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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살아요 2

사람

by 해이나

<덕분에 살아요 1 -신앙> 에 이어서 쓰는 글입니다. ^0^




ISTJ. 나도 한국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인다는 이 MPTI의 소유자다.

말실수를 하고 나면 자책을 많이 하기에, 사람들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말 많이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극소수의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큰소리로 웃고 농담하고 떠들어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앞에서는 형식적 미소장착, 짧은 답변, 재빨리 도망가기에 능하다.


하지만 여러 시련 앞에 죽고 싶은 내면에 힘을 준 두 번째는 사람이다. 웬수도 많지만, 죽일 X도 있지만 결국 나를 살도록 손 내밀어준 사람들. 감사합니다.


수도 없이 많은 분께 은혜를 받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받은 큰 위로 몇 가지를 새겨본다.




18년 전 계류유산을 했다.


산부인과 정기검진을 갔는데 초음파를 보던 레지던트 선생님이 갑자기 말을 안 하더니 손놀림이 빨라졌다.

"잠깐만 교수님 좀 모시고 올게요."

레지던트 선생님이 달려 나가셨다.


몇 분 뒤 교수님이 오셔서 초음파를 보셨다.

"아기가 심장이 안 뛰는데? 아기가 죽었네. 아이가 너무 커서 이거 수술해야 해요. 당장 남편에게 연락하시고 입원하세요."


아이가 이미 사망하였기에 수술을 빨리하지 않으면 배속에서 부패가 시작되고 그러면 산모의 건강에 해롭다고 하셨다.


나는 하나였지만 둘이었다. 내 안에 뛰는 심장은 두개였으며, 그 두 번째 심장과 날마다 대화를 나누었다. 주말부부라 멀리 있었던 남편은 통화하기도 어려웠지만, 내 안의 심장은 언제 어디에서도 나와 함께 있었고 말을 걸 수 있었다. 일방적인 혼잣말이어도 상관없었다. 두번째 심장이 듣고 있음을 확신했기에 나는 말을 하고 또 했다. 그런데 심장이 다시 하나가 되었다. 나를 버리고 힘차게 뛰던 박동을 멈추었다.

지독한 외로움이 몰려왔다.


왜 나를 떠났을까. 내가 엄마로서 너무 미더웠나. 임신했으면서도 신난다고 운동화도 아니고 힐 신고 뛰어다녀서 힘들었나. 피곤하다고 커피를 마신 게 잘못되었나. 배가 점점 부르면 직장 다니기 힘들어질까 봐 미리 걱정해서 그런가. 어릴 때 잘못한 거 벌 받는 건가.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병원 식사가 나왔지만 먹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나를 떠났는데 뭘 잘했다고 밥을 먹나. 내일 이 아이를 내 몸에서 강제로 떼어낸다고 한다. 싫었다. 이 아이를 보낼 수가 없었다. 그냥 배속에 계속 두고 있다가 아이와 함께 죽고 싶었다.


남편은 너무 바빴다. 손 한 번 잡아주고 다시 일하러 갔다. 이해한다.


교회분들이 와서 위로해 주셨다.

"아기 집이 한번 생긴 거니까, 두 번째 아이가 금방 생길 거예요."


엄마 아빠도 위로해 주신다.

"니 건강이 우선이지. 잘 쉬고 잘 먹자."


시어머니는 오셔서 울면서 눈을 흘기시더니 한 대 때리신다.

"첫째 애가 잘못되면 둘째 애도 잘못된다던데."

자기 딸한테도 저리 말하실 건지. 그러나 어쩌겠는가. 아이를 지키지 못한 못난 엄마 인걸.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다음날이 되었다. 수술실에서 아이는 강제로 나와 분리되었다.


다시 식사시간이 되었다. 미역국이다.

눈물이 나오는데 밥을 말아서 꾸역꾸역 먹었다. 이제 아기는 나를 완전히 떠났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래 살자.' 눈물 섞인 미역국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멍하니 혼자 있는데 갑자기 병실 문이 열렸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처음 보는 남자 레지던트 선생님이셨다.

