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을 넘어
나 자신을 찾기 위한 여정의 첫 번째는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첫 번째로 생각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을 수집하기>. 좋아하는 것을 잘 수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분야에 있어 누군가를 떠올린다면 의당 떠오르는 특정인들. 그들은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널리 알리고 자신의 부수적인 캐릭터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자신을 브랜딩 한다.
의과 대학 안에서도 다방면에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친구는 항상 있어 보이는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사물을 찍고 인물을 찍고 찍은 사진을 공유하고 하는 과정에서 우리 과에서 가장 사진 잘 찍는 학생으로 자리 잡았다. 아마 이런 사람은 학번마다, 학과마다 존재할 것이다. 오디오를 사랑하는 한 학생은 고급 취미를 파고들며 전문가가 되었고 누구인지를 설명할 때 아, 우리 과 오디오 마니아?라는 식으로 특정 지어졌다. 컴퓨터를 좋아하고 잘 다루면서 점점 전문적이 되어 가던 한 학생은 본과 시절 내내 전산 담당 운영위원을 맡아 무료 봉사를 자청하며 카페지기를 수행했다. 프로그래밍까지 독학해 가면서 각종 족보의 전산화에 힘써 주어 학과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더랬다. 와인에 심취했던 동아리 선배는, 각종 와인의 종류를 꿰고 신의 물방울을 시연하며 사람들을 본인이 구축한 취미의 세계에 발을 들이도록 유도했다.
학생 시절을 지나고 중년이 된 시점에도 그들은 좋아하는 것들을 수집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오디오를 사랑하던 학생은 자전거를 사랑하기 시작하였고, 자전거를 매일 타면서 자전거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주변에 전파시킨다. 뛰기에 진심인 사람들이 생겼고, 마라톤 대회 출전 소식을 알리며 매일 얼마나 뛰는지 공유하며 안부를 전해온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것을 즐기며 사람들 챙기는 데에 재능이 있던 내 친구는 본인 특유의 오지랖 특기를 잘 살려 열 개 이상의 병원 체인을 낸 CEO로 자리 잡았다. 말하기를 좋아하고 논리를 앞세워 언변이 뛰어나던 한 동기는 의사 면허를 따고 나서 로스쿨에 재입학 후 현재는 변호사로 활약하며 의학 관련 변호를 맡고 있다. 글쓰기를 좋아하던 한 선배는 이미 출간 작가로 활동 중이며, 개원한 한 친구도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알려져 출간을 앞두고 있다. 내향적인 것 같았지만 영상에서 종횡무진 내과 지식들을 설파하길 좋아하던 선배는 이미 30만 의학 유투버로 자리 잡고 성공하였다. 좋아하는 것을 넘어 잘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하여 그것이 수익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어디 즈음에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며, 좋아하다 좋아하다 잘하게 된 것은 무엇일까. 좋아하는 것을 찾고 수집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올해부터 그림을 그리고, 브런치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나를 찾아가는 한 과정이랄까. 이미 잘하는 재주 찾기보다 일단 좋아하는 것을 수집하는 편이 자아를 찾아나가는 데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1. 책이 많은 공간을 좋아한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가 도서관에 가라고 해서 갔는지, 내가 가고 싶어서 갔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주말이면 혼자서도 털래털래 도서관에 갔다. 혼자서 20분 넘는 거리도 스스로 다닐 수 있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은 나진 않지만, 제법 먼 거리의 도서관을 혼자서 각종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갔더랬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는 DVD, 소설, 각종 잡지들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혼자서 놀다 왔다. 어른이 되어서도 책이 많은 공간이 좋고, 책이 많은 곳에서 안도를 하며, 위안을 얻곤 하였다. 어릴 때 혼자서 도서관에서 놀던 기억이 즐거웠기 때문일까? 내심 좋았던 기억이, 마음속 깊숙이 잠재해 있었던 걸까? 힘든 순간에도 큰 서점이나 도서관을 찾곤 하였다. 책을 읽지 않아도 그저 책이 많은 공간이면 위안이 되었다.
