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은 술을 마시기 제일 죄책감이 드는 시간이다. 태양 밑의 죄책감을 이겨내고자 이 시간에 주로 칵테일을 마신다. 돈은 없고, 불안감과 우울을 곱씹을 시간만 넘쳐나는 인간에게 남은 것은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거죽(자존심)밖에 없기에, 술은 음료수처럼 보여야 한다. 앱솔루트 보드카 한 병값을 한 번에 지출할 자신이 없어서, 싸고 특색 없는 참이슬 한 병, 그리고 보성 홍차 아이스티 복숭아를 2+1 행사로 세 병을 산다. 재료만 보고도 예상할 수 있는 이 칵테일은 ‘이영지 홍차 소주’ 레시피다.
손잡이 없는 일자 유리잔에 일단 소주를 4분의 1을 따른다. 그리고 얼음을 가득 채우고는 보성 홍차 아이스티 복숭아를 잔 끝까지 채운다. 알코올 향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음료수’는 꿀떡꿀떡 넘어간다. 이날은 여름이었고, 후끈한 열기가 가려지지 않았고, 잔에는 물방울이 맺혀 금세 식탁보를 적셨지만, 복숭아 향의 달콤한 음료수는 얼음이 절반도 녹기 전에 금세 사라졌다. 그렇게 남은 얼음에 소주가 다 떨어질 때까지 부어 마시고 나면, 아이스티 한 병이 남았다.
한낮, 소주 한 병을 비워도 아직도 해가 지지 않던 날. 닫힌 창고 방 한 면은 위층 화장실의 누수 때문에 벽지 가득 곰팡이가 생겼고, 집에서는 문을 닫아도 쿰쿰한 곰팡내가 났고, 이제 그 곰팡이가 내 방의 바닥까지 침투할 무렵이었다. 그리고 누수 문제와 관련된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내 의사는 묵살한 채 우리 집을 마음대로 드나든 지 네 달째 되던 날이었다.
자기들 책임이 아니라는 위층 집주인과 화장실 안 썼는데 물이 새니까 자기 집 아니라는 거짓말이 뻔한 위층 세입자와 언쟁하던 4개월. 위층 집주인은 굳이 세입자인 나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면서도, 온다는 말 없이 아무 때나 현관문을 두드렸다. 엘리베이터 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조여서 벌떡 깨던 날. 그러면 새벽에 악을 지르면서 울던, 그러니까, 한가득 핀 곰팡이와 불청객들 때문에 취해있지 않은 순간이면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 싶던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날.
혼자 있다가 문자 그대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미 ‘미친’ 이후이기는 했다)이던 날, 다행히 동생이 다시 자취방으로 와주었다. 한낮에 소주 한 병을 비우는 걸 보고,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게 아니냐는 동생의 말에 ‘그러게’라거나, ‘날이 더워서’라고 답했다. 자살 생각은 내밀한 경험이다. 그래서 선뜻 꺼내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대신에 중독을 말했다. 그래서 묻는다. 왜 여자들은 술을 마실까? 언제 술을 마실까? 언제부터 술을 마셔왔을까?
여성 알코올 중독자는 "조용한 중독자"[1]다. 20~30대 여성 자살률의 급격한 증가 현상을 "조용한 학살"[2]이라고 부른 것과 일견 비슷하다. 왜 여성의 음주(혹은 자살)는 ‘조용’하다는 수식어가 붙을까. 여성은 목적성이 있는 집단적 주체로 호명되지 않는다. 미디어와 정치권에서조차 이들은 정치 주체로 명명하지 않는다. 이들의 주장은 ‘해일이 오는데 조개를 줍는 일’, 그러므로 대의에 반하는 사사로운 일이라고 평가당한다. 이러한 현상을 철학자 데릭 E. 앤더슨은 “개념적 능숙함의 부정의”[3]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주변화된 주체인 여성이 실제로 “능숙하지 못한 화자”로 간주되어 기득권 주체에게 끊임없이 능숙함을 의심받게 된다.[4]
이는 언론과 정치권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에서 특정 남성들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과잉 대변하기 위해 커뮤니티 이용자의 주장을 사실로 보도하며 인셀 문화를 정치적 행위로 분류해 남성에게 ‘남성 혐오 피해자인 이대남’이라는 주체성을 부여한 모습[5]과는 다르다. 여성은 젠더 이슈에서조차 ‘능숙함(자격)’을 의심받으며 피해자로서의 발언권을 상실당하고, 청년 남성의 반대항으로서 ‘이대녀’라는 호명을 얻게 된다. 이렇듯 여성 주체는 주체가 아닌 반대항, 남성-아님으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음주 문화의 주체로서 여성은 언제나 남성 음주자-아님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며, 이들을 조명하려는 시도는 쉽게 관찰되지 않는다.
