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때,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다 불현듯 내 삶의 종점은 내가 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진짜 죽음을 원했다기보다는, 원하지 않는 세상에 갑자기 떠밀리듯 내팽개쳐진(꼭 어렸을 때는 이런 단어들을 사용했다. 강제로 목덜미를 잡힌 채 던져졌다/버려졌다/나동그라졌다와 같은 피동사들) 상태에 대한 반작용이자, 생명체라면 응당 지닌 관성적 생의 의지에 대한 반항이었다. ‘나를 이 거지 같은 세상에 버려? 두고 봐.’와 동의어로 사용하던, 잔뜩 성나고 철없던 선언은 언젠가부터 응집되어 싹을 틔우듯 삶의 원형으로 작동했다.
그런 날이 왔다. 진득한 우울의 시기를 지나 보내고 뒤늦은 깨달음이 몰려오던 날. 예전과 지금의 사이에 거스를 수 없는 시간적 거리감이 확실하게 나를 보호하던 날. 아직 내가 살아서 스크류 드라이버(보드카와 오렌지 주스로 만드는 칵테일) 4잔을 마시면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읽고 있던 날. 술에 취해 이성 조절 능력이 상실된 채로 어머니가 전 재산을 털어 만든 무너질 것이 뻔한 제방에 바다가 범람하는 걸 보며, 마치 지금 눈앞에서 나의 제방이 무너지는 것처럼 심장을 부여잡다. 딸 쉬잔을 매춘시키는 어머니와 아들 조제프를 보면서, 짐승처럼 눈앞의 이득에 추하게 침을 흘리는 그들이 웃는 모습을 보면서 때아니게 올해까지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작년 내내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설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았지만 모두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을 죽이는 건 총도, 칼도 아니고 좆같이 더운 여름이고, 조력(潮力)이고, 태평양이었으며 동시에 그들의 무지이자 회피였고, 지독한 가난이었고, 피해의식에 기반한 비대한 자존심이자, 허황된 희망과 명예 그리고 서로였다.
죽음을 생각할 때 한 뭉치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떨어짐’이다. 추락하거나 하강하는 이미지는 자유 죽음의 행위자를 비행하도록 만들었다. 충돌 직전까지 추락은 낙하가 아닌 비행이었다. 그래서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세상을 뒤집으면 될 것 같았다. 바다가 하늘이 되고, 하늘이 바다가 되도록 세계를 뒤집어서 물에 온 세계가 다 잠겨 쓸려간대도, 행위자는 바다였던 하늘로 날아갈 수 있으라고 믿었다.
그런데 왜 바다였을까.
원형의 이미지에는 항상 물이, 바다가 있었다. 광주가 고향인 까닭에 바다와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항상 행위자는 물로 떨어졌다. 낙하의 아름다움을 찾을 때 폭포를 찾게 되어서일까? 나는 그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싶었을까? ‘물/바다’의 메타포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다. 물은 모든 생명을 잉태하는 출생의 이미지이자 쉽게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죽음의 이미지이기에, 출생과 죽음은 한 사태의 양극단을 칭한다. 그래서인지 죽음을 생각할 때, 나는 언제나 물에 뛰어드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사람들의 관심과 박수, 환호성 속에 다이빙 대에서 반동을 이용해 하강을 위한 도약을 하며, 아름다운 곡선형 자세로 고요하게 수영장으로 잠수하는 다이빙 선수의 프로패셔널한 이미지와, 영화 〈영주〉에서 부모님을 잃고 동생 영인과 살아가야 하는 장녀 영주가 한강을 바라보던 이미지가 겹친다. 영주는 수영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언젠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듯한 나레이션이었지만, 마치 이미 미래를 겪고 돌아온 이의 단언처럼 들리기도 했다.
한강을 헤엄치는 행위자를 상상하던 영주와 정반대의 이미지로 나는 물을 내려다보는 이의 손에 들린 술병을 생각한다. 맨정신으로 물에 뛰어들 순 없다. (나는 수영을 못하고 겁이 많다) 술에 잔뜩 취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행위자는 나의 얼굴을 한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동시에 인생의 마지막에 마실 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고민한다. 죽음과 동시에 술을, 그 술의 주종과 라벨을 고른다.