언젠가 <첫 서재>와 같은 곳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나묭 작가님의 춘천에 있는 북 스테이인데, 이런 아날로그 감성이 참 좋다. 매일 글쓰기 백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소중한 내 친구가 꽃과 함께 보내온 책 덕분에 알게 된 곳이다. 꼭 들러보고 싶은데 여기선 멀기도 하고 곧 문을 닫는다 하니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https://brunch.co.kr/@namgizaa/131
이전에 소개했던 아르카 북스도 좋았고, 몽도도 좋았다. 책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곳이라면 어딘들 좋지 않겠냐마는, 이런 책이 모여 있고 말과 핸드폰이 필요 없을 것만 같은 공간을 좋아한다.
https://brunch.co.kr/@neurogrim/90
더불어 최근에 알게 된 제주 종달리의 필기. 여기도 가 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이다. 타자기를 타닥타닥, 써보면 어떨까, 타자기를 한번 마련해볼까, 생각해보지만 타자기 설명만 20분이라니, 아마도 쉬이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싶다. 제주에 가게 되면 들러 체험해보기로 한다.
https://m.place.naver.com/place/1673399498/home
좋아하는 것을 넘어, 이 아날로그 감성 책의 공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언젠가는 이런 비슷한 공간의 집을 지어보는 것이 소박한(?) 내 꿈이다. 조금씩 수집하고 조금씩 구체화시켜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집대성인 공간을 만들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 자꾸 말하고 세뇌하고 수집하다 보면 실제로 그럴 날이 오지 않을까?
2.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림이나 공작 등을 좋아한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의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지냈던 경험들이 녹아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이 몰입하며 즐겁게 뭔가를 하는 것에 웬만하면 초치지 않고 내버려 두는 편이다. 원체 어린 시절을 잘 기억 못 하는 나이지만 곰곰이 떠올려 보면 항상 뭔가를 만들어 누군가에게 선물하곤 했던 것 같다.(지금 오빠네 조카가 그렇다!) 메모지도 직접 스테이플러로 찍어서 종이를 모아 수첩으로 만들었고, 하나하나 각장마다 귀여운 그림을 그려 넣거나 요즘의 젠탱글 같은 것들을 그려 꾸몄다. 요즘 세대로 태어났다면 다꾸(다이어리 꾸미기)에 진심이었겠지.
좋아하는 것을 넘어, 내가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매일 크로키를 5개월째 하는 중이다. 우선 그림 실력을 끌어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끼적대며 낙서하길 좋아하는 딸과 함께 이모티콘 만들기에 도전해보려 한다. 진입 장벽이 낮은 분야부터 시도해 보고 나중에는 굿즈 제작까지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과정이 정말 재미날 것 같다. 세네 가지 이모티콘 아이템을 구상해 보았고, 딸아이는 슥슥 이미 24개 이상의 이모티콘 스케치가 끝났다. 이모에게 슬쩍 승인될 거 같냐고 물었더니 단박에 아니오. 하셨지만, 자꾸 수정하고 퇴고의 과정을 거치다 보면 팔 수 있는 날도 오겠지. 아이의 이모티콘이 시장에 나온다면 얼마나 뿌듯할까? 지레 김칫국부터 마셔본다. 엄마, 아빠, 삼촌, 이모,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고모 일단 9명 확보다. 22500원을 벌었다. 우리 딸 티니핑 세 개 살 수 있겠네.
3. 혼자 있길 좋아한다. 가족이 다섯이었고, 지금 가족도 넷이라 언제나 복작거리며 살아왔다.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시간이 좋다. 그저 혼자 내버려 두면 혼자 잘 놀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을 넘어 내가 해볼 수 있는 것은? 글쎄, 이것이야말로 이사를 가서 방이 많아지는 것 말고는 대안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공간 대여를 시도해보는 건 어떨지.
하나둘, 계속하여 좋아하는 것들을 쌓아보려 한다. 모이고 모이면, 나만의 브랜드, 나만의 가치, 나만의 개성이 되어, 나를 빛나게 해 줄 것이다. 그렇게 나를 쌓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