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인듯한 젊은 동양 여자가 왼쪽의 백인 남자를 살짝 등지고 오른쪽에 있는 동양 남자와 열심히 대화하는 중이다. 동양인끼리 부부일까, 영어를 하는 사람끼리 부부일까? 관객의 시점 샷으로 그들을 비추며 과연 저들은 어떤 관계일까 궁금해하고 있을 때, 그 여자가 궁금하면 영화 속으로 들어와서 자신과 동행하며 알아보라는 듯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관객을 초대한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2살 나영과 해성은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이다. 나영이 계속하던 1등을 해성이 차지하자 나영은 울음을 터뜨리고 해성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고 그녀를 달랜다.
나영네 집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되었는데 엄마는 딸에게 추억을 만들어주려고 딸이 좋아하는 친구 해성과 함께 조각 공원으로 나들이를 간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둘은 손을 꼭 잡고 온다.
나영의 이민 소식을 나중에 들은 해성은 그녀가 한국에는 노벨상도 없으니 이민 간다는 말에 자신의 섭섭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난감하고, 마지막 하굣길의 갈림길에서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둘은 그렇게 헤어진다.
12년 후 나영은 뉴욕에서 연극을 전공하는 학생이 되어있었고 자취방에서 페이스북으로 친구들을 검색하던 중 해성도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둘은 화상으로 재회하게 된다. 설레는 마음으로 매번 통화를 기다리고 서로를 원하지만 연결상태가 나쁜 스카이프와 핸드폰은 번번이 끊기고 점점 통화하는 일은 학업과 할 일에 방해가 되어간다. 미래가 불안하고 돈도 없으니 누구도 상대방이 있는 도시로 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장거리 연애에 지쳐간다. 나영은 자신은 한국에서 캐나다로, 또 미국으로 여러 번 이민을 한 사람이어서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을 하며 둘의 대화를 그만하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또 이별한 후, 해성은 군대를 다녀와서 공대를 졸업하고 회사원이 되고, 나영은 작가인 아서와 사귀다가 결혼한다.
다시 12년이 흐르고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해성은 여름휴가를 나영이 있는 뉴욕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나영에게 연락한다. 마침내 둘은 뉴욕에서 24년 만에 실제로 만나게 된다. 극작가가 되어있는 나영과 회사원으로 사는 해성은 이틀동안 뉴욕의 대표적인 관광지들을 함께 다니며 대화를 나눈다. 나영의 남편 아서는 이 상황이 신경이 쓰이지만, 아내의 마음에 오랫동안 들어있던 첫사랑과 보내는 시간을 묵묵히 지켜본다. 마지막 밤 세 사람이 함께 만났을 때가 그들이 술집의 바에 앉아있던 영화의 첫 장면이다. 나영은 영어를 못하는 해성과 한국말을 못 하는 남편 사이에 앉아 때로는 서로의 말을 통역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서를 소외시킨 채 둘이 대화에 몰두하기도 한다.
