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letter 3
온아, 오늘 네 아침 출근길은 좀 무겁지.
요며칠 깊은 잠에 들지 못하던 내 옆에서 너도 함께 잠을 설치는 바람에... 이번주는 심심한 사과로 편지를 시작해야할 것 같아. 나는 요즘 안개 속에 있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던 그 날, 공항 전광판에서 우연히 본 그 구절에 오랫동안 머물러있어.
이 낯선 도시에서 왜 자꾸만 오래된 기억들이 떠오르는 걸까?
거리를 걸을 때 내 어깨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는 거의 모든 말, 스쳐지나가는 표지판들에 적힌 거의 모든 단어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움직이는 단단한 섬처럼 행인들 사이를 통과해 나아갈 때, 때로 나의 육체가 어떤 감옥처럼 느껴진다. 네가 겪어온 삶의 모든 기억들이, 그 기억들과 분리해낼 수 없는 내 모국어와 함께 고립되고 봉인된 것처럼 느껴진다.
고립이 완고해질수록 뜻밖의 기억들이 생생해진다. 압도하듯 무거워진다. 지난여름 내가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내부 한가운데였다는 생각이 들 만큼.
한강, <흰>
나도 분명 그 곳에서 나를 만났어. 내가 찾아다니던 나. 늦은 밤의 파리, 판테옹 건물에서 내가 나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어.
<미드나잇 인 파리>,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난 미술 선생님은 어느날 우리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셨어. 수업 시간에 힘든 공부만 하지 말고 이런 아름다운 것들도 좀 봐,하시면서. 우리 학교는 미술실 앞에 작게 마련된 전시관이 있었는데 그 곳엔 작가로도 활동하셨던 선생님이 그리신 작품이 자주 걸려있었어. 100호 정도 되어보이는 큰 캔버스에 가득 메워진 파랑. 영화 속 파리의 여름밤과 닮아 있던 깊은 파랑. 크기가 다른 캔버스 서너개가 붙어있는 벽을 나는 매일 열심히 들여다 보았어.
무채색 인생을 살던 열여덟 살 인생에 낭만이 물드는 순간. 그 이후 나는 지독한 짝사랑을 했고, 새파랗게 깔린 여름밤하늘 아래 은은한 노란 불빛이 빛나는 풍경을 동경하게 되었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어. 영화 속 주인공 처럼, 그리운 향수가 살아숨쉬는 완벽한 과거의 세계로.
그래서 너와 파리의 밤거리를 함께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더 설렜는지도 몰라. 네가 일찍 퇴근을 하는 날에 저녁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하고 나는 꽃집을 먼저 들러서,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이 섞인 장미를 사서 품에 안고 돌아왔어.
그리고 사실 그 꽃집에서 너 몰래 작은 선물을 샀지. 고심해서 꽃을 고르고 계산대에 섰는데 계산대 위 트레이에 놓여진 예쁜 투명 반지함들이 눈에 띄어 살짝 열어보니, 안에 귀여운 장미꽃 한 송이가 있는거야. 시들지 않는다는 프리저브드 플라워. 너가 평소 좋아하던, 그리고 내가 그 시절 반해버렸던 파랑을 닮은 꽃. 이걸 받고 좋아할 네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홀린듯이 구매해버렸어.
그렇게 원피스 주머니에 몰래 선물을 넣어둔 채,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파리의 밤을 맞이하러 가본다. 2024년 8월, 100년만에 올림픽을 맞이한 파리에서 우리는 오래도록 추억할만한 사진을 많이 남길 수 있었어. 누군가 꽃까지 들고있는 나를 보고선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더니 우리의 모습을 예쁘게 담아줬어. 설레고, 부끄럽고, 행복한 우리의 모습을.
우리는 센강의 바토무슈를 타기 위해 노을 지는 시간에 맞춰 거리로 나왔는데, 몰려나온 사람들에 치이며 곳곳이 통제된 거리 사이로 선착장을 찾아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 잘못 찾아온 길마저 아름답게 느껴져 웃고 떠들었던 두 시간이 지나고, 해가 완전히 진 후 마지막 탑승 시간까지 놓쳤을 때 결국 나는 참았던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어.
나는 파란 하늘이 검게 물들기 전 센강의 유람선 위에서 너에게 작은 꽃을 주고 싶었다고 솔직하게 말도 못한채 괜히 툴툴댔고 처음엔 웃으며 달래주던 너도 '나도 너무 속상해' 하곤 입이 오리처럼 점점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바람에, 결국 우리는 다시 에펠탑 근처의 펍으로 들어가 한숨 돌리며 대화를 시작했어.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그랬어."
"나도 너를 꼭 태워주고 싶었단 말이야.“
"... 근데 여기 감자튀김이 진짜 맛있네.“
"오히려 좋다."
