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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로그림 노운 Jun 09. 2022

비서는 적성에 안 맞아

아이들의 수행비서, 엄마



나의 엄마는 굉장히 계획적인 사람이다. 그날의 날씨가 어떤지를 미리 살피고, 아이가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미리 상상하여 대비하고 준비물을 챙기고 만약의 상황도 놓치지 않고 살피고 챙기고 준비한다. 소풍을 가게 되면 도시락은 무엇을 쌀지, 선생님 찬합은 어떤 것을 쓸지, 무슨 반찬을 넣을지, 어떻게 해야 아이가 기죽지 않고 당당히 지낼 수 있을지, 미리 계획하고 실행한다. 아이가 미래에 어떤 길을 가게 될지 예측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안내하고 언제나 큰 그림을 그려놓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수에 밝고, 계산을 잘하신다. 금전적인 계산뿐 아니라, 시간 계산에도 계획적이었다. 엄마는, 회사원이셨던 아빠의 외벌이로는 셋을 감당키 어려웠을 텐데도 하나하나 밭을 일궈내셨다. 자녀 교육도 놓치지 않았고, 부동산 자산도 조금씩 증식시켜 나갔다. 30년 전 이미 분양권, 신축 아파트를 잡아야 한다고 몸소 체득을 하셨던 분이다. 시골에 있으면서 큰 도시로 아이 하나 맡기고 아이 하나 손잡고 아이 하나 업은 채 그렇게 가족이 살아갈 집을 보고 발품을 팔고 사람들을 만나며, 하나하나 조금씩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다.


엄마의 기질 자체가 사람을 좋아하고, 계획적이고, 영민하며, 기억력이 좋은 데다가, 특히 공감능력이 뛰어나서, 집을 관리 감독하고 아이들의 감정을 돌봐주며 수행 비서 역할을 하는 데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셨던 것 같다. 나는 엄마가 이야기하는 대로만 하면 정말 손해 보는 일은 없었다. 엄마의 혜안만 믿고 따르며 나는 편안하게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엄마를 보고 자라면서, 나 역시 그런 엄마가 쉬이 될 수 있을 줄로만 알았고,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집안에서 엄마들의 역할을 보면 수행비서의 그것과도 닮았다.   

1. 가정의 물품들을 관리 감독한다. 화장지가 떨어지면 채워 넣고, 밴드가 없으면 사다 놓고, 모기 기피제가 없으면 마련해 놓는다. 냉장고도 관리에 요주의 대상이다.  양파가 떨어지면 사다 놓고 꼭 쟁여 두는 물품들이 소진하면 다시 채워 넣어야 한다. 꼭 쟁여 두는 냉동실의 물품으로는 냉동 블루베리, 냉동 새우, 해물 다시팩, 국거리용 소고기, 오리고기, 목살, 생선, 등이 있다. 또한 냉장실에는 요구르트와 소화가 잘되는 우유, 아이들의 우유는 기본으로 깔려 있고, 가끔 집에 드나드는 손님용 음료수와 제철 과일이 들어있어야 한다. 예전에는 몰아서 4만 원 이상 이마트 쓱 배송했는데, 목록을 정리하는 것도 생각해 내야 하는 것도 귀찮아져서 요즘에는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바로 쿠팡으로 배송시키는 편이다. 그만큼 배송 기사는 우리 집에 한 두 개를 위해 와야 하는 일이 빈번해졌고 나는 조금 미안해졌지만, 쿠팡 월회비가 오르면서 그 미안함도 사라졌다. 나의 안일과 편리함을 위해 내 시간과 노력을 조금 아끼는 대신, 돈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2. 식사를 계획하고 준비한다. 아이들의 아침은 뭘 먹일지, 돌아와서 저녁에는 뭘 해줄지, 미리 계획하고 준비해야 한다. 이런 과정이 즐거운 사람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이게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나의 엄마는 그저 뚝딱, 뭔가를 만들어내시던데, 난 언제나 막막했다. 주부 짬밥이 좀 쌓이고 나서는 주말 식단도 거의 지정되다시피 해서 크게 스트레스받지는 않게 되었지만, 한때는 정말 스트레스가 최고조이던 시절도 있었다. 당장 때려치우고 사직서를 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요리라는 것이, 생각보다 미리 해야 할 것이 많은 행위라, 맛있는 밥을 위해서는 미리 밥을 불려 놓는 과정을 거친다던지, 미리 양념을 만들어 재어놓아야 한다든지, 냉동실에 있는 재료를 미리 꺼내어 해동을 시켜 놓는다든지 수시간 전부터 미리 뭔가 머릿속 어딘가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 시간 이내로 뚝딱, 한상이 차려질 수 있다. 뭐 먹을지 밥시간 한 시간 전에 생각하면 이미 늦었을 때가 허다했고, '미리' 생각하고 정해야 하는 그 상황이 내겐 버거웠다.


3. 식사뿐이랴, 주말이면 뭐하고 놀지, 어디에 갈지, 각종 가족 행사에는 식당을 어디로 정할지 무엇을 할지 몇 시로 잡을지 날짜는 언제가 좋을지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수행하고 공지하고 결정해야 한다. 가족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가장 좋은 날짜와 시간대를 잡고, 3대의 선호도를 고려하여 장소를 정하고, 누구 하나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하며, 이 모든 것이 결정되는 대로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어야 한다. 휴가 계획을 세우고, 함께 가는 가족들의 성향을 고려하여 가장 최선의 동선을 짜고 식당을 정하고 숙소를 정하고 교통편을 결정해야 한다.




4. 아이들의 스케줄 관리는 필수다. 미처 아이가 준비하지 못한 준비물을 챙겨야 하고 사다 줘야 하고 아이들 가방을 챙기고 빠진 게 없는지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방학 때는 스케줄을 어떻게 할지 무엇을 더 하고 무엇을 뺄지 아이와 상의하여 계획하고 결정하고 어긋남이 없도록 학원 선생님과 조율하고 차량 시간을 확인하고 꼬이는 요일은 없는지 체크하면서, 너무 빡빡하지는 않을지 아이가 너무 스트레스받거나 하지는 않을지 너무 아이 혼자 있는 시간이 긴 건 아닌지, 생각하고 고려해야 할 것이 많다.


끝없이 머리를 굴린다. 끝이 없다. 끝이 없는 게 문제다. 탁, 끊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나는 엄마라는 비서직이 적성에 영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다른 비서에게 인수인계해주고 회장직을 하고 싶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이 관리 감독직을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다. 그렇다면 그 사직서는 어디에 내야 할까? 지금의 내 나이 때 나의 엄마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엄마라는 비서직이 고단하고 힘이 들어 그만둬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을까. <아빠는 슈퍼히어로>라고 글을 썼지만, 알고 보니 엄마가 슈퍼우먼이었다는 결론.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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