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처음 3일 동안은 오빠를 볼 때마다 때리고 싶었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100km 정도 남겼을 무렵 아내가 말했다 “여기를 왜 걷는 건지도 잊을 정도로 너무 힘들었거든”. 우리가 걸었던 길은 거의 800km로, 서울에서 제주까지가 약 450km이니, 거의 왕복에 가까운 그 길을 30일에 나눠 걷는 게 보통일은 아니었다. 한국이었다면, 체력이 떨어진다 싶으면 삼계탕과 같은 보양식이나 우리의 취향이 딱 맞는 음식으로 몸을 챙길 텐데, 스페인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곳곳에는 Bar(매점, 식당, 동네 사람들이 쉽게 모이는 위치에 있는 가게)가 있었고, 우리는 그때마다 체력을 잘 회복할 수 있었다.
"여보 정말 신기하게 더 걸을 기운이 없을 때면 bar가 눈앞에 보이네"라고 말하는 내게, "지난 수백년 동안 다 고만고만하게 힘든 지점이 있었겠지. 그리고 눈치 빠른 사람이 거기에 장사를 시작한게 아니겠어?" 아내가 천재로 보였다.
bar에 들어가면 거의 이런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준다. (자료 : steemit.com/camino/@springfield)
bar에 들어가면 먼저 얼음이 들어간 시원한 콜라나 환타를 주문한 뒤 덥고 지친 몸을 식혔다. 대체로 어느 bar든 또르띠야라 부르는 감자와 계란으로 만든 오믈렛과 하멍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팔았는데, 허기를 달래고 2시간 정도 다시 걷기에 딱이었다. 워낙 긴 길이라 bar가 위치한 지역의 특색에 따라 음식이 조금씩 달랐는데, 산티아고에서 가까운 멜리데Melide라는 중간규모의 도시에서 팔던 뽈뽀(문어요리)는 문어 특유의 맛에 식감까지 아주 예술이었다. 여기에 화이트와인을 곁들이면 궁합이 정말 좋았다. 게다가 bar에 앉아있다보면 함께 길을 걷는 순례자들을 만나게됐는데, 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문어로 만든 요리 '뽈뽀', 진짜! 맛있다.
bar가 스페인이 가진 하나의 특별한 문화라 그런지 순례객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의미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한 번은 우연히 사람들이 잘 쉬어가지 않는 아조프라azofra라는 작은 마을에 머물렀는데, 알고보니 마을 축제가 있던 날이었다. 금요일 이른 오후부터 마을의 모든 공간을 활용하고 있었는데, 성당 앞 광장에는 무대를 설치했고 멀지않은 곳에는 아이들을 위한 체험부스를 운영하며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특히 이 마을에 하나 있던 bar는 모든 세대가 모여서 시끄럽게 떠드는 곳이었다. 우리도 좀 어울리고 싶었는데, 이 날은 일반 순례객에게는 열지 않고 마을 주민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 맛있는 냄새를 뒤로하고 숙소로 향한 우리는 비록 먹다남은 차가운 샌드위치와 라면 스프를 끓여마시며 허기를 달랬지만, 밤새 bar에서 시끌벅쩍하게 즐기는 모습에서, 이들이 맺어온 오래된 관계와 마을의 어떤 이슈마다 늘 소통하는 장면들을 상상할 수 있었다.
순례길의 목적지인 산티아고 대성당과 그 앞 광장이다. 사진에는 안보이지만, 함께 걸었던 순례객들을 저 광장에서 해후하며 감동스러운 만남을 갖는다.(자료 : freepik)
bar는 좀 넓은 의미에서 '광장'으로 불러도 무방하다. 광장은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회에서 존재한다. 광장은 어떤 공간이면서도 사람들 간의 소통과 교류가 이뤄지는 공론장이라는 개념을 함께 지닌다.
익숙한 듯 생소한 이 개념들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 책의 목적은 광장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게 아니다. 나는 광장이라는 공론의 장이 우리의 사적 영역을 비롯하여 공적 영역까지, 우리 호모 사피엔스에게 정말 중요한 곳이라고,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행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문장이 유명한데, 그가 말하고자 했던 원래 뜻은 '타인의 판단에 의존할 때 우리 삶은 지옥처럼 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즉 개인의 자유스러운 삶과 그에 대한 온전한 책임이 각자에게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 문장은 사람들에게 오독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말 자체만을 가지고 인간이 관계 맺고 사는 것의 피로를 강조하면서 사회적 관계의 기준점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 오독이 진실이 되는 이유는 대체로 사람들의 삶의 경험이 '타인을 지옥'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젊은 청년들에게 너무나 힘든 곳이라고 한다. 특히 윗세대가 꽉 붙잡고있는 조직에서 꽉 막혀있는 소통의 방식은 이미 학창시절주터 수평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의사소통하는 경험이많은청년들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윗세대는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로 청년들을개인주의가 만연한 세대라고 부정적으로평가하기도 한다. 일리가 있는게 윗세대라 부를 수 있는 중장년+노년은 대체로 공동체적인 마인드로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에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이 연공서열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수직적이고 납득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에 익숙하다.