시시콜콜한 이야기 사이에 진심을 끼워넣어서, 입에 넣어주는 감자튀김에 사랑을 담아서, 서로 눈을 마주치고 머쓱하게 한 번 웃었지. 그리고선 낮에 봐두었던 예쁜 장소를 너를 데려갔어. 건물 사이로 에펠탑이 보이는 유명한 스팟이기도 했는데, 이 곳에서 나는 내가 그리던 그 풍경을 두 눈으로 직접 담을 수 있었어. 너무 신이 나서 몸을 이리저리 흔들고 행복한 표정으로 렌즈를 바라봤어.
아, 함께이지 않았다면 낭비였을 오늘.
사랑스러운 밤.
생각해보니 나는 그 날 낮에 우연히 판테옹에 갔었어. 아침에 나올 때만 해도 양많고 맛있기로 유명하다는 크레페 집에서 브런치를 먹고 근처 산책로나 도서관이나 가보자는 계획이었는데 크레페를 먹으며 앉을 곳을 찾다보니 도착한 곳이 판테옹이었어.
스무살 겨울, 영화에 나온 그 장소를 찾아가겠다고 언니와 친구들을 끌고 이 앞에 왔었는데 여름의 판테옹은 훨씬 아름답구나. 그땐 추워서 주변만 슬쩍 둘러보고 갔던 것이 아쉬워 계단에 걸터앉아 비둘기를 손으로 훠이훠이 쫓아내며 여유롭게 아침을 먹었어.
영화 속 주인공 길은 매일밤 자정에 이 계단에서 과거로 떠나는 차를 기다렸단 말이지. 한동안은 나도 정말이지 그러고 싶었어. 세상의 빠른 흐름을 쫓아가는 것이 항상 버거웠던 나는 80년대가 어울리지 않을까, 나는 그시절의 노래까지 사랑하는데. 찬란했던 예술가들이 사는 과거로 떠나는 그 기분은 너무 짜릿하지 않았을까...
그리고선 판테옹 근처에서 폴란드 출신 포토그래퍼를 만나 낮동안 오랜 이야기를 나눴어. 내가 교사로서 살아가는 안정적이고 뒤틀린 삶과, 그가 스트릿포토그래퍼로 사는 자유롭고 위태로운 삶에 대해. 태어난 지역의 오랜 동네에 사는 삶과, 이민자로서 다른 나라에 뿌리내리려 애쓰는 삶에 대해.
어쩌다보니 그런 질문까지 이어졌어.
"너는 과거, 현재, 미래 중에 어디에 사는 사람이야?
너는 어디에 있어?"
나는 지난 내 일기 속에 있지. 그건 과거야. 3년치의 빡빡한 계획을 세워놓고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나는 먼 미래에 있기도 하고. 근데 그게 행복하진 않다. 지금 나는 행복해. 내가 이 순간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며칠 뒤 네 일터에 초대되어 너가 일하는 모습을 멀찍이 바라보면서 나는 왠지모르게 울 것만 같았는데, 그때 문득 아오이를 떠올렸어.
내 안에, 이만한 의지가 있었다니, 놀랍다. 아무런 주저도 없었다. 그 때 이미 마음이 정해져 있었다. 알베르토의 공방에서, 아침 햇살 속에서, 나는 그저 인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피렌체에 간다는 것을. 두오모에 오른다는 것을. 쥰세이와 나눈 약속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발차 벨이 울리고, 문이 닫혔다. 기분이 몹시 고양되어 있었지만, 동시에 아주 담담했다. 나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이해하고 있었다. 전에 없이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감정이, 해방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그 사람의 인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있는 장소에, 인생이 있다.
쓰지 히토나리, <냉정과 열정 사이-Rosso>
온아, 너는 지금 어디에 있니? 혹시 지나버린 실수와 상처에, 네 앞길에 대한 걱정에 빠져 너를 잃어가고 있진 않은지.
누가 나에게 그 질문을 다시 묻는다면, 나는 지금에 있다고 대답하겠어. 내가 찾아다니던 나는 영광스러운 과거의 황금 시대도, 내게 주어질지도 확실치 않은 아득한 먼 미래에도 없다고. 너의 옆에, 두 발을 딛고 서있는 바로 이 곳에, 내 인생이 있어.
도망이라는게 항상 나쁘지만은 않아. 도망칠 수 있는 용기가 있어 나는 나를 되찾았으니까. 하지만 과거의 내 깊은 상처는 나의 모국어와 함께 봉인된 채 작은 섬이 되어 아직 내 마음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어. 언젠가 꺼내 놓아야겠지. 틈 사이로 빠져나오는 뿌연 안개가 나를 모두 덮어버리기 전에. 나는 내 힘으로 그걸 깨부수고 그 안의 나와 화해해야 할거야.
그치만, 네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이미 충분한 위안이야. 단지 그거 하나 만으로도... 일단 잠을 좀 푹 자고 싶은데 그건 내가 몸을 충분히 움직이지 않아서 그런걸까?
흠.... 오늘은 오래 천천히 달려볼거야. 지난번엔 고작 200m를 뛰는데도 숨이 차는거 있지. 사람들은 뛰면 기분이 좋아진다던데. 근데 그거 사실... 거짓말 아니야? ......
네 잔소리가 미리 들려온다.... 오늘도 좋은 하루!
마음만은 파리, 2025.
오늘을 사는,
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