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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로그림 노운 May 03. 2022

글씨체에 관하여

생김새가 다 다르듯, 자기만의 필체가 있다



나는 글씨체를 잘 기억한다. 굉장히 일상 기억력이 나쁜 편에 속하지만 (특히 연예인 소식. 누가 누구랑 이혼했다더라 하면 아니 얘들 언제 결혼했었대? 할 정도로 홀랑 잘 까먹는다.) 글씨체를 보게 될 일이 있다면 웬만해서는 잘 잊지 않는다. 글씨체로 사람을 기억할 정도다.


사람들은 본인만의 필체가 분명 있다. 그래서 필체를 바꾸는 강의를 보면 반신반의한다. 저 글씨체로는 배운 대로 쓰더라도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쓴다면 본인의 필체가 다시 드러나지 않을까? 하고 의심해본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필체는 쉬이 변하지 않고 수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만의 필체가 남아 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리 뜯어고쳐도 어릴 때 얼굴이 조금은 남아 있듯이 말이다. 굉장한 돈을 들여야 하거나, 굉장한 노력을 들여야 변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교시절 롤링페이퍼를 받은 적이 있다. 내게는 익명인 게 무용한 롤링페이퍼. 누가 뭐라고 썼는지 글씨체를 봤던 친구라면 다 알아챌 수 있었다. 아, 이 친구는 나를 목소리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였구나, 이 친구는 내게 고맙다고 써놨네, 그들은 모를 거라 생각하고 썼겠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썼는지. 아는 체하지는 않았다. 혹여나 무서워할까 봐.


나는 이게 능력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찾아보니 필적 감정이라는 게 있었네? 필적을 과학적으로 감정해서 법적인 자료로 이용하는 게 있고, 필체를 분석해주는 사람이 유퀴즈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 역시 이것을 이용해서 뭔가를 해볼 수도 있는 걸까? 모든 게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경험상 쌓인 데이터는 내게도 있긴 있다. 글씨가 큼직큼직하고 알아보기 쉬운 경우 성격도 시원시원한 경우가 많았고, 반듯반듯하고 정자를 쓰는 사람의 경우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있다.  악필에 가까운 날림체를 쓰는 사람 중에, 2명 정도는 IQ가 150이 넘는 사람이 있었다. 글씨 쓰는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생긴 현상이 아닐까,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대충 쓰는 글씨는 성격도 털털한 편이다. 요령껏 살아가는 사람의 필압은 살살 팔이 아프지 않도록 글씨도 요령껏 쓴다. 공부 잘하고 족보 만들어주는 친구들 중에 네모 반듯한 글씨에, 글씨만큼 얼굴도 예쁜 친구들이 있었다. 도덕적이고 책을 좋아하는 내 친구는 글씨도 단정하고 결단 있게 생겼다. 때로는 성격이 드러나기도 하고, 때로는 성향이 보이기도 한다. 관상이나 외모도 그러하겠지만,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법칙은 없다. 다만, 어떤 '경향성'은 있는 것 같다.


글씨를 잘 쓰면 여러모로 좋다. 일단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듯, 글씨가 예쁘면 논술을 해봐도 첨삭을 해주기가 좋고, 좋은 인상을 가지고 보게 된다. 나는 글씨를 잘 쓰지는 못하지만, 글씨를 잘 써보려고 노력해본 적은 있다. 결국은 날림체로 돌아왔지만. 나이가 들었으니 좀 더 중후하고 멋진 글씨를 쓰고 싶은데 요즘엔 글씨를 써볼 일이 별로 없다. 입원 환자 리스트에 검사 결과나 깨작깨작 써보는 수준이 하루 글씨 쓰기의 전부이니. 중후한 글씨체를 연습해볼 기회조차 별로 없다. 타자 속도만 빨라지고 있다. 의식해서 연습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냥 20년 전 날림체를 그대로 평생 쓰게 될 것이다.


지금도 고등학교 친구나 공부할 때 만난 사람을 떠올릴 때면 얼굴, 분위기,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글씨가 같이 떠오른다. 아마도 사람마다 사람을 기억하고 떠올리는 주 이미지가 다를 것 같은데 나의 경우는 적어도 그러하다. 요즘에도 이렇게 쓸까? 하는 글씨의 이미지가 같이 떠오른다. 한 번도 이 소재로 이야기해본 일은 없는데 사람과 동시에 글씨를 같이 기억하는 사람은 못 본 것 같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내 친구의 글씨를 기억하고, 지금 글씨를 우연히 보게 되었을 때, 이야 글씨 여전하네! 를 말해줄 수 있다. 우리 뇌의 편향된 기억 체계는 참으로 신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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