병실 문을 반쯤 열고 문 밖에서 말씀하신다.

"산모님. 아이가 너무 약해서 그런 거예요. 산모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세요. 아마 태어났어도 몸이 약해서 얼마 못 살았을지 몰라요. 아이는 평안했을 거예요. 기운 내세요."


누군지도 모르는 분의 위로.

모든 분의 위로가 깊이 남았는데, 알지 못하던 이 분의 위로도 깊이 남았다.

그래. 아기가 몸이 약해서 힘들어서 먼저 갔구나. 편한 곳에서 행복하게 있겠구나. 나중에, 아주 나-중에 열심히 살고 만나러 가야겠다.


이후로 길거리에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면 눈물이 났다. 아이를 먼저 보내신 분을 만나면 꼭 끌어안고 위로를 하였다. 우리 하늘나라 가면 다 큰 아이가 우리 보고 신나게 뛰어올 거예요.




3년 전 학교에서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어디에서 하소연할 수 없는 교사직업특유의 억울함을 당하며 처음으로 휴직을 결심했다. 우울증 약을 처방받았고 사람이 너무 싫고 아무와도 대화할 수가 없었다. 혼자라면 하루종일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폐인처럼 살뻔했지만, 나에게는 지켜야 할 딸들과 가정이 있었다. 딸들에게는 나의 어려움과 우울을 절대로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침에 딸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무작정 길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서울 관광 책을 여러 권 읽고, 안 가본 서울의 여러 곳을 버스와 지하철로, 걸음으로 홀로 매일같이 걷고 또 걸었다.


5개월이 지날 무렵, 원인을 알 수 없는 신경통이 시작되었다. 얼굴에서 시작된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나가서, 목, 허리, 팔, 가슴, 무릎, 오른쪽 배 등 온갖 군데가 다 아팠다. MRI, CT, X-ray, 초음파 등 할 수 있는 검사를 다 하고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치과, 유방내과, 내과 등 각종 병원을 두 세 군대씩 다녀도 원인을 찾을 수 없어 진통제만 날마다 한 움큼씩 세 번을 먹어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겪어야 할 통증이 예상이 되어 두려움에 손을 덜덜 떨게 되었다.


이렇게 반년이 지날 무렵, 과거 내가 괴롭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새로우면서 더 큰 고통을 마주하자 별 것 아닌 듯 보인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다시 마주한다면 과거처럼 힘들어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며 감사하게도 조금씩 통증이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통증이 조금씩 약해지자, 덮어두었던 대인기피증이 다시 들고일어나며 이러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라도 만나서 말을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은 위기의식이 들었다. 마침 후배가 '그림책테라피' 수업을 같이 해보자고 권유해 주었다. 고마운 후배 덕분에 그림책을 주제로 한 모임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일주일에 하루, 두 시간 동안 내 생각을 떠들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마음이 점점 더 안정되어 갔다. 사람을 피해 도망가고자 휴직을 했지만 결국은 사람과 함께하는 모임이 마음을 정리하고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지금도 지속하는 정말 고마운 사람들과의 모임.

감사합니다.




둘째 아이의 우울을 겪으며 남편과 친한 대학 선배 누나가 큰 위로를 주셨다.


선배 누나는 카이스트를 나온 개발자와 결혼하셔서 대치동의 유명한 아파트에서 살고 계셨다.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 딸(K라고 할께요)이 어릴 때부터 워낙 똑 부러지고 고집도 세고 똑똑해서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종종 말하곤 했었다.


몇년전 K가 고등학교 1학년을 자퇴하고 하루 종일 집에서 게임만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울증과 대인기피로 1년을 게임만 하고, 후에 쿠팡 알바와 감자탕집 알바를 한다고 한다.


