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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한나>-외면해도 스며 나오는 썩은 냄새

등 뒤에서 모른척 해도 소용없다

by 윤병옥

한나는 노년기에 접어든, 주위의 존재들을 늘 따뜻하게 보살피는 여성이다.

집안을 잘 정돈하고 가꾸고, 남편을 지지하고, 자식과 기르는 개에게도 정성을 다했다.

손자와 자신이 일하는 집 자폐아에게도 사랑을 아낌없이 베푼다.

그러던 그녀가 혼자 남아서 자신을 들여다본다.

무엇이 그녀를 불편하고 괴롭게 만드는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나가 특별한 요리를 해서 남편과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식탁의 전등이 나가자 남편은 능숙하게 새 전구를 가져다가 전구를 교체하고 계속 식사를 한다. 한나는 남편의 등을 마사지해주고 잠자리에 드는데 둘은 조용히 돌아누워 등을 대고 잔다. 다음날 아침, 한나는 욕실에 앉아 목걸이를 만지며 복잡한 표정으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고, 그들이 외출하려 할 때 개와 남편은 서로 쓰다듬고 안아주며 다정한 모습을 연출한다.

차 안에서 남편은 시계와 결혼반지를 빼서 한나에게 맡기고, 조금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뜻밖에 교도소였다.

얼마 후 한나가 다시 찾아간 교도소의 면회실에서 만난 남편은 누구에게 맞은 듯 눈에 멍이 들어있고 그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지만 자신은 무죄라고 말한다.

그녀는 취미로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

연극 연습에 앞서 그들은 모여서 인간의 언어가 아닌 동물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고, 공간을 좁혀가며 부딪치며 걷는 행위를 한다.

그들이 연습하는 연극은 입센의 ‘인형의 집’이다. 상대역의 남자가 한나의 집에 방문하여 둘은 대본 리딩을 한다. 노라가 남편의 결혼반지를 돌려달라며 “나 자신과 주변을 명확히 보기 위하여 혼자 있겠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습한다.

동아리 중간발표에서 그녀는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가방을 뒤집어 모든 것을 꺼낸 후 뒤지다가 못 찾고 절망한 듯한 여인의 연기를 하고 동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다.

돌아오는 길, 한나는 자신을 위해 백합 꽃다발을 사서 집에다 꽂는다.


한나는 아들을 못 본 지가 오래되었다. 손자의 생일이어서 좋아하던 케이크를 만들어서 아들 집에 가지만 아들은 자기들을 내버려 두라고 소리 지르며 문전박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역 화장실에서 그녀는 절망하여 흐느낀다.

그녀가 집에 있을 때, 누군가가 자기의 아들이 정신적 충격으로 매일밤 오줌을 싸서 침대를 적신다며 같은 엄마로서 이야기를 하자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녀는 문을 열지 않는다.

어느 날 위층의 어린아이들이 욕조의 물이 넘치게 물장난을 하는 바람에 한나의 아파트 천정에서 물이 샌다. 수리공을 불러 천정까지 사다리를 놓느라 옷장을 비스듬히 밀고 보니 옷장의 뒷면에 봉투가 붙어있었다. 내용물인 사진들을 확인한 한나는 절망한다. 그리고 쓰레기 비닐봉지에 그 사진들을 넣고 건물 밖에 있는 쓰레기통 깊숙이 처박아 버린다.

남편을 다시 찾은 한나는 언제 다시 오겠냐는 남편의 물음에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면회가 끝나는 순간, 한나가 남편에게 사진 봉투를 찾았다고 말하자 그는 아무 부인도 하지 않고 들어간다.

가정부로 일하는 집주인 여자가 읽어준 신문 기사는 해변에 고래 사체가 밀려왔는데 다시 떠오르지 않도록 먼바다로 이송하려 했지만 어려움이 있어서 지체되었고 냄새가 진동을 하여 주민들이 고통스러워한다는 내용이었다.

