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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Oct 07. 2024

영화<피아니스트>-딸을 망치는 엄마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여자

     

‘피아니스트’라는 제목을 보고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를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번에 다루는 영화는 노벨상을 받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를 바탕으로 만든 미카엘 하케네 감독의 작품이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반영되었다는 이 작품은,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식에게 집착하는 어머니와,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하고 비뚤어진 욕망을 보여주는 딸에 대해 묘사하며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리카는 빈의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교수로, 40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고 늙은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녀의 엄마는 나이 든 딸이 조금만 늦게 귀가하여도 여기저기 전화를 하며 그녀를 통제한다. 딸이 3시간이나 늦게 퇴근하자 엄마는 가방을 뒤져서 새로 산 원피스를 찾아서 비싼 가격과 천박한 디자인을 흠잡으며 싸우다가 옷을 찢어버린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딸의 방이 따로 있지만 엄마와 딸은 부부 트윈 베드에서 같이 잔다.


음악 애호가의 집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에리카가 연주자로 참석했을 때 집주인의 조카인 발터 클레머가 그녀의 연주를 보고 매혹되고, 공대생이지만 자신도 피아노를 좋아하던 발터는 그녀의 학생이 되기를 원한다. 그는 현대 음악을 좋아했지만 에리카의 음악 취향인 슈만과 슈베르트로 관심을 돌린다.

일터와 집만을 왕복하는 에리카에게 허용된 유일한 시간은 퇴근 후인데, 엄마가 닦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포르노 테이프를 상영하는 샵에 들러 포르노 영화를 보고 그곳에 쌓여있는 휴지의 냄새를 맡는다. 때로는 자신의 몸에 면도날로 상처를 내기도 한다.

어떤 때는 자동차 영화를 상영하는 공원에 가서 차 안에서 연인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훔쳐보기도 한다.

그러나 선생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엄격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발터가 그녀를 찾아와 레슨 받으며 그날 이후 그녀를 잊은 적이 없다고 고백을 하고 그녀는 냉정한 말로 그를 내쫓지만, 몰래 그를 미행해서 그가 하키를 하는 곳을 알아낸다.


음악회에서 그녀의 제자 안나가 슈베르트의 가곡 반주를 하게 되는데 리허설 때 안나가 긴장하며 제대로 하지 못하자 발터가 다정하게 그녀를 안정시키며 악보의 페이지를 넘겨주니 안나가 편안하게 반주를 한다. 이 장면을 본 에리카는 질투에 휩싸이며 대기실의 옷걸이에서 안나의 코트를 찾아 깨진 유리 조각을 주머니에 넣어 그녀의 손을 다치게 한다.

이것을 보고 에리카의 소행임을 눈치챈 발터가 화장실로 그녀를 따라온다. 그곳에서 둘은 격정적인 키스를 하는데 이후에 에리카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 발터만 옷을 벗게 하고 그가 흥분하는 것을 구경만 한 것이다. 에리카는 발터에게 편지를 주고 혼자 읽어보라고 한다. 모욕감을 느끼지만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 발터는 그녀의 집에 따라와서 그녀의 방에 들어가고, 엄마가 들어오지 못하게 서랍장으로 문을 막고 편지를 소리 내어 읽게 된다. 거기에는 온갖 에리카의 비정상적인 성적인 판타지들이 들어있었고 그녀는 벨트, 끈, 스타킹등 판타지에 쓰이는 기구들도 소파 아래에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역겨워하며 그녀는 미쳤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며 떠난다.

미안해진 에리카는 하키장으로 발터를 찾아가서 사과하며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창고에서 관계를 하지만 도중에 구토를 하고 발터는 남자를 이렇게 모욕할 수는 없다고 분노한다.

다시 한밤중에 찾아온 발터는 엄마를 침실 안에 가두고 편지의 내용대로 에리카를 폭행하고 관계를 갖지만 에리카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다음 날 안나 대신 반주를 하게 된 에리카는 연주회장에 가서 발터를 기다리는데 여자친구와 나타난 발터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에리카에게 가볍게 인사하며 객석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가져온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집으로 돌아간다.     

     



세상에는 자식을 독립하도록 잘 키우는 훌륭한 어머니도 많지만, 반면에 자신도 심리적으로 독립하지 못해서 자식을 옭매며 망치는 어머니도 많다.

영화에서도 이런 어머니를 많이 다루어 왔는데 ‘사이코’, ‘블랙 스완’, ‘런’ 등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어머니가 등장했었다. 이런 유형의 어머니들은 겉으로 볼 때 자식을 위해 온갖 희생을 한다. 또 대부분 남편이 없는 싱글맘으로, 자식이 딸이건 아들이건 그들을 남편의 대신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어머니가 하는 희생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다. 자식이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의지로 자식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가 희생한 만큼 자식이 갚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빚은 다시 자신의 자식에게 갚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부모는 자신의 희생을 들먹이며 자식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이 다른 사람을 만나서 독립하는 것을 막는다.     

이 영화의 엄마도 딸을 자신의 남편 대신으로 여기며 자신을 떠나지 못하도록 막았다. 어릴 때는 피아노 연습을 위해 다른 것은 하지 못하도록 했고, 이후 성인이 되었을 때도 퇴근 후 아무도 만날 수 없도록 통제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은 게 당연한데 그것을 억압하니 딸에게 여러 병리적인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결국 에리카는 이성과의 관계에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행위 자체에만 탐닉하게 되었다. 그것을 적절한 시기에 경험과 교육을 통해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성적인 행위는 매춘이라고 들으면서 자란 그녀는 욕망을 건강하지 못한 형태로 그림자 속에 억압한다. 그것을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며 하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 분리된 행위 자체라고 보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관점으로 보면, 한평생 엄마의 지배를 받아왔던 그녀는 관계에서 마조히즘 성향을 갖고, 현실에서는 학생들을 괴롭히는 사디즘적인 성향을 보인다. 엄마가 마음 안에서 강력한 초자아로 존재하는 한 그녀의 성장은 요원하다.

융의 관점에서는 억압된 그녀의 욕구가 너무 어두운 그림자로 형성되어서 그녀의 자아를 압도한다.

그러나 독립된 성인으로 성장하려는 자아의 힘이 아직은 미약하더라도, 소설의 작가가 자신의 엄마로부터 독립해서 이 소설을 쓴 것처럼 영화의 주인공도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면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예측해 본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주인공은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피아노 선생님이다. 그래서 원작소설의 제목도 ‘피아노 치는 여자’인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장애를 극복하는 방법 중 ‘승화’가 있는데, 어려움을 예술로 극복하는 것이다. 만약 주인공이 피아니스트라면 이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추정해 보건대 이 엄마는 자식이 어릴때 피아노로 영혼을 표현하게 하기보다는 손가락 연습을 더 많이 시켰을 것 같고 결국 딸은 예술가로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훌륭한 기술로 유명한 음악원의 선생이 될 수는 있었지만, 피아니스트가 되어 피아노 연주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부모로서 최고의 양육은 자식이 스스로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인생은 즐거운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고 새로운 타인과 행복한 관계를 형성하게 돕는 것이다.

결국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부모가 건강하지 않은 자식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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