음주 폐해에 드는 사회경제적 비용이 증가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음주가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국외에서도 고작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6] 그래서 여성의 알코올 중독은 들이닥치는 ‘해일’이 아니라 서서히 차오르는 만조처럼 아주 조용히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치적 주체도 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도 받지 못하는(2022년 기준 OECD 국가 중 성별 간 임금 격차 31.2%로 1위를 차지하였다[7]) 사회에서 여성을 침묵시키지 않는 공간이 있다. 바로 소비의 영역이다. 소비자로서의 정체성만은 여성혐오적 편견에 기대어 손쉽게 획득된다. 그러니까 돈이나 쓰라는 거다.
2015년, 롯데주류에서 과일 향과 과즙을 첨가한 ‘순하리 처음처럼’을 출시하였고 한 달 동안 150만 병이 넘는 기록을 세우며 대중적인 낮은 도수 과일소주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순하리 처음처럼’의 성공을 시작으로 주류 업계는 젊은 여성을 마케팅 대상으로 삼아 도수가 낮고 과일 향을 첨가한 자몽에 이슬’(하이트 진로), ‘좋은데이 옐로우·레드·블루’(무학)과 같은 칵테일 소주들을 잇달아 출시했다.
2011년까지만 해도 여자들에게 소주는 가격이 저렴하거나, 전통적이고, 중년남성이 즐기는 이미지가 강했다.[8] 이에 주류 업계는 여성의 신체를 성적대상화하는 ‘남성적’ 이미지 대신 실제 주 소비층과 비슷한 연령대의 어린 여성을 모델로 내세워 친근하고 부드럽고 귀여운 이미지를 취하기 시작했다.[9] 하이트진로는 낮은 도수의 과일 탄산주 ‘이슬톡톡’ 광고 모델로 가수 아이유를, 롯데주류는 가수 수지를, 무학은 배우 박보영을 발탁하여[10] ‘회식할 때, 중년남성들이 마시는 술’이라는 이미지에서 ‘또래 친구들과 즐기는 달콤한 술’의 이미지를 얻었다. 그러자 여자들은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2015년 과일소주의 유행을 겪은 여성들의 2016년 연간 음주율은 작년 대비 19~29세는 12% 증가했으며, 30~39세는 39.2% 증가했다.[11] 전년도에 모두 마이너스 증가율을 기록한 것과는 다른 모양새를 보인다. 이제 소주는 젊은이의 술이다. 배부를 때 깔끔하게 털어 넣고, 빨리 취하고 싶을 때 친구들과 건배 후 가볍게 들이켜는 그런 술. 그렇다면 현재는 어떨까? 친구들과 낮은 도수 과일소주를 마시던 여자들은 계속 술을 마실까?
2023년 질병관리청에서 발표한 국민영양조사를 기반으로 한 〈음주 심층보고서〉에 따르면 남성들의 음주율은 감소하는 반면, 여성들의 음주율은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20~30대 여성의 음주율이 높으며, 고위험음주 경험이나 폭음과 같은 위험음주율 또한 유사하게 결과를 보였다. 게다가 여성의 주류소비가 가장 높은 상위 20% 집단의 경우 사회의 주류섭취 문화의 변화와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높은 음주율을 기록했으며, 이는 남성과 전혀 다른 양상이며 관심이 필요하다고 밝혔다.[12] 주류 업계에서 타켓 소비자가 된 이후 계속해서 20~30대 여성들은 지금의 어느 집단보다 술을 ‘자주 그리고 많이’ 마신다.
