 알아들은 척 멋쩍게 웃고 있는 외국인의 입장일 것이다.
그런 외국인이 그 현상을 찾아내, 심지어 외국어로 그럴듯하게 이름을 붙인다는 게 가능은 할까.
이후에도 비슷한 과제와 평가가 몇 번 있었다.
한 수업에서는 ‘와카야마현’이라는 오사카 부근에 있는 지역의 관광 유치를 위한 카피를 쓰는 과제가 있었다.
나는 와카야마에 가 본 적이 없다. 정말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여행은 좋아하니, 와카야마와는 반대편에 있는 이와테현을 여행하며 킷사텐에 앉아 떠오르는 문장들을 노트에 적어 내렸다.
참고로 이 강의과정에서는 제출한 과제가 우수작으로 뽑힌 수강생에게 ‘금연필(金の鉛筆)’을 준다.
그리고 이때 적어서 낸 카피는, 나에게 첫 금연필을 안겨주었다.
이 과제의 평가가 있는 강의 당일, 초반에는 그저 그랬던 카피들이나 아쉬웠던 카피들이 하나씩 소개되어 나갔다. 우수작이 불리기 전까지 언급된 나의 카피는 아차상으로 불린 한 문장뿐이었다. 수업에서 참고용으로 불릴 만큼의 완성도도 없었다는 건가.. 하며 낙담하고 있던 때, 아슬아슬하게 우수작의 시작인 10위로 내가 쓴 문장이 화면에 비쳤다.
돌아오는 차 안이 더 떠들썩한, 그런 가족여행을 했다.
帰りの車のほうが盛り上がる、そんな家族旅行をした。
온천, (지금은 없어진) 판다, 트래킹, 해변가 등등 소구점이 너무 많으니 '여러 연령대가 만족할 수 있는 가족 여행'을 테마로 잡아보자. 가족 모두가 만족한 여행 후엔 무엇이 남을까, 하는 생각에서 가족과 함께 이동하던 차 안을 떠올리며 쓴 문장이었다. 와카야마스러운 요소가 너무 없어 제출하면서도 긴가민가 했지만, 강사분은 '가족여행이라는 소구점에서 본 적 없는 재미있는 표현이었다’라고 평가를 해주셨다.
‘일본인이라면 이럴지도 몰라’하며 끼워 맞추던 카피는 혹평을 받았고, 내가 직접 경험하고 떠올린 장면을 채용한 카피는 우수작으로 뽑히더라. 겉돌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을 그만 두니, 오히려 나의 경험과 문장은 신선한 시선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를 경험하는 순간에 나는 그동안 이방인으로서 마주해 왔던 고독들의 보람을 느낀다. 취업면접에서 떠들어온 '일본인이 가지지 못한 관점을 가졌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었음에 안심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모두가 공감하기도 하는 카피라이팅은 어렵지만 재미있다. 지금은 더는 광고업계 종사자도 아니게 되었지만, 아직도 언어를 불문하고 좋은 카피를 찾으면 수집하여 혼자 감탄하다가 SNS에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나에게 첫 금연필을 선사해 준 와카야마현으로 떠난 여행도,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사진 정리하느라 바쁠 정도로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