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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로그림 노운 May 02. 2022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를 합니다

성격과 유사한 악기의 성향




나는 예과 때 비올라를 선택했다. 이유인즉슨, 아무것도 배워 놓은 악기가 없었기 때문. 플루트를 3개월 잠깐 배웠지만 오랜 기간 해온 사람들과 경쟁이 될 리 만무했고, 경쟁력이 없었다. 또한 사소한 실수에도 너무 도드라지는 파트라 자신이 없었다. 아무도 배워보지 않았고 처음부터 같이 시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더니 정답은 바로 비올라. 바이올린, 첼로는 어린 시절 잠깐씩이라도 배운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었지만 비올라는 한 명도 없었다. 물론 같은 이유로 바이올린이나 첼로에서 전향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 역시 비올라 자체는 처음인지라 가온 음자리표를 익히는 것부터가 다 새롭다. 이렇듯 모두가 처음 접하는 악기라, 파트 자체가 너무 뒤처지는 경향이 있고 어떻게 보면 오케스트라의 구멍인 파트라 자존심 상할 때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짜이면서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서 제법 비중 있는 역할의 연주를 맡을 확률은 높아지니 메리트가 있다. 웬만큼 잘해서 비올라 내에서 수석을 맡았다 해도 세컨드 바이올린 세네 번째 줄 실력 정도 될까 말까 한 실력이긴 했지만.


끈기는 있는 편인지라, 힘든 레슨 선생님 밑에서도 혼자 살아남았다. 아무도 견뎌내지 못했다. 그저 적당히 흘려듣고 성실히 조금씩 나아갔다. 비올라와 나는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드러나길 좋아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필요 없는 존재이고 싶지도 않았다. 혼자 튀는 것도 싫었다. 비올라는 바이올린과 첼로 사이에서의 교량 역할을 하면서 어떤 땐 바이올린에 붙었다가 어떤 땐 첼로에 붙었다가 적절히 연결도 시켜주고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좀 더 풍성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있을 때는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가 드러나지 않지만, 막상 파트가 비면 소리가 빈약한 느낌이 들고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 들 수 있다. 나는 묵묵히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몫을 해냈고, 오케스트라의 화음이나 진행에 피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버텼다. 못하는 구간이 나와도 적절히 활을 맞춰 움직일 줄은 알았고, 표시 나지 않게 숨어들어 내 자리를 지켰다. 또 드물지만 비올라가 튀어나와 주어야 하는 구간에는 따로 레슨을 해가며 연습에 임했다. 그 결과 절절히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올라 수석까지 맡았고, 박치에 음치인 나임에도 불구하고 자리의 무게를 절감하며 조금씩 성장했다.


사람이 악기의 성격을 닮아가는 것일까, 그런 성향의 사람들이 그 악기를 선택하는 것일까. 잘은 모르지만 사람들의 성격과 하는 악기와는 많은 부분 닮은 구석이 있다. 바이올린이나 플루트는 높은 음자리표 위에서 나풀나풀 존재감을 드러내고 과시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 연주하는 사람들도 그런 성향이 많다고 느낀다. 자기애가 강하고, 본인이 주인공이어야 하고, 예쁘고 멋지고 도드라져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기분 좋은. 첼로는 좀 중후한 멋이 있으면서 많이 튀어나오지는 않지만 후광을 비추며 은근히 드러나는 편이다. 오보에는 자기만의 음색을 가지고 있고 음정의 중심이 되는 악기로, 사람도 그들만의 개성이 있는 것 같고, 클라리넷은 약간 관악기 쪽의 비올라 같은 느낌이 든다.




아이가 방과 후 활동으로 바이올린을 하는데, 갑자기 당장 몇 주 뒤에 있을 학교 음악 경연대회를 나가겠다고 했다. 도저히 지금 실력으로는 엄두를 못 내는 상황이라 나라도 봐주자 싶어 답답한 마음에 비올라를 십여 년 만에 꺼내 들었다. 이미 줄도 풀리고 관리가 안돼 노후된 상태여서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어라? 제법 울림이 났다. 아이는 처음 듣는 비올라 소리에 시끄럽다고 했지만, 나는 조금 연습하면 되겠는데? 하며 동상이몽을 꿈꿨다. 스포츠나 악기는, 한참 뒤에 다시 해도 몸이 기억을 하는 것 같다.


완벽하게 도드라지지도 않고, 주변에 스윽 흡수되어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교량 역할로서의 매우 중요한 입지를 가지고 있는 비올라. 힘들면 첼로에 붙었다가 때로는 바이올린에 숨었다가, 중요한 순간 잠시 드러나서 적절히 교량 역할을 해주고 소리를 구석구석 채워준다. 이런 악기인지 모른 채 시작했지만, 알고 보니 그런 악기였고, 그런 악기여서 좋았다. 딱 내가 해야 하는 악기였다. 한때 지역 오케스트라에서도 잠시 활동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머나먼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나의 악기, 비올라. 첫째가 바이올린에 흥미를 좀 더 가지면 둘째는 첼로 시키고 나중에 삼중주해보면 어떨까? 높은 음자리표, 가온 음자리표, 낮은 음자리표가 모두 만나 한자리에 모여 연주해볼 날이 올 수 있을까? 나의 음악적 무능을 닮은 아이들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지만, 혹시 아나, 꾸준히 하다 보면 그럴 날이 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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