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letter 1
온아, 아침 바람이 차다.
양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오늘은 너의 첫 출근날. 뱃속이 간질간질한 기분좋은 긴장감과 두근거림. 아직 낯선 이 땅에서 출근하는 네 뒷모습을 바라보는 건 참 많은 생각이 들게 해.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차를 한 잔 내려 테이블에 앉았는데, 뜨거운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는 아득하게 사라지며 나를 스물한살 여름으로 데려간다.
그 날은 너와 오래간만에 만나기로한 날이었어. 열두살, 같은 반 친구로 처음 만난 우리가 서로 특별해질 수 있었던 건 길지 않은 내 인생에 계속 나타났다 사라지던 너 덕분이었지. 열다섯, 이사를 간 동네의 학교 육상부에서. 열여덟, 내 페이스북 메신저에서. 스물하나,우리 학교 기타 동아리의 소공연장에서. 너는 마치 혜성처럼, 3년의 주기로 항상 내 앞에 불쑥 찾아왔잖아. 우리 사이의 반복된 우연은 나도 모르는새 조금씩 내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나봐.
아직 풋내나는 어른인 채로 만나게 된 우리는 너무 서툴었어. 나는 왜인지 평소와 다른 화장을 시도했다가 눈두덩이에 다래끼가 난 여자아이처럼 보였고, 너는 일본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한껏 멋부리고 나온 차림새라는게 디지몬 어드벤처에 나오는 태일이 같았잖아. 오래간만에 본 서로에 대한 소회가 이 모양이었는데,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게 된걸까?
그 후로 처음 함께 간 카페에 앉아 4시간을 떠들고, 국수 한 그릇씩을 먹고, 자전거를 함께 타고, 네가 뒷바퀴에 칭칭 감아온 포장 떡볶이를 나눠먹고, 프리즈비를 주고 받다가 나는 이 순간들이 좀 더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우리는 스물한살답게 서로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는데, 돌아보면 테두리만 있는 불확실한 말들이었을지도 몰라. 아직 잘 모르는 게 너무 많았으니까. 근데도 우리는 서로에게 '나도 잘 모르겠지만 너를 너무 응원한다'고 했어. 그렇게 꽉 찬 확신의 말은 더이상 없을 정도로. 그 때는 잘 모른다는 그 대책없는 말이 우리에게는 끝도없는 가능성처럼 느껴졌어. 빛나는 네 눈을 보면 정말로 내가 엄청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니까. 네가 바라봤던 내 눈도 너에게 그랬길 바라.
의심많은 내가 네게 마음을 활짝 열게 된 건 바로 네 '초록색 마티즈' 덕분이야. 알지? 하필 장마날을 골라 운전면허 도로주행시험을 보는 나의 뒤로 몰래 바짝 쫓아오던 작은 차가 일차선에 있는 차들을 모두 막아주었을 때, 내가 차선을 바꾸며 사이드 미러로 너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내 마음의 둑은 와르르 무너졌어. 나는 그 날의 빗소리, 뒤섞여 들리던 시끄러운 클락션 소리, 내 사이드미러에 맺힌 물방울, 방울마다 담겨있는 마티즈 수십개. 그 귀여운 초록색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순간의 장면을 평생 잊을 수 없을거야.
그래. 그 후 우리는 많은 처음을 함께했어. 그리곤 3년의 혜성 주기가 3번 지나 9년 후, 우리는 서른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지. 결혼식도 전에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찍어버리곤 함께 이 낯선 땅 스위스로... 우리의 첫 시작부터 첫 출근까지. 참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네. 그치?
'처음' 이라는 단어는 첫 눈이 소복히 쌓인 넓은 평원을 떠올리게 해. 새하얀 눈밭에 처음 찍는 발자국은 설렘과 두려움을 주지. 내가 처음이라는 기쁨과 함께 막상 그 앞에 서면 예쁘게 발자국을 찍고 싶어서 주저하게 되는 마음도 있잖아. 하지만 앞으로 내딛을 많은 걸음에 나는 그런 걱정 따위 하지 않을래. 폭신하고 차가운 눈밭에 맘껏 뒹굴며 일단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어. 너와 함께라면!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안도현, <첫 눈 오는 날 만나자>
그래서 말인데, 나도 올해 첫 눈이 오기 전에 러닝을 자주 해볼까 해. 주저없는 걸음을 내딛는 연습을 해봐야지! 이번주는 맑은 공기 마시며 함께 뛰자. 좋은 하루!
로잔, 2025.
너의 첫사랑,
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