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가족과 친지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죽으면 그들의 애도를 받고 인생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혼자 살다 죽는 사람은 누가 기억해줄 것이며 그들의 삶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가? 또한 가족과 친지가 있어도 죽을 때는 누구나 혼자가 아닌가.
주인공은 죽은 사람들이 남긴 것들을 통해 그들의 인생을 추적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주고, 혼자인 자신의 삶의 의미도 생각해본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존 메이는 연고 없이 고독사한 사람들의 거처를 정리하고 그들을 장례를 치러 주는 일을 하는 구청 공무원이다. 고독사 신고를 받고 그는 제인이라는 여성의 방에 가서 그 방에 남아있는 것들을 둘러보고 고양이와 함께 찍은 사진액자, 플라맹고 춤을 추는 사진, 몇 장의 편지, 반쯤 사용한 립스틱과 탁자 위의 목걸이를 집어 들고 봉투에 넣는다. 오디오가 있다면 소장한 콜렉션을 살펴보았을 것이고, 턴테이블에 넣고 최근까지 들었을 LP 레코드도 가져왔을 것이다. 그는 이것들을 가져와서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생각한 뒤 그녀의 이야기를 엮어서 추도사를 만든다. 그리고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가족과 친지들에게 연락을 한다. 그러나 혹시 경제적 부담을 떠안을까 봐 걱정이 되어 그들은 결국 마지막 의식에 참여하기를 거절한다.
달랑 사제와 존 메이만 참석한 장례식에서, 고인이 좋아하던 음악을 틀어놓고 사제는 존이 정성껏 쓴 추도사를 낭독한다. “제인은 자식을 기다리던 부모님의 사랑속에서 태어났고 소박한 목걸이와 립스틱 하나에도 기뻐했습니다.....” 이어서 존은 고인의 종교방식에 맞는 절차로 매장이나 화장을 하고 유골 단지를 혹시 유족이 찾으러 오면 주기 위해 법이 보장한 최장 기간 동안 보관하다가 기한이 끝나면 그가 좋아할 만한 장소에 정성껏 뿌려 준다.
존 메이의 생활도 거의 죽은 사람과 비슷할 정도로 변화도 없고 움직임도 색깔도 없지만 그는 자신의 일을 진심을 다해 해낸다. 그러다가 어느날 자신의 맞은편 아파트 창에서 가끔 보이던,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모르는 인물인 빌리 스토크가 홀로 죽은 지 한참 뒤에 발견되자 그는 빌리의 죽음이 미래의 자신의 죽음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이때, 직장 상사는 존의 업무처리 방식이 의미도 없고, 느리고, 돈도 많이 들어 비효율적이라고 비판하며 그를 해고한다. 상사의 논리는 장례식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절차이며, 가족들이나 친지가 원하지 않는다면 의식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또 국가재정으로 경비가 싼 화장 대신 비싼 관과 매립지가 필요한 매장을 하는 것은 낭비이고, 가져갈 사람도 없는 유골함을 빨리 쏟아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것은 직무 태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군가 기억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삶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존은 마지막 과업으로 방탕하고 자유 분망하지만, 딸을 사랑했던 빌리 스토크의 삶을 따라가 본다. 그를 따라 처음으로 밝은색의 옷을 입고, 술도 마시고,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통조림 대신 날생선을 구워 먹고, 빌리의 딸에게 좋은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움직이는 삶’을 살아본다. 그리고 잊혀졌던 빌리를 모두의 마음에 불어넣고 가족과 친구들을 장례식에 초대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교통 사고로 그도 자신이 존엄하게 보내주었던 많은 고인들처럼, 혼자 아무도 모르는 죽음을 맞는다.
빌리의 장례식에는 존이 만났던 빌리의 가족과 지인들이 모여서 그를 추모하고 기억했다.
반면에 바로 옆에서 치러진 존의 장례식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존의 집에서 그를 설명할 물품을 가져온다면 첫 번째일, 그가 품위를 다해 보내준 고인들의 사진을 모아놓은 앨범을 통해 그의 인생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었다.
존 메이는 고인이 남긴 물품 중 몇 가지 아이템을 골라 그것을 연결하여 스토리를 만들고 혼자 살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마치 화가가 자신이 고른 물건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고민을 거듭하다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배치한 후 정성껏 정물화를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영화의 제목이 ‘정물화’(still life)일 것이다.
또는 존 메이가 다루는 일이 죽은 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정지된 삶’(still life)일 수도 있다. 영화는 정지되어 있어 가끔 사람이 지나가지 않는다면 사진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움직임이 없다. 매일 똑같은 루틴을 반복하고 통조림 음식만 먹는 등, 주인공의 삶도 거의 정지되어있다.
아니면 누군가 기억한다면, 남은 자의 마음에 담겨 있다면, 죽어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여전한 삶’(still life)이라고 볼 수도 있다.
존은 언젠가 자신도 이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맞이할 죽음 앞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동일시했던 빌리의 삶에 뛰어들어 이야기를 만들고 그가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에 기억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빌리의 장례식이 사실 자신이 맞고 싶었던 장례식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러려면 움직이는 삶을 살고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은 순간, 존 메이는 죽음을 맞는다.
슬프게도 실제 세상에는 자신 대신 인생의 의미를 부여해 줄 존 메이 같은 조력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면 아무도 찾아주지 못한다.
영화에서는 그의 무덤에 존이 장례식을 치러 주었던 고인들의 유령들이 앨범 속 사진과 똑같은 나이와 옷차림으로 나와 모여서 존을 추모한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이장면을 감동적이고 눈물이 나는 명장면으로 꼽는데, 사실 그의 장례식에는 그가 장례를 치러준 죽은 사람들 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들이 함께 참석하여 이세상 누구의 장례식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존 메이의 집에 가서 그의 검소한 방에서 그의 인생 자체인 앨범을 찾아, 생전에 그가 했던 것 처럼 그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인정하고 그를 존엄하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