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바다가 공존하는 곳
휴리안 해수욕장. 사람들이 수운시를 떠올릴 때면 늘 휴리안을 꼽는다. 대한민국 서쪽에 빛나고 윤택한 휴리안을 끼고 있는 아름답고도 활기찬 도시, 수운 시. 해안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 그리고 해 질 무렵 오묘한 황금빛으로 물드는 휴리안은 누구든 머물고 싶게 하는 힘이 있었다.
바람이 잔잔하게 흐른다. 낡은 건물들 사이로 느슨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조용하지만 활기찬 이곳. 서울에서 차로 2 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하여 도망칠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하루쯤 아무 생각 없이 바닷바람을 맞고 싶을 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잠시 머물고 싶을 때, 이 도시는 조용히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설아 역시 이곳으로 도망쳐왔다.
화실 한가운데, 설아는 창문을 열어둔 채 바람을 맞는다. 햇살이 길게 드리운 나무 바닥. 창밖으로는 반짝이는 투명한 바다가 보인다.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바람에 흩날렸다. 살짝 웨이브가 있는 긴 머리를 천천히 쓸어 넘겼다. 눈빛은 차분하지만, 짙은 그림자가 자리한 눈.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그림이지만,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동안 설아의 디자인은 늘 누군가의 손에 넘어갔다. 아이디어를 빼앗기고, 이름이 지워지고, 노력을 인정받지 못한 나날들. 창작자로서의 자부심이 짓밟히고, 마지막으로 사직서를 내던진 날, 설아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바다를 찾아왔다. 그 바다가 바로 휴리안이었다.
설아에겐, 그녀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바다가 보이는 곳. 조용하지만 온전히 그녀 자신일 수 있는 곳. 낡은 골목 사이를 걷다, 설아는 문득 한 건물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흰 벽과 나무 창틀이 어우러진, 조금은 오래된 공간. 문득, 화실 창문 너머로 빛이 스며드는 광경을 보았다. 어디선가 본 그림 같은 장면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터 호수의 섬>. 잔잔한 호수 위로 부드럽게 퍼지는 햇살을 표현한 그림. 하늘과 물의 경계가 희미하게 흐려지는 몽환적인 풍경. 지금 이곳이 딱 그렇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마치 그림 속의 호수처럼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이곳이 내 화실이 될 수 있을까?'
잠시 망설이던 손이 문고리를 잡았다. 조용히 열리는 문, 그리고 마주한, 텅 빈 공간. 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화실의 유리창 너머로 햇살이 쏟아진다. 바다의 윤슬이 반짝이며 설아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손끝으로 벽을 가볍게 쓸어보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저 멀리 들려오는 파도 소리. 그 순간 설아는 마음속에서 어떤 문이 열리는 걸 느꼈다.
'그래, 이곳에서 다시 시작하자.'
그녀는 화실 한가운데에 조용히 서 있다. 햇살이, 그리고 바람이, 그녀의 새로운 시작을 감싸고 있었다. 서울에서 빼앗긴 모든 에너지를, 이곳에서 충전하리라.
**이곳에 나오는 장소와 인물, 사건은 모두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거나 허구적 장치로 사용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