한나는 일찍 조퇴를 하고 고래를 보러 간다. 큰 덩치를 가진 고래는 해변에서 썩어서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공무원들이 표면에 소독약을 뿌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한나는 남편을 매일 하염없이 기다리는 개를 다른 곳에 입양 보낸다.

한나는 그동안 연습해오던 연극을 발표하러 갔지만 공연 중 대사가 기억나지 않아 망치고 중간에 뛰쳐나온다.

그녀는 전철을 타고 무너질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다.



한나의 남편은 얼핏 보면 자상한 가장이다. 아내가 불편하지 않게 집에서 고장 난 기구들을 고쳐주고 애완견도 잘 보살펴주는 다정한 사람이다. 부부는 서로 의지한다. 하지만 오랜 이별이 예견되어 있는데도 그는 잠자리에서 아내를 안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떤 범죄로 기소되어 교도소에 들어갔는데 죄목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교도소 안에서도 다른 재소자들에게 매를 맞는 걸 보면 질이 나쁜 범죄가 틀림없다.

한나는 혼란스럽다. 남편을 믿고 싶지만 찝찝한 점들이 많다.

문을 두드리는 이웃집 여인의 말과 아들의 반응을 볼 때 남편은 아동 성범죄에 연루된 것인데 본인은 그 사실을 극구 부인한다.

그러나 장롱 뒤에 숨겨둔 사진 더미를 찾은 한나는 남편의 정체를 확인한다. 이웃집 시몽 엄마의 말도 사실이었고, 아들의 어린 시절도 안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아들은 손자도 걱정되었을 것이다. 마지막 면회를 간 한나는 남편에게 사진을 발견했다는 사실과, 다시 면회를 안 올 것 같다는 최후통첩을 하고 나온다. 바닷가에 가서 썩은 고래 냄새를 맡으며 그동안 실체가 잡히지 않았던 악취의 정체를 구체화한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 힘들고 괴롭다. 전철역 앞에 서있는 그녀는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기차 앞으로 뛰어들 듯 말 듯하던 그녀가 간신히 기차에 오른다.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위태롭다.

그녀가 이토록 괴로운 이유는 남편이 나쁜 사람이어서만은 아니다.

여성으로서 한나는 어린 존재들을 보호하고 키워내는 것을 좋아한다. 그녀가 유독 사랑하는 어린 존재들은 아들, 손자, 일하는 집 자폐아동, 이웃집 아이들이다.

그런데 긴 세월 동안, 잘 살펴보면 남편의 나쁜 행실의 흔적이 많았을 텐데 한나는 그 수상한 낌새를 모른 척했다. 이웃이 문을 두드렸을 때 그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고, 악취가 날 때 어디서 나는지 찾지 않았다. 해변의 썩어가는 죽은 고래처럼 그저 안 보이는 바닷속으로 밀어버리려 했을 뿐이다. 핸드백 속에 어떤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안보였을때 끝까지 찾지 않았다.

안정된 가정에서 남편의 뒤에 숨어서 보아야 할 것을 외면했고 어린 존재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많은 상처를 만들고, 누구나 맡을 수 있는 악취를 풍긴 후에야 할 수 없이 그녀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들은 나쁜 사람은 아버지인데도 엄마까지 거부한다. 손자도 보지 못하게 한다. 아들을 보호하지 못한 엄마는 좋은 엄마가 아니고 손자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남편의 비행을 돕지는 않았지만 모른 척 내버려 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게 된 한나는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다.

그녀가 연습한 연극이 ‘인형의 집’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희곡의 주인공 노라처럼 그녀도 자기 자신으로 당당히 주변에 대응하지 못하고 안정된 남편의 뒤에서 인형처럼 살아온 거짓의 삶이 아들과 이웃의 아이들을 망친 것이다.

이제서야 한나는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의존의 징표인 남편의 반지를 돌려받고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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