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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Jul 11. 2024

부부의 게임

환상의 복식조

     

소설가 오정희 씨를 좋아한다.

그녀의 작품 중 ‘저녁의 게임’을 감탄하며 읽었었다. 오래된 관계를 화투에 비유하며 이처럼 실감나게 묘사한 작가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여자 주인공은 아버지와 살면서 저녁마다 화투를 친다. 매일 저녁 벌어지는 루틴이다. 말이 게임이지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워낙 오래된 화투장이라, 들고 있는 뒷면만 보아도 그것이 어떤 패인지 다 알기 때문이다. 쪽 귀퉁이가 둥글게 닳은 화투장은 목단 껍질이고, 가운데 금이 간 것은 난초 다섯끗, 오른쪽 모서리가 갈라진 것은 멧돼지가 그려진 붉은 싸리 열끗인 식이다. 딸이 차를 끓이는 동안 아버지는 그녀의 패를 몰래 뒤집어 훔쳐본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아버지의 표정에 다 드러난다. 그래도 속아주고 져주며 저녁마다 게임을 한다. 낡고 너덜너덜해진 각본으로 끊임없이 연극을 하는 것이다.


오래된 부부도 비슷하다. 결혼 초에는 서로 어떤 반응을 할지 모르고 자기가 하고싶은 말만 하다가 싸우기도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상대방이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심중을 파악한다. 상대방의 패가 다 보이는 것이다. 어떤 말을 하려고 하면 눈빛으로 제압한다. 그러면 다 들켰다는 표정으로 왜 말도 못 하게 하냐고 불평한다.

이것을 좋은 쪽으로 보면, 나중에는 싸울 일도 없어진다는 이다. 어떻게 말했을 때 화를 냈는지에 대한 데이터가 많이 쌓여서 그쪽을 피할 수 있다. 반대로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지도 안다.

나쁜 쪽으로 보면, 무슨 일이 생겨도 그럴 줄 알았다는 마음이 들어서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너무 예상되는 뻔한 일만 일어나면 인생이 지루해진다.

     

남편이 정년퇴직을 한 후에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각자의 사교생활과 취미 활동을 존중해 주지만 둘이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니 전략이 필요했다. 규칙적으로 같은 취미 활동을 하면서 부족한 운동도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내가 예전부터 해오던 탁구를 함께 하자고 권했다.

함께 탁구를 친 이후로 동호회에서 여러 사람들과 게임을 하지만 가장 많이 합을 맞추는 사람은 남편이다. 그러니 그가 탁구 칠 때의 습관을 자세히 알고 있다. 어떤 자세를 취하면 어떤 서브를 넣는지, 어떤 기술에 능한지, 어떤 실수를 자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의 서브를 잘 받는다.

언젠가 동호회에서 친선 탁구대회가 열렸는데 다른반의 사람들이 남편의 서브를 잘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들보다 탁구 실력이 좋은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자주 상대하는 사람의 습관을 다른 사람보다 잘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함께 친지 오래된 같은반 회원들의 공도 마찬가지다. 자주 쳐보았기 때문에 누가 어떤 공을 치는지의 정보를 이미 알고 반응한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처음 게임을 해보면 완전히 새로운 경기라서 전혀 그들의 기술을 예상할 수 없어서 못받고 실수를 하게 된다.

     

기왕 하는 취미 활동이니 잘하고 싶다. 그러나 둘이 하는 단식경기에서 남편을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둘 다 고급 기술을 구사하며 수준 높은 게임을 하고 싶을 뿐이다. 또 각자 뻔한 기술 말고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여 서로를 놀라게 해 주기를 바란다. 예상되는 기술 말고 신박한 테크닉으로 놀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혼합 복식경기에서 부부가 한 팀이 되어 환상의 팀플레이를 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어떤 점을 보완해주고 어떻게 해야 파트너에게 좋은 찬스를 주는지 잘 알아야 최상의 복식조가 되는데, 부부는 이런점에서 가장 좋은 조합이 아닐까 한다. 잘 연습해서 그 수준에서는 가장 좋은 환상의 복식조가 되었으면 좋겠다.

모든 복식 게임이 그렇듯이 파트너를 신뢰하지 못하면 그 경기는 망한다. 발레나 피겨 스케이팅 페어 경기나 볼룸 댄스에서도 참가자들은  위험한 동작들을 파트너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실시한다. 그렇지 못했을 때 성적도 나쁘지만 심하게 다치는 사고가 나기도 한다. 자신만 돋보이려고 욕심을 부리면 사고가 날 때가 많고 서로를 원망하게 된다.

     

지금까지 게임에 빗대서 부부관계를 이야기했지만, 현실의 부부 사이에서도 매번 뻔한 리액션으로 인생을 지루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치 먼 옛날부터 렇게 살았던 것처럼 굴며 앞으로도 똑같은 방식으로 살것이라고 체념하고 싶지 않다.

여생을 함께 할 상대방에게 아직도 모르는 영역이 많이 남아있고, 나도 보여줄 부분이 많이 있는 것이다. 또 아직 새로 배울 것들도 많이 남아 있다.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또는 못했을) 분야를 상대방이 섭렵해서 보여준다면 내 힘을 안 들이고도 내 인생은 두배로 풍요로워 질 것이다.

함께 게임의 기술을 습득해가며 성장해간다면 ‘지루함’이라는 복병을 물리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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