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말을 타고 집에 돌아오던 의사가 집의 입구에서 누군가가 양쪽 두나무를 가로질러 매어놓은 줄에 걸려 넘어져서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 사건을 조사하던 중 잇따라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마을의 모든 땅과 생산 시설은 남작의 소유이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그의 땅을 빌려서 사는 소작농이고 일부는 남작의 집에 고용되어 일을 한다. 수확량이 많다고 해서 소작인들의 몫이 많아지는 것은 아니다. 몸이 약해서 수확작업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은 제재소로 보내지는데, 어떤 소작농의 아내가 제재소에서 일을 하다가 썩은 마루 바닥이 꺼지면서 추락하여 죽게 된다. 아내를 사랑하는 소작농은 깊은 슬픔에 잠기지만 그것을 문제 삼아서 남작의 심기를 건드리기에는 많은 식구들의 생계가 달려있기에 입을 다문다. 그러나 그의 큰아들은 남작의 시스템이 엄마의 죽음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분노하여 남작 부인이 아끼는 양배추밭을 파헤쳐 엉망을 만들어서 복수를 한다.
그 결과 땅도 뺏기고 소작농의 딸이 남작의 집에서 해고되고 소작농의 집은 경제적 어려움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때 남작의 아들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제재소 천정에 매달려서 엉덩이를 맞아 피를 흘리는 채로 발견된다. 남작은 의사의 낙마 사건을 비롯해서 이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의 범인을 찾으라고 주민들을 압박하기에 이른다.
마을에서 존경을 받는 목사는 아이들이 늦게 귀가하자 회초리와 금식으로 벌을 주고 사춘기 큰아들 마틴이 성적인 호기심을 갖는 것에 대해 심하게 질책하며 순수를 상징하는 하얀 리본을 팔에 매게 하고 잘 때 침대에 두 손을 묶는다. 마틴은 마을의 강에 있는 높은 다리 난간에 올라가 위험한 곡예를 하면서 신에게 나를 죽일 기회를 주겠다며 분노를 표출한다.
또한 목사는 견진성사를 받는 큰딸 클라라의 학교에 신학 수업을 하러 갔을 때 학생들이 떠들자 그녀가 소리치는 원숭이떼의 주역이었다며 친구들 앞에서 모욕을 주고 교실 뒤에 벌을 세운다. 그 뒤 그녀는 아버지 서재에서 그가 아끼는 새장 속의 새를 꺼내 가위로 찔러 죽인 후 아버지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다음날 태연하게 견진성사를 받는다.
마을에서 유일한 의사는 유능하지만 가슴에 사랑이라고는 없는 자로, 아내를 정신적 신체적으로 학대해서 일찍 죽게 만들고, 이웃의 산파와 내연 관계로 지내면서 장애 아들도 낳지만 그녀도 성적 도구로 이용할 뿐이다. 딸 안나를 어릴때부터 추행하다가 성장하자 산파를 버리고 딸에게 아내 역할을 하게 하는 파렴치한 인간이다.
남작의 집 관리인의 가정에 남자 아기가 태어나자 아들 형제들은 대놓고 싫어하고 심지어는 추운 겨울밤에 아기방의 문을 열어놓아 아기가 감기에 걸리게 하여 위험에 빠뜨린다. 딸 에르나는 아기 동생을 돌보며 이 모든 상황을 괴로워한다.
형제는 주인집 아들 지기와 밖에서 놀다가 자신들에게는 풀피리밖에 없는데 지기는 좋은 리코더로 연주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빼앗다가 그를 물에 빠뜨려서 죽을 뻔하게 한다.
남작 부인은 악의, 시기심, 학대, 뒤틀린 복수, 폭력이 가득한 이 마을에서 자식을 키우고 싶지 않다고 소리친다.
남작의 분노는 커져서 예배에도 불참하게 되고 마을의 불안과 상호불신도 높아가던 중, 밤에 창고에 큰 불이 나고 다음날 아침 소작농은 자살한 채 발견된다. 또한 산파의 장애인 아들 칼 리가 누군가의 공격으로 눈이 찔려 실명하게 된다.
얼마 후 의사의 가족과 산파가 갑자기 마을에서 사라지고 사라예보에서는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암살되어 전운이 감돌게 된다. 아이들의 교사는 목사를 찾아가서 이 모든 사건이 있을 때마다 아이들의 무리가 사건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의심을 전하지만 목사는 부인하며 침묵하고, 예배에서 아이들은 여전히 천사 같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른다.