내 딸이 우울증 걸리기 전에는 그저 옆동네 불구경하듯 들었다. 저렇게 똑똑하고 성실한 부모를 두었는데도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는구나. 평생 엘리트 코스만 밟은 부모님인데 마음이 힘드시겠다.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K가 재수생 나이가 되어 갑자기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숙학원에 들어가 6개월을 공부하고는 인서울 대학 화학공학과를 들어가는 엄청난 이변을 일으켰다. 선배 누나는 너무 행복해서 친한 후배들을 불러 모아 자축하며 밥을 사주셨다. 이게 끝은 아니었다. 최근에 K는 한 학기 다닌 화학공학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 다시 수능을 본다면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 딸이 잘살고 있을 때는 다른 집 아이의 방황이 소설 속 이야기인 듯 싶었다. 내 딸은 절대 겪지 않을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 딸이 우울증에 걸리고 학교를 그만두자, 그분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깊이 공감되고 자신의 길을 찾은 그 아이가 너무나도 대단해 보였다.

이 이야기를 공유해주신 선배누나가 너무 고맙고, 우리 둘째도 K처럼 건강하게 회복되고 앞으로 나아가면 정말 좋을 텐데 싶다. K의 이야기가 마음에 힘이 되었다.


남편은 선배 누나에게 연락을 하고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조언을 얻었다. 선배 누나는 여러 정보를 주시고 조언도 해주시며 물어보셨다.

"힘들어?"

"네. 많이 고통스러워요."

"네가 손가락 하나 다친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니 와이프는 손목이 잘린 고통을 느끼고 있을 거야. 잘 위로해 줘."


조언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하셨고, 필요하면 우리 딸과 K가 만나서 상담도 할 수 있게 자리도 마련해주신다고 하셨다. 만난 적은 없지만 말씀만으로도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다.





고마운 분들 덕분에 오늘도 살아간다.


오늘은 친언니와 통화하며 둘째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학교를 그만둔 이야기, 계속되는 약 증량, 3주째 계속되는 자해, 병원입원까지는 아니라는 의사 선생님의 소견.


"힘들어서 어떡하니. 너도 힘들고 제부도 정말 힘들겠다. 네가 위로해 줘. 엄마 아빠한테는 말 안 할게. 그냥 나만 알고 있을 테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전화해. 혹시 병원 입원하면 꼭 연락 줘. 기도할게."


둘째는 교회 언니들과 저녁밥을 먹으러 나갔다 왔다. 병원외에는 집밖으로 외출을 안 한 지 4일 만이다. 아빠 카드를 쥐어서 보냈는데, 띠링 띠링. 식당에서, 인생 네 컷에서 결재가 되었다.


즐거운 얼굴로 들어오는 둘째를 보니 교회 언니들이 너무 고맙다.

"재미있었어?"

"네. 메뉴를 5개나 시켰는데, 사장님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샐러드는 공짜로 주시고 음료도 서비스로 주셨어요."


이틀째 샤워를 안 하던 둘째가 외출하고 오니 더워서 드디어 샤워를 했다.

자존감이 바닥인 둘째에게 말을 걸었다.

"둘째야. 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거 알고 있지?"

"네"

"오늘 이모가 너 괜찮냐고 물어보셨어. 이모가 너 많이 생각하는 거 알지? 엄마도 아빠도 언니도 네가 너무 소중하고, 교회 언니들도 너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 학교 그만두니까 아쉽다고 친구들도 연락하잖아. 그치? 하나님이 너를 창조하실 때 정말 귀하게 보배롭게 창조하셨어.

우리가 너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너도 너를 소중하게 여기면 좋겠어. 마음 힘들면 언제든지 엄마한테 꼭 이야기해 줘."

"알았어요."


얼마나 마음이 통했는지,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전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도움의 손을 내밀어주시는 모든 분들이 너무 감사하고 덕분에 둘째는 회복으로의 작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나는 지금도 대문자 I이다. 여전히 혼자 걷는 걸 좋아하고, 말을 하기보다는 듣는 게 편하다.

더불어 지금도 길을 가다 아이 소리가 들리면 고개가 절로 돌아가고, 아이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으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처음 고통이 다가올 때는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이 고통을 겪었기에 같은 고통을 겪으신 분들을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고, 또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으신 분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음을 안다.


사람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를 낫게 하는 것도 사람이라는 것도 배웠다.

브런치에 이런 짧은 소견의 글을 쓸 수 있어서, 읽어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덕분에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음에도 감사하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오늘도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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