밀레니얼 세대로 분류되는 나도 수직적인 소통의 경험을 많이 했지만, 그 동안 머물렀던 조직에서는다행이도 민주적인 경험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며 '갈등'이라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해도 그것이 지옥이라기보다는 헤쳐나가야할 관문이라는 생각이 더 크게 자리잡혀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은 소수일 것이다. 대다수의 청년들에게 광장, 타인, 교류, 소통 등은 지옥의 이미지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아니 청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세대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이뤄지는 집단 간 소통, 서로 간 교류, 함께하는 무엇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광장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점을 증명하는 공간이다. 사람들과 교류하고 소통하고 무엇인가를 작당하는 공간이 없다면 그 사람의 삶은 정말 외로울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고,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며 소통해야만 한다. 우리는 결코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다. 사람들과의 소통이 때로는 피곤하고 갈등을 주지만 그것은 행복한 여행에서 만나는 피로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인데 미얀마와 태국으로 여행을 갔었다. 여행 말미 방콕의 깊어가는 밤, 여전히 뜨거운 공기, 전광판이 밝히는 소란스러운 거리들, 저녁을 먹은 뒤에도 도시 곳곳을 놀러 다니다 보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야외 길가에 식탁과 의자를 깔아놓은 한 식당에 자리 잡았다. 쌀국수와 튀김을 몇 가지 시키고 음식을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봤는데, 현지인이 다수였다. 그런데 내 눈에 특히나 들어오던 태국인이 있었는데, 그는 어느 종업원인 듯, 점원복을 입고 혼자 밥을 먹고 있었는데, 고개를 숙이고 음식만 먹고 있었다. 그러다 얼굴을 들었는데, 깔끔하게 스타일링한 머리 스타일과 복장과는 괴리되는 어떤 괴로움이 보였다. 잠시 나는 저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를 생각하는데 불현듯 소외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에서 느껴지는 쓸쓸함
그 남자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사람의 모습에서 현대인의 소외나 단절이 주는 고통을 상징화했다. ‘단순히 혼자 밥 먹는다고 저런 얼굴이 나타나지는 않을 테지, 만약 저 사람이 누군가와 연결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막연하게 이런 생각을 하며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에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큰 도시에서는 종종 비슷한 얼굴들을 찾을 수 있었다.
현대사회의 사람들은 사적인 관계 외에는 너무 단절되어 있다. 낯선 사람들을 안전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인 광장이 너무도 부족하기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적인 관계도 돈이 없으면 단절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사회는 외로움을 지나치게 개인의 몫으로만 부여한다.
‘현대 도시는 사람들 간 관계 맺는 장소를 제외하는 형태로 도시계획이 이뤄졌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교회에 있다면 그는 교회에 걸맞게 행동할 것이고, 우체국에 있다면 우체국에 걸맞게 행동할 것이다. 즉 경험은 그 경험을 할만한 장소에서 일어난다. 그런 장소가 없다면 경험은 일어나지 않는다.’ 소통과 연결이 없고, 외로움과 소외가 있다면 그것을 체험하게 하는 역할을, 광장을 멀게만 느끼게 하는 경험을 지금의 도시가 해오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 간 단절을 염려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연결을 노력하며, 사회 제도적으로 개인의 주권을 보장하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고자 하는 이들 덕분에 이미 여러 형태의 광장이 공론장이라는 이름으로 운영 중에 있다. 이런 시도들이 대의 민주주의의 진보, 시민주권의 확대, 시민참여의 대안 등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동시에 과거에 존재했던 다양한 관계와 소통 공간이 사라지며, 그 자리를 공공에서 채우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더 커지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다.
우리 시대에서 광장의 부재를 느끼고 이를 보완하려는 것은주로 행정에서 맡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광장이다. 우리 도시의 공간은 사람들이 교류하기 쉽게 변화해가고 있다. 또 각종 공론장에서는 지역의 시민들이 참여하여 어떤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주요 결정 사안이나 풀어야 하는 갈등을 토론, 숙의한다.
서울광장 조성 전 모습(자료 : 구조론연구소)
물론 행정 외에도 회사, 지역사회 등에서도현존하는 광장을 더 민주적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모이고, 만나고, 교류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일상 안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소통을 이어가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광장’이 더 필요하다. 광장은가장 사적인 영역인 ‘집’에서 조차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광장’은 너무 멀다. 일상에서 광장을 체감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는 우리의 가치관과도 연결된다. 우리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일까? 광장에서는 공동의 선익, 소통, 갈등조율, 합리적 과정 등 민주주의를 담보하는 가치가 가장 필요하다.
민주적인 가치를 체험할 수 있는 공론장은 공동체가 효과적인 소통을 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치유적이다. 정말 좋은 소통은 사람들에게 연결됨의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광장에 체감이 적은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단절, 소외, 비합리적, 갈등심화 등의 가치를 선택해 왔기 때문이다. 내가 해외의 큰 도시들에게 만난 외로운 사람들에게 광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하고 상상해보곤 한다. 그 안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누군가는 들어주고, 서로 관계 안에서 일상을 보냈다면 그 종업원의 표정은 그 때보다는 좀 더 밝지 않았을까?
그에게는, 우리에게는 광장이 너무 멀다. 하지만 그 거리를 알았기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다. 우리에게는 더 가까이에 있는 더 많은 광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