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나눔
남편은 정말 부지런한 사람이다. 불평하지 않고 주어진 일을 묵묵히 감당하며 재수하는 첫째를 위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라이딩을 하고, 휴직하고 있는 나에게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 아예 그만두고 쉬라고 말하기도 한다. 내가 미안한 마음에 여보도 좀 쉬고 싶지 않냐고 물어보면 이 직업이 적성에 잘 맞아서 일하는 게 힘들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 남편에게 큰일이 연달아 터졌다.
남편을 어릴 때부터 키워주신 외할머니가 치매로 정신이 온전하지 않으신데, 더불어 담낭에 문제가 생겼다. 100세가 가까운 나이로 병원에서 앞으로 치료가 어렵다는 암울한 이야기를 했다.
더불어 시어머님이 갑자기 정신착란증세를 보이시며 망상, 환청 증세를 보이시기 시작했다. 돈 문제에 대한 걱정과 맞물려 아버님을 의심하고 감정조절을 못하시고 소리를 지르며 우시는데 발음이 불분명하시다.
여러 가지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데 시아버님은 제대로 일처리를 못하시고 남편이 나서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남편은 주말마다 1시간 반 거리의 시댁을 방문하여 어머님의 상태를 살피고 병원일정과 약에 대해 의사에게 말할 것을 아버님과 상의한다.
그리고 둘째가 아프기 시작했다. 남편은 좋아질 것이라고 계속 말하며 처음에는 잠시 힘들어했지만 곧 둘째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자퇴도 찬성하였다. 둘째를 위해서 직장에서 조금 일찍 퇴근할 수 있는 날에는 방탈출, 맛집탐방, 산책 등 둘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자 계획했다.
그런데 둘째의 상황은 점점 안 좋아졌다. 2주 전 둘째의 자해에 대해서 알게 되고 저번주 자해가 더 심해진 것을 알게 되고는 그 충격이 매우 컸다.
자해사건으로 학교와 고려대병원에서 오랜 시간 대기하고 상담하고 울고 먹지는 않고, 둘째는 탈진하다시피 했다. 학교에서는 강력하게 입원을 해야한다 해서 학교상담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열군데 가까운 병원에 전화를 했으나 어디에도 입원가능한 곳은 없었다. 어찌어찌하여 고려대병원에 그동안의 상담결과지와 검사기록을 가지고 외래를 보았는데 둘째와 오랜 대화 후 교수님은 입원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셨다. 둘째도 입원을 원하지 않아서 다니던 병원에서 계속 상담치료 및 약물치료를 받는 것으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 일찍 퇴근하고 둘째와 영화를 보려고 했던 남편에게 오늘은 영화를 못 볼듯하니 여보는 밖에서 좀 쉬다 오라고 했다. 집에 오면 당신 마음이 힘들 듯하니 밖에서 마음을 좀 달래고 오라고 하였다.
남편이 집에 왔을 때 둘째는 자고 있었다. 남편은 잠시 아이방에 들어가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나왔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꺼어억 윽윽윽 아아악
남편이 우는 걸 보는 건 두 번째지만, 소리 내서 우는 건 처음 본다.
나보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 남편이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는 울어댔다.
어깨를 토닥토닥, 머리를 쓰담쓰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함께 한 수많은 힘든 상황들이 생각났다. 유산, 교통사고, 군대, 직장이직, 자녀양육, 고부갈등, 나의 우울증, 돈문제 기타등등. 어떤 상황에서도 늘 긍정의 말을 하며 상황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감정적으로 대응한 적은 두 번 있었다. 그것도 나한테 혼나고 바로 접었다.
이런 그가 울고 있다. 성실과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절망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미안했다.
당신이, 참 좋은 사람인 당신이, 나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어릴 때부터 맑고 밝았던 당신을 닮은, 맑고 밝은 딸을 낳았을 텐데.
어릴 때부터 슬픈 나랑 결혼해서 슬픈 딸을 낳았고 그래서 맑고 밝은 당신이 울게 된 건 아닌지.
난 그냥 혼자 살걸. 결혼하지 말걸. 아이도 낳지 말걸.
나의 슬픔이 둘째도 슬프게 하고 당신도 슬프게 했나.
그래도 울 수가 없었다.
지금은 당신을 위로해야 할 때. 둘째를 잘 잡아줘야 할 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당신의 어깨를 토닥토닥, 머리를 쓰담쓰담
속으로 말한다.
울지 말아요. 우리 이 아픔을 함께 견디며 나가요.
좋아질 거예요. 괜찮아질 거예요. 둘째는 이겨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