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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 Apr 05. 2024

피트한 건 보통 여자분들이 안 좋아하시는데

칵테일바에서 위스키 리스트를 따로 요청하거나, 바 백장(Back+장, 업장에서 술병을 보관하는 장)에서 라벨을 보고 주문을 할 때, 그리고 라프로익이나 아드벡같은 피트 위스키를 주문할 때. 의심 어린 눈초리와 함께 꼭 덧붙이는 말들이 있다. 독한 술이라는 것, 향이 세다는 것, 그리고 보통 여자분들이 안 좋아한다는 것. 원래 독주를 즐기는 취향이며, 피트향을 사랑하고, 술을 너무 좋아해서 조주기능사도 땄다는 사실을 밝히면서도 마지막 말에선 항상 머뭇거리게 된다. 그 바텐더의 말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내가 ‘여자’임을 증명해야 할까? 내가 바텐더의 상식에 걸맞은 ‘보통 여자’는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야 할까? 아. 혼란스럽다. 그렇다면 도대체 ‘여자’는 뭐길래 내가 여자이거나 아님을 증명하게 만들까?     


칵테일바에 가서 메뉴 추천을 받을 때, ‘여성분들이 좋아해요’라는 말을 들으면 고민 없이 그 메뉴를 제외한다. 화려한 색에 달디단, 어느 곳에서는 하트 모양의 분홍색 빨대를 꽂아 주는 것, 그리고 입 밖으로 내뱉기도 민망할 수준의 단어(예를 들어, 곰돌이, 오빠, 소녀 등)를 이름으로 하며 알코올 도수가 낮아 술맛이 거의 나지 않는 음료. 한 입 마시면 그레나딘 시럽(칵테일을 만들 때 사용하는 석류로 만든 붉은 색의 무알콜 시럽)을 입 안에 통째로 부은 듯이 혀끝부터 두피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는 빨간 칵테일은 지인들 사이에서 달디단 경기를 일으켰고, 그럴 때마다 그러한 음료를 좋아하는 여자들의 얼굴을 궁금해하곤 했다. 도수가 약하고 달콤한 술을 원하는 여자를 상상하면서, 또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을 가늠해 보곤 했다. 보통 남성 바텐더의 입으로 뱉어지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에서 나는 남성들의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의 맥락을 언뜻 엿본다. 그럴 때면 손끝이 얼어붙은 겨울에도, 등줄기에서 땀이 줄줄 나는 여름에도 아주 독하고 차가운 한 샷을 갈망한다. 여름에는 보드카나 위스키를 병째로 냉동실에 넣어둔다. 도수가 높아 가정용 냉동고에서는 절대 얼지 않기 때문이다. 더운 날에는 온더락이 생각나긴 하지만, 얼음이 녹아 빠르게 알코올이 희석되는 맹맹함이 싫다. 냉동고에서 꺼내어 글라스에 따르면, 금세 김이 서린다. 차가워진 위스키는 향이 덜하다. 프로즌 위스키라는 이름으로 냉동실에서 얼려 먹을 때 더 맛있는 위스키들이 있지만, 결국 우리 집 냉동고에 들어가는 위스키들은 잭다니엘이나, 그에 준하는 저렴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손가락에 묻은 물기를 바지춤에 닦아내면서, 아주 작은 모금의 차갑고 독한 액체가 혀를 타고 식도에 넘어가 위장을 장악하는 감각을 느낀다.      


역사적으로 음주하는 여성의 모습은 여성의 사회적 자유의 모습과 얽혀 있다. “요즘 시대에 무슨 술 먹는 게 여자만의 흠이냐?”라고 묻는다면, 현대 여성의 음주 경험에서 안전에 대한 위협과 성범죄 피해를 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고자 한다. 음주한 여성이 성범죄 피해자가 되었을 때 가해지는 사회의 도 넘은 비난과 사법부의 차별적 시선 또한 덧붙인다. 미국 작가 맬러리 오마라Mallory O’Meara는 여성과 술의 역사에 대한 책 《걸리 드링크》에서 “한 사회가 여성을 대하는 태도를 알고 싶다면 술잔 밑바닥을 들여다 보면 된다”[1]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술잔 밑바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건배 후 한 방울도 남김없이 털어내야 하는 그 밑바닥에.


유난히 여자들이 하는 일들은 근거 없이 평가 절하된다. 여자들이‘나’ 읽는 책, 여자들이‘나’ 쓰는 글, 여자들‘끼리’ 사랑, 여자들의 우정, 여자들이‘나’ 피우는 담배(물론 흡연 여성들은 흡연 행위 자체로도 남성보다 차별적 시선을 겪는다). 이런 어구들을 들었을 때 직관적으로 얻어지는 이미지는 전문적이지 않음, 남성이라는 이름을 숨긴 기득권에 반하는 부정적 가치이다. 여기서 여자인 우리에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여성적인 가치를 긍정적으로 재의미화하는 일, 그리고 여성적인 가치에서 여성인 ‘나’를 분리하는 일이다. 전자의 경우 “그게 어때서.”라는 반박이 가능하고 후자의 경우 “나는 다릅니다.”라는 반박이 가능하다. 무엇이 더 나은 방식일까? 나는 내가 ‘여자-임’을 증명하면서 어떻게 그러한 부정성과 거리를 둘 수 있을까?


〈이 시간엔 대체로 취해있습니다〉는 그러한 질문에 대하여, 금지되어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내가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죽고 싶어서 술을 마시고, 사회에서 ‘나’를 설명하라는 압박감에 책을 읽다가, ‘너’의 ‘우리’가 나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를 호명하는 글을 쓴다. 살고 싶어서 다시 술잔을 들이키다, 술잔 밑바닥의 여자들을 본다. 하지 말라는 것을 다 하면서, 언제나 주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사이보그’인 채로 이 느슨한 망에 함께 묶여 멀찍이 옆에 설 여자들을, 이종(異種)을, 당신을 기다린다. ‘나’가 ‘우리’가 되었을 때, 분명 무언가 변화하리라 믿으면서.









[1] 맬러리 오메라, 《걸리 드링크》, 알에이치코리아, 2023,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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