보통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가지런히 놓인 신발과 빈 초록색 소주병이다. 아, 광주이니까 잎새주여야 할까? 만약 새로를 마신다면 초록색 빈 병은 아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소주를 마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맥주인 것이 나을까? 캔맥주보다는 갈색 맥주병이 놓이는 것이 그럴듯하다. 라거보다 에일을 좋아한다. 빅웨이브 골든 에일을 마셔볼까? 하지만 빅웨이브는 투신 공포를 이길 수 있을 만큼 취하지 않는다. 게다가 파란 파도와 행복한 서퍼의 모습을 그려진 라벨이 유서와 벗어놓은 신발 옆에 놓이는 것이 영 이상하고 어색하다.
한국 병맥주는 밍밍한 맛 때문에 생맥주가 없을 때만 마신다. 투명한 카스, 초록색 테라, 갈색 켈리. 요즘은 이 중에 켈리가 낫다. 하지만 잘 고민해야 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모금의 술. 나를 추락하게 만들어 줄, 그렇기에 병을 입에 대고 ‘꼴꼴꼴’ 소리를 내며 한숨에 삼켜내고는 ‘캬’ 소리 낼 수 없는 그런 술.
아무래도 인생의 마지막 술이 소주나 맥주인 것은 좀 아쉽다. 더 그럴듯한 술을 마지막으로 마시고 싶다. 진? 럼? 브랜디? 테킬라? 위스키, 위스키를 병째로 마시는 건 어떨까? 사각 병의 검은 라벨의 잭 다니엘을? 아무래도 죽기 전에 잭 다니엘 ‘허니’나 ‘애플’은 멋이 없다.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짐 빔? 저렴한 제임슨? 아니다. 아무래도 좋아하는 싱글몰트, 그중에서도 아일라 위스키를 마셔야겠다. 아드벡을 마시는 게 좋겠다. 삶의 마지막이니 10만 원부터 시작하는 그 아드벡을 ‘꼴꼴꼴’ 마실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드벡 위 비스티? 텐? 우거다일? 혹시, 마지막이라면 지갑을 털어 코리브레칸을 마실 수 있지 않을까? 지옥에 가더라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아드벡 코리브레칸을 병째로 마시고 왔소, 라고 말하는 편이 나아 보인다. 하지만 아드벡 코리브레칸을, 단지 죽기 위한 이유로 사놓고 바라만 보기엔 아깝지 않은가? 생각은 다시 순환한다. 죽는 날 손에 들 술병의 이름을 상상하다, 나는 금세 죽음과 멀어지고 입 안에서 팡팡 터지는 코리브레칸의 향을 상상하며 침을 삼킨다. 그렇게 저수지 옆에 술병을 든 채 뛰어들기 위해 물을 내려다보는 ‘나’는 ‘그’가 된다.
나의 얼굴이 지워진 ‘그’는 누구인가. ‘그’의 손에는 무슨 술병이 들려 있을까? 나는 이제 ‘그’를 상상한다. 무엇이 그를 술을 들고 저수지를 내려다보도록 만들었을까? 그는 왜 울고 있을까? 그에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술병을 들고 있는 그’로부터 세계를 만들어 간다. 술병이 먼저 있고, 그 옆에 ‘그’가, 그리고 술병을 든 ‘울고 있는’ 그가, 그리고 그가 겪어왔을 삶이, 그리고 그를 그곳에 오게끔 한 세계가 있다. 그러면 ‘그’는 등장인물이 되고, ‘그’의 세계는 소설이 된다.