코로나19 이후 자리 잡은 혼술과 홈바 문화를 즐기는 사진들이 SNS에서 '좋아요'를 받고, 미디어에서는 음주 문화는 멋지고 유쾌한 이미지로, 금주는 시시하고 재미없는 이미지로 이분하여 재현한다. 음주 자체를 소재로 하는 영상 콘텐츠들은 인기 급상승 동영상이 되고, 추구하는 여성의 얼굴을 한 주류 광고가 여기저기서 재생된다. 음주를 용인하는 사회환경적 맥락에서 여성들은 퇴근 후 음주를 성공한 직장인의 라이프스타일로 받아들인다.
소주 다음으로 양주, 위스키 와인 등이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음주는 다시 다른 모습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 친구들과 건배하며 깔끔하게 한 잔 털어 넣는 왁자지껄한 소주와, 그리고 바에 앉아 사색하거나 깊은 대화를 나누며 즐기는 고요한 위스키와 와인의 이미지가 있다.
알코올 중독은 멋있지 않지만, 싱글몰트 바에서 홀로 위스키를 주문하고 마시면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며 책을 읽고 저녁 시간을 보내는 일은 멋있다. 그리고 집에서 혼자 비싼 수입 치즈나 외국 초콜릿, 크래커를 예쁜 접시에 올려놓고 글렌캐런 잔에 위스키를 따르는 것도 세련된 삶의 방식같이 여겨진다. 우리는 여유를 즐기는 감각적인 사진을 SNS에 올린다. 이때 귀퉁이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나,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이 찍히면 더욱 좋다. ‘해시태그_음주독서’로 음주는 직장인의 자기계발 혹은 재충전의 이미지를 얻는다. 멋진 안주(혹은 책 한 권)와 술 한 잔의 사진은 기호를 드러내는 개성의 기표이자 스스로 갈망하는 이상적인 자아의 재현이다. 이상적 자아상이 재현된 사진들을 SNS에 공유하며, 우리는 서로의 음주를 부추긴다.
이제 청년 여성에게 음주는 ‘자유’보다 어떠한 ‘위험’이다. (나를 포함한) 조용한 중독자들은 병식이 없다. 그러나 이미 30대 여성의 알코올로 인한 유병률은 남성을 넘어섰다. 여성은 체수분이 남성에 비해 적어 혈중알코올농도가 높고, 잦은 음주는 유방암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은 남성보다 알코올에 취약하다.[13]
이렇게 음주율이 높아지면 고위험 음주를 할 가능성도 같이 증가한다. 소주에서 양주까지 모두 마셔대는 여성들을 설명할 수 있는 일이 단지 ‘주류 업계의 마케팅’뿐일까? 혹은 청년 여성들이 술 마실 수밖에 없는 또 다른 밝혀지지 않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아주 고요한 중독에서 우리는 다시 ‘조용한 학살’의 이면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알코올 의존증이 높을수록 우울감이 높아진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취중 진담’의 진위를 두고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음주 습관에 따라 대체로 긍정하거나 완전히 부정한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한 말이 진실한 마음이라는데, 죽음을 가리기 위한 중독이라면 주취 상태에서 자신의 진심을 내보이기 마련이다. 레드 와인을 마신 나는 취중에 불특정다수에게 고백하듯 죽음이라는 진담을 쏟아내는 중인 것이다. 그러나 에세이는 저자의 실제 생각과 경험을 기반으로 쓰인다고 믿어지는 지점에서 언제나 허구다. 소설은 허구성을 전제하는 한 진실하다. 그래서 취중 진담의 글이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알 수가 없다. 진실의 허구인가, 허구 속 진실인가. 그렇다면 죽음 대신 중독인가, 중독 대신 죽음인가. 술을 마시고 싶은가? 죽고 싶은가? 그리고 우리는 술을, 죽음을…… 무엇을 먼저 꺼내 말해야 하는가? 청년 여성들에게 긍정적 기표로 재생산되는 음주 문화 속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1] KBS 1TV, 〈추적 60분 1356회 ‘2024 중독사회 1부 – 젊고 멀쩡해 보이는 알코올 중독자들의 나라’〉 2024.02.23 방영.
[2] 슬랩, 〈‘조용한 학살’이 다시 시작됐다〉,https://youtu.be/qyXWtE7Osrg?si=iHthq_t0Du0fMPe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