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극복하는 법
누구나 그렇듯이 인생의 굴곡사에는 바닥을 치는 구간이 있다. 나의 경우에는 두 번의 위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한 번은 고교시절이었고, 또 한 번은 레지던트 수련기간이었다.
뛰어난 영재는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영재들이 간다는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내 생애 최초로 대단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첫 번째 시기, 내 고교 시절. 중등 시절까지는, 하버드도 쉽게 갈 수 있는 데인 줄 알았고, 서울대도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그런 곳인 줄로만 여겼더랬다. 내게 어려움이라고는 없었다. 세상사 그저 쉬이, 그리고 비교적 잘, 수행해냈던 것 같다. 약간 부족한 듯한 인상으로 오히려 반 아이들의 인기를 얻어 3년 내내 반장을 하고, 과외 한번 없이 학습지 하나 하지 않고도 그저 물 흐르듯 공부했지만 성적도 나름 괜찮았고 경시대회 입상도 했다. 그 당시에는 그게 가능했다.
아무런 준비도 선행도 없이 들어간 고등학교에서, 너무나 대단한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물 안 개구리였다. 내 세계가 다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처음으로 벽에 부딪히고 좌절감을 맛봤던 것 같다. 하지만 특유의 긍정주의로 나름 또 재밌게 지냈다. 공부도 열심히는 했다. 하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겉으로 아주 밝아 보였는데 자살을 하는 친구도 있었고, 술과 담배로 엇나가는 친구도 있었다. 그토록 잘 해왔고 모범적이던 아이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에 눈을 뜨고 비관하기도 했다.
전공의(레지던트) 시절은, 수년 지나니 사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최근에 그 당시 끼적여 놓은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공의 1-2년 차 시절, 매사 에너지가 없었고, 비쩍 마른 체격에, 글에는 시니컬함이 묻어 있었다. 고교 시절에는 아무리 나보다 뛰어난 친구들이 많았어도 그래도 '왜 이렇게 못하냐, 언제 사람 될래' 소리는 안 듣고 살았는데, 이곳에서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험담으로 들려오는 나에 대한 평가는, 심지어 사람이 아니었던 것. 수련의(인턴) 시절에는 평생 들어보지 못한 ㅆ들어간 쌍욕도 들었다.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지나고 보니 사실 뭘 그렇게 잘못해서 욕 들은 것도 아니었다.) 내가 고년차가 되었을 때, 아래년차나 수련의가 부족함이 많아 보여도 언제 사람 되겠냐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처음이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저 정도면 잘하는 거지, 수련을 통해 조금씩 나아질 것이고, 나는 그 길을 앞서 닦아주면 된다고 세뇌했다. 생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의사니까, 실수도 없어야 하고 빼먹는 일 없어야 하고, 어떻게든 혼나가며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었어야 하는 것일까. 격려해주고 토닥여주고 칭찬해주는 분위기에서 수련받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니 힘들 때마다 뭔가를 끼적였던 것 같다. 계속해서 뭔가를 쓰고 나면 마음이 정화되고 별일이 아닌 어떤 것으로 변했다. 스트레스 관리법이라고 할 것은 없지만, 고교 시절 힘이 들면 엄마를 불러 '귀가'를 했고 (기숙학교였음), 나만의 공간, '우리 집 내방'에서 잠을 잤다. 끝없이 자고 일어나면 뭔가가 해소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주말에 18시간까지 내리 자본 적도 있었다. 전공의 시절에도 꼭 잠은 나름 충분히 잤다. 뛰어난 전공의라면 미리미리 준비도 하고 잠도 줄여가며 초독 준비하고 그랬겠지만, 난 일단 살기 위해 잤다. 자고 나서 혼나는 한이 있어도 시간만 나면 잤다. 1년 차 때 만난 남편과의 첫 만남에도 차에서 입 벌리고 자더라, 너무 신기했다는 소릴 들을 정도였으니. 그리고 오프 때는 서점에 갔다. 책을 잘 보지 않더라도 책이 많은 공간을 좋아한다. 책이 많은 공간은 심리적 안정감을 안겨 준다. 중고교 시절에는 도서관에 자주 갔다. 책은 안 보고 DVD 만 보고 와도 도서관에서 혼자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전공의 시절 일하다 힘들면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나만의 공간 '내 차'에서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 놓고 쉬었다. 나만의 공간에서, 아무도 나를 찾지 않게 한 다음, 음악을 틀거나 휴식을 취하고 나면 기분전환이 되어 또 한 번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고교 시절에도 소중한 내 CDP와 함께 아무도 없는 빈 교실을 찾아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같은 웅장한 음악을 틀어 들었다.
1. 나만의 공간에 간다. (내 방이나, 책이 많은 서점이나 도서관, 주차된 내 차) 2. 잔다. 3. 뭔가를 쓴다. 4. 음악을 듣는다. 그렇게 나는, 두 번의 (내 나름의) 위기를 이겨냈다. 그렇게 나는 고교시절 자퇴하지 않고 버텨냈고, 그렇게 나는 도망가지 않고 전공의 시절을 버텨내었다.
누구에게나 위기 상황은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나만의 관리법이라고 할 건 없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까 하여 써 보았다. 요약을 하면 <휴식을 취하고 좋아하는 것을 한다> 정도 되겠지. 위기 상황을 겪으시는 분들의 슬기로운 극복을 희망하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