이제는 익숙한 꿈이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쫓아오면 나는 아파트로 도망간다. 그러나 항상 엘리베이터에는 우리 집 층수가 없다. 그렇게 몇 번 엘리베이터에 갇혀 추락하다 보니, 이제는 자연스럽게 비상계단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계단의 층 또한 무작위이긴 마찬가지다. 2층, 3층, 5층, 8층, 9층, 4층까지 달린다. 제발 나의 무의식이 우리 집을 만들어 주기를 바라면서. 그러다 우리 집이 생겨나는 어느 날에는, 항상 현관문이 작아서 잠기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열린 현관을 버려두고 뒤 베란다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난간에 발을 딛고는 뛰어내린다. 꿈속에서 나는 꽤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아파트 담 너머로 사뿐히 착지한다. 이렇게 안전한 착지를 경험하기까지 몇 번의 반복되는 투신과 경련과 깸이 있었다.
죽고 싶다는 감각은 숨이 차는 신체 감각이다. 근육이 나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는지 심장을 조여와 가슴이 욱신거리고, 기도가 수축해서 숨이 막힌다. 혀뿌리와 연구개가 기도로 가는 공기 길을 막고는 비키지 않는다. 코로 아무리 숨을 들이쉬어도 폐까지 산소가 도달하지 않는다. 숨은 가빠지고, 들숨과 날숨소리가 다급해지면 그럴 때면 정말 내 몸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나를 죽이려고 드는 듯한 불안감이 엄습한다. 신체와 분리된 의식이 지닌 생존 본능마저 죄책감이 든다. 점차 호흡이 빨라진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뒤에서 나의 그림자를 밟으며 보이지 않는, 꿈속의 검은 남자들이 달려온다.
세계는 빠르다. 지금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트렌드는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사람들은 모두 같은 모양의 ‘힙’을 좇는다.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할 듯 굴었던 기술들은 오히려 플랫폼 아래 인간을 “부스러기 노동 조각”[1]을 줍는 노동자로 만든다. 정보 접근성이 낮은 계층들은 어느 시대보다 빠르게 소외되고, 뒤돌아보지 못할 만큼 헐떡이며 달려가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내재화한 채 기계적 공정을 외친다. 도태는 회복 불가성이다. 능력주의가 ‘공평’하다는 단어를 오염시킨 이후에, 모든 일의 책임이 모조리 개인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나의 뒤를 쫓고, 숨 가쁘게 뛰도록 만드는 무언가의 형상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물리적 과-연결 시대를 꿈꾸며 세계는 가속한다. 자료를 찾는 일도, 내려받는 속도도 클릭 한 번이면 일 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질식할 듯 쏟아지는 글자를 읽는 일은 느리다. 알기 위해서는 눈동자가 종이의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시간이 필요하고, 시신경이 옮긴 글씨를 뇌가 인식하고 인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글 좀 쓰는 사람들이 트위터(현 X)에 몇 초 간격으로 새로운 담론을 펼치고 온갖 방식의 주장과 논증들이 쏟아낸다. 그 온라인의 속도감에 발맞추기 위해서 계속해서 사유는 헐떡인다. 사유는 느린 것이고, 느려야 한다. 곱씹지 않게 되면서 인간은 인간성을 잃는다. 인간성 상실의 시대는, 빠른 사유의 시대다.
술병을 든 ‘그’이자 ‘나’를 상상한다. ‘그/나’는 쫓기고 있다. 그러나 위스키를 병째로 들이켜서 ‘그/나’는 뛰질 못한다. ‘그/나’는 세계의 속도에서 추방당한다. 인간성이 인간의 조건인가? 인간성 상실의 순간 인간은 무슨 얼굴을 취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아주 느려서 중력이 강하다. ‘그/나’는 그렇게 땅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형상을 본다. 중력이 배가 되어 계속해서 머리가, 팔이, 다리가 땅에서 무겁게 움직인다. 멈출 순 없다. 누군가 ‘그/나’를 쫓아온다. ‘그/나’는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까? 잔뜩 취한 채, 볼이 벌겋게 달아올라, 내뱉은 숨에서 뜨끈하게 역겨운 음식 냄새가 날 때. 그때 우리는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까. 토기를 불러일으키는 아주 느린 숨이 말한다. 우리는 느려져야 한다고. 차라리 고주망태가 되는 한이 있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말고 멈춰 서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그/나’가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 뒤쫓는 발소리도 함께 멈춘다. 누가, 누굴 쫓는다.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쫓긴다. 도대체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시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