마을의 영주인 남작은 주민들을 대놓고 학대하지는 않지만 아무리 일해도 겨우 연명할 정도의 보수를 주면서 땅과 일자리를 좌지우지하며 마을 사람들의 목숨줄을 움켜쥐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너무 오랜 기간 이런 분위기의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불평을 표현하지도 않고 문제를 외면하며 시스템의 변화도 원치 않는다. 이곳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외부인인, 교사와 남작의 부인이다. 영화의 나레이션을 교사가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만이 외부자 시선을 가졌기 때문이다.
외부인으로서 교사는 이 마을의 이상한 사건을 접하고 아이들의 비행을 눈치챈다. 의사의 낙마 사건 때에도 클라라가 이끄는 아이들 무리가 의사의 집을 찾아와 안나가 괜찮은지 보러왔다고 하고, 칼리가 다쳤을 때도 칼리가 걱정 되어서 왔다며 산파의 집을 염탐한다. 관리인 집 딸 에르나가 경찰 조사를 받을때에도 문밖에 모여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대고 엿듣는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위선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직접 단죄한다
의사는 안나를 추행하니 벌을 받아 마땅하고, 남작은 마을 사람들의 밥줄을 쥐고 흔드니 그아들은 벌을 받아야하고, 산파는 의사와 불륜이니 장애인 아들이 대신 벌받아야 하는것이다.
억울하게 아버지에게 벌을 받은 클라라는 목사의 새를 죽여서 복수한다.
이미 많은 형제들이 있기때문에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충분한 관심을 받지못하던 집사의 큰아들은 새로 태어난 아기 동생을 죽을 위험에 빠뜨리고, 남작 아들의 비싼 피리를 빼앗으려 그를 물에 빠뜨린다.
아이들을 악마로 만든 것은 어른들이 자신의 억압된 어두운 무의식의 세계를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떠넘겼기 때문이다. 참고 있을 뿐 어른들도 시스템의 불의에 대한 분노와 무력감을 느꼈는데 억압했고, 그것들을 무의식에 폭력과 시기심과 뒤틀린 복수심으로 고스란히 저장한 다음 아이들에게 투사했다. 힘없고 미성숙한 아이들이 어른들의 어두운 측면들을 집단 무의식으로 저장하면서 이런 무서운 사건들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결국 어른들은 자신들의 어두운 무의식의 대리 집행자로 아이들을 이용한 셈이다. 아이들은 모두 억압과 몰개성의 상징인 올림 머리와 검은 드레스, 짧은 머리와 멜빵 바지를 입고 있다. 결국 목사가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가치의 상징인 '하얀 리본'은 순수와 순결이 아니라 어른들의 위선과 거짓을 의미한다. 이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끔찍한 일들을 집단으로 실행한다. 어른들이 무력한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듯이 아이들은 자신들보다 약한 존재인 더 어린아이나, 장애아나, 동물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는 천진한 얼굴로 성가대에 서서 찬송가를 부른다.
흰 눈이 덮힌 마을은 참으로 평화롭고 곡식이 가득한 들판은 저토록 풍요롭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어지럽고 가족들은 굶주리는 것처럼, 천진한 아이들의 얼굴 아래에는 악마가 숨어있었다.
물론 여기에 동조하지 않는 양심을 상징하는 아이들도있다. 관리인 딸 에르나는 이러한 행동을 괴로워하며 교사에게 꿈을 꾸었다고 핑계대며 아이들의 범행을 알려준다. 또한 목사의 막내 아들은 순수함의 상징으로, 다친 새를 치료해서 위선자 아버지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어리거나 너무 소수에 불과하다.
아이들의 단순한 규칙 위반이나 그 나이 때의 당연한 성충동같은 작은 일탈은 죄악시 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위선과 비굴과 추악한 욕정을 마음에 품고 사는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폭력과 악습을 고스란히 대물림하였다.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 전체 이야기를 축소한 우화라고 볼 수 있다면 사회나 나라의 규모로 이야기를 확대할 경우 파급효과가 클 것이다.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어떤 어른이 될 것이며 그 사회의 분위기는 어떨까 생각하면 섬뜩하다. 그때가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시기이고 나찌즘이 팽배했던 시기였던 것이 우연일까? 이 작품의 원작소설 제목이 ‘독일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전쟁의 화마는 갑자기 타오른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심은 불씨가 자라서 생긴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