이제 해성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고 나영은 그를 택시를 태워 보내고, 집으로 눈물을 흘리며 돌아와서 아서의 품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감성적인 대사와 디지털이 아닌 필름으로 찍었다는 영상의 아름다움이 뇌리에 길게 남는 아름다운 영화이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영화는 어차피 작가나 감독의 기억이나 상상에 존재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어쩌면 비현실적인 아름다운 장면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민 가기 전 둘이 마지막으로 헤어진 갈림길 장면이나 과천 미술관 조각 공원에서 어린 해성과 나영이 놀았던 장면은 그들의 기억뿐 아니라 관객의 기억에도 인장을 남길 정도로 아름답다. 뉴욕에서 재회했을 때 처음 만난 부조 앞에서의 포옹이나 브루클린의 ‘제인의 회전목마’ 앞에서의 장면도 주인공들이나 관객에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작가이자 감독인 셀린 송의 자전적인 이 작품에서 내내 강조하는 개념은 ‘인연’이다. 외국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 개념을 그녀가 애인인 아서에게 말해주는 형식으로 글로벌 관객들에게 설명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이나 윤회에서 무언가 접촉이 있었던 사람들은 다음 생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중에 특히 결혼은 가장 많은 인연을 필요로 한다. 이들이 재회하는 시점도 서양의 10년 단위가 아니라 동양의 12간지의 한구간을 의미하는 12년 마다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면 작가 자체라고 볼 수 있는 주인공 나영(노라)은 오히려 인연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그녀는 야심 있고 성취욕이 있는 여성으로 현재에 발을 붙이고 미래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의 말대로 첫사랑 때문에 삶과 커리어를 팽개치고 다른 곳으로 도망칠 사람이 아니다. 늘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위로받아야 하고 상대방쪽에서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민을 갈 때도 그다지 슬프지 않았고, 화상통화로 연애할 때도 단호히 이별했고, 지금도 옆에서 자신을 지키는 아서의 옆을 떠날 생각이 없다. 과거의 끈을 이어갈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저 인연이라는 단어를 모호하게 쓰며합리화하는 것 같이 보인다.
영화의 제목인 '전생'을 어떤 사람이 태어나기 전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이 설령 있었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같은 논리로 후생도 지금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삶이라면 아무 소용 없는 말잔치일 뿐이다. 따라서 영화 제목인 전생의 의미는 해성과 나영의 과거의 어린시절을 말한다고 볼 수 있고, 지금 생에서 그들이 안된다는 이야기는 결국 이별하겠다는 뜻이다.
해성이 어떤 사람인지는 객관적이 묘사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영화는 여주인공인 작가의 입장에서 본 해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도 종합적으로 유추해 보자면 그는 나영과 잘해보려고 뉴욕에 간 것은 아닌 것 같다.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나영이지만 외아들로 자라서 우유부단하기도 하고 현실적이기도 해서 24살에 노력해서 연결한 나영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발전시키지 않는다. 관계가 위험에 빠졌을 때 미국으로 한 번 갈 수도 있는데도 오히려 자신의 취업을 위해 중국에 간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첫사랑 이미지가 마음에 계속 남아있자 그것의 매듭을 지을 필요성을 느낀다. 어린 시절 좋아하던 첫사랑과 제대로 이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고, 두 번째도 흐지부지 이별을 한 채로 여전히 찝찝한 마음이남아있기때문이다. 결국 그는 36살이 되어 ‘안녕’을 제대로 말하기 위해 미국 땅을 밟는다.
이틀 동안의 대화를 하고 마침내 그가 어두운 새벽에 나영에게 이별 인사를 할 때, 그에게 12살에 그들이 동네 갈림길에서 헤어졌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들이 12살에 실제로 헤어진 시간은 낮이었지만, 해성에게는 지금의 시간이 겹치며 어두운 새벽의 장면으로 변한다. 이렇게 이별은 완성된다.
남편 아서는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아내와 책과 영화의 취향이 비슷하고, 작가로서 아내의 연극에 대해 조언해 주고, 아내가 첫사랑을 만나는 것을 지켜봐 주고, 울보 아내를 달래주기까지 한다. 그들이 같이 누워서 담담하게 상황을 이야기할 때도 문학적으로 스토리를 만들며 자신을 '운명적인 사랑을 방해하는 사악한 백인 남자'로 정의할 정도로 지성과 유머가 있는 사람이다. 이정도는 돼야지 욕심 많은 여자와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야심이 있는 나영이 한국을 떠나지 않고 나중에 가부장적인 해성과 결혼했더라도 해피엔딩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많은 ‘만약에~’를 남발하지만 그들은 이루어지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영화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인연이 아니었다. 해성은 한국 남자로 가부장적이고 현실에 적응해서 살 사람이고, 나영은 미국에서 ‘노라’로 성취하며 살아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자아도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여자 주인공은 두 남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과거의 자신의 한국적 정체성을 이해하는 해성과, 현재의 미국적 정체성을 이해하는 아서가 있어야 자기의 전체가 완성된다는 메타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