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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Jul 18. 2024

영화<서스페리아>-위로하는 손

불쌍한 영혼에게 안식을

     

서스페리아 원작(1977)은 잘 알려진 호러 영화이다. 선명한 색채와 귀를 때리는 음악과 잊을 수 없는 무서운 이미지로 유명하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 오리지널 호러영화를 2018년에 리메이크하면서 시대적 배경과 심리적인 분석을 입혀 개연성을 주었다. 물론 이 작품에도 초자연적인 공포가 들어있지만,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이유가 있다. 이런 점이 공포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이 영화의 리뷰를 쓰게 만들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77년 독일에서는 68 혁명 이후 과거 나치 시절의 청산이 잘되지 않은 채 역사가 흘러가자, 젊은이들의 불만이 팽배하며 독일 적군파들의 테러가 일어나고 수감된 그들을 석방하라는 시위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수지라는 젊은 미국 여자가 독일의 안무가 블랑을 선망하며 베를린의 무용단에 입단하기 위해 건너온다. 그녀는 아미쉬 종교를 가진 가정에서 자랐다. 엄마는 자유분방하고 욕망에 솔직한 막내딸을 과도하게 억압하고 벌주며 키우다가 일찍 병으로 죽는다.

인상적인 춤으로 오디션을 통과한 수지는 숙식을 제공하는 무용단 기숙사에서 머물게 된다.

이 무용단의 선생들은 유능하고 독립적인 여성들로, 특이한 분위기로 단원들에게 기를 불어넣기도 하고 세뇌시키기도 한다.


수지가 오기 직전, 공연의 주인공 후보였던 페트리샤가 뛰쳐나가 정신과 의사 요제프 클렘페르 박사를 찾아온다. 그녀는 춤도 잘 추고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단원이었는데 불안해하며 선생들은 마녀들이고 마르코스가 그녀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는 둥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뛰쳐나간다. 그 뒤로 그녀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그녀 대신 주인공을 맡기로 한 올가도 블랑의 지도를 받다가 선생들이 단원들을 속였다며 떠나겠다고 하지만 선생들의 눈빛을 받은 그녀가 정신이 없어지며 거울의 방으로 딸려 들어간다. 수지는 자신이 주인공을 하겠다고 자원한다. 블랑이 수지의 손을 잡고 기를 불어넣고 춤을 시작하자 거울의 방 속의 올가의 몸이 수지의 동작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방비로 뒤틀리던 올가의 몸이 꼬이고 부서지고 장기가 튀어나오며 쓰러진다. 죽은 올가를 선생들이 꼬챙이로 찔러서 들고 지하실로 들어간다.

수지는 기숙사에서 자는 동안 과거 엄마가 자신의 손을 다리미로 내리치고 피가 흐르는 손으로 A를 쓰는 악몽을 꾸고 친구 사라가 와서 단원들 모두도 과거 악몽을 꾸었다며 그녀를 위로한다.

블랑은 수지에게 무용단에서 어떤 부분이 되고 싶냐고 묻고 그녀는 ‘손’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요제프 박사는 페트리샤의 일기장에 나온 친구 사라를 찾아온다. 그가 보여준 그녀의 일기장에는 고대부터 존재하는 세마녀-눈물의 마녀, 어둠의 마녀, 한숨의 마녀가 있다고 쓰여 있다. 그는 페트리샤의 증상에 대해 '망상은 진실을 말하는 거짓'이라며 무용단이 가족같이 가깝지만 '사랑과 기만은 동전의 앞뒤'라고 한다. 그러면서 무용단 건물에 은밀하게 숨겨진 방이 있고 거기에 페트리샤가 있을지도 모르니 찾아보라고 한다. 그리고 망상을 심을 수 있다면 그것이 마녀이자 종교라고 한다.

박사는 서베를린에서 정신과 상담소를 운영하지만 전쟁 전에 아내와 살던 동베를린의 집에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집에 가보니 누군가가 있었고 그녀는 바로 나이가 든 아내 앙케였다. 그녀는 유대인으로 도망치다가 잡혀서 수용소에 있다가 해방이 되어 다른 곳에서 새 출발 했다고 하며 남편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 둘은 포옹하며 길을 걷다가 마르코스 무용단 앞에 도착하는데 뒤를 돌아보니 앙케가 사라졌다. 갑자기 선생들이 나타나 그를 학원 안으로 끌어들이며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봐. 그때 아내를 탈출시킬 시간이 충분했는데 안 했잖아.”라고 한다.

     

마녀 선생들은 모여서 지도자를 뽑는 투표를 하고 블랑보다 마르코스가 더 많은 득표를 하며 지도자로 뽑힌다.

사라는 방의 바닥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박사가 이야기한 방의 위치를 짐작하고 아래층 거울의 방으로 가서 지하실로 가는 문을 연다. 그곳에서 그녀는 몸이 썩어가는 페트리샤와 몸이 뒤틀린 존재들을 만나고 공포에 휩싸이며 도망 나오다가 바닥의 구멍에 다리가 빠지며 뼈가 부러진다.     

블랑이 안무한 마지막 공연 ‘Volk’가 시작되고 박사도 보러 온다. 주인공 수지와 단원들이 춤을 추고 사라가 다친 다리를 봉합하고 중간에 합류해서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사라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그녀의 다리뼈가 살을 뚫고 나온다. 공연은 중단된다.


수지가 기숙사로 돌아와 옷을 다 벗고 튜닉만을 걸친 채 지하실로 들어왔을 때 단원들과 선생들이 나체로 춤을 추며 어떤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박사도 끌려와 벗겨진 채 자신은 죄가 없다고 외치고 있고, 말로만 듣던 마르코스가 괴물 같은 몰골로 수지에게 강요받지 않고 그녀의 의지로 제물이 되기 위해 왔다는 것을 확인하며 그녀를 낳은 어머니를 버리고 자신을 어머니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이것을 저지하려던 블랑의 목을 마르코스가 자른다. 이때 죽음의 사도가 나타나자 모두가 두려워하고, 수지는 마르코스에게 세 마녀 중 어떤 마녀의 부름을 받았냐고 묻자 마르코스는 얼버무리며 서스피리오룸(한숨의 마녀)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수지가 “내가 바로 한숨의 마녀다. 내가 유일한 어머니다.”라고 선언하자 죽음의 사도가 마르코스에게 키스하자 그녀는 죽는다. 또한 그녀를 선택하고 투표한 마녀 선생들도 모두 죽는다. 수지가 패트리샤와 사라에게 다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묻자 그녀들은 너무 지쳐서 죽고 싶다고 하고 수지는 그렇게 해준다.

     

지하실에서 의식중 죽은 자들의 시체와 피를 치울 때 보니 블랑은 죽지 않았다.

박사는 건물에서 나와서 집으로 돌아오고 수지가 그를 찾아온다. 그녀는 자기 딸들이 한 짓에 대해 사과하며 그의 아내 앙케가 수용소 근처에서 다른 두 친구들과 함께 얼어 죽었는데 마지막까지 그와 처음 같이 간 음악회에서 둘이 손잡았던 일을 생각하며 죽었다는 진실을 알려준다.

그러면서 인간에게 죄책감과 수치심이 필요하지만 그가 평생 겪었던 것으로 충분하다며 손으로 그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망각의 축복을 내린다.

그들이 살던 동베를린의 작은 집벽에 새긴 하트 속 이니셜 J&A(요제프와 앙케)가 보이며 영화가 끝난다.

     



무용단의 상황이 시대적 상황을 비유한다고 볼 수 있다.

현실에는 사회를 망치고 반성 없이 여전히 기득권을 누리는 기성 세력과, 어떻게든 제도 안에서 좋은 방향으로 바꿔 보려고 노력하는 세력과, 불의를 참지 못하고 저항하는 젊은 세력이 있다.

무용단에도 젊은 단원들의 기를 빨며 기생하는 마르코스와, 무용단을 끌고 가며 단원들의 잠재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블랑과, 이에 반항하는 젊은 단원들이 있다.

    

또 영화에서는 흥미로운 여러 유형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수지의 생물학적인 어머니는 수지에게 생명을 주었지만 그녀를 억압하고 벌주는 존재이다.

마르코스는 자식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에너지와 젊음의 원천으로 삼는 어머니이다.

블랑은 자식을 사랑하고 능력을 향상 시켜주는 어머니이다.

마지막으로 수지 자신은 자식에게 안식을 주는 어머니이다.

모성은 땅처럼 모든 것을 보듬기도 하지만 내치기도 하고 가혹하게 단죄하기도 하는 종합적인 존재이다.

영화 전편에 페미니즘의 분위기가 흐른다. 모성신화 이데올로기에서 요구하는 희생과 헌신의 어머니는 허구라고 말하는 듯하다.   

수지의 어머니가 임종하는 방에 걸려있는 글귀가 눈에 띈다. “어머니의 자리는 누구나 대신할 수 있지만 그녀의 자리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여성은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없다는 의미로 들린다.


무엇보다도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플롯이다. 이 영화의 겉이야기는 수지라는 여자가 마녀들의 집단인 무용단에 왔다가 각성하고 자신이 ‘한숨의 마녀’라는 것을 깨닫는 초자연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속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는 심리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요제프 박사는 홀로코스트 때 아내 앙케를 잃은 사람이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사랑하는 그녀를 잊을 수 없고 그녀를 구할 수 없었다는 데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더 깊은 숨겨진 층위에서는 자신이 살기위해 아내를 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그 시절 독일인들이 자신도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은 죄가 없다고 겉으로는 항변하지만 마음속의 죄책감은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죄책감은 아내가 살아있다는 망상을 만들기도 하고 자신을 원망하는 아내의 망상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 그의 마음을 표현한 공간이 마르코스 무용단 건물이다. 거기에 존재하는 인물들은 다 박사의 내면의 구성 요소들이다. 그들을 통해 마음속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다.

살아남으려는 추악한 욕망을 상징하는 마르코스는, 박사의 그림자이다. 그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젊은 무용단원들의 희생을 강요한다. 그도 아마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아내를 죽게 내버려 두었을지 모른다.

무용단에서 희생된 페트리샤와 올가와 사라는 홀로코스트에서 죽은 아내와 두 친구를 의미한다. 페트리샤의 일기장은 사실 아내의 일기장이었다. 페트리샤는 아내이자 아니마를 의미하고 그녀는 사회에 관심이 많은 용감한 여성이었다. 그의 방치로 그녀는 지하실에서 병들어간다.

마담 블랑은 무용단을 어떻게든 끌고 가려고 노력하는 자아이다. 그녀는 단원들을 격려하고 발전시키고 힘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역부족이어서 주도권을 그림자에게 뺏긴다.

수지는 내부의 모든 것을 통합하고 각성시키고 안식을 주는 자기 같은 존재이다.

이들이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틸다 스윈튼이라는 한 배우가 블랑과, 마르코스와, 박사를 모두 연기한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그가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해 만든  망상다. 영화의 마지막에 치르던 의식은 일종의 씻김굿이다.

일생을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며 살았던 박사에게 한숨의 마녀는 마지막에 망각이라는 안식을 준다. 인생의 마지막, 그는 탄식하는 어머니의 용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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