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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 Apr 16. 2024

존재만으로 정치적인 존재

4월 10일 제22회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고 개표하는 동안 나의 일부를 공유하는 집단의 SNS에 접합과 탈각을 반복했다. 사전 투표하러 가는 날 ‘내 안의 작은 맑스를 꺼내는 날’이라고 씨부렁거렸고, 왜인지 언제나 사표를 던지는 유권자이지만 선거권을 얻은 이후 한 번도 선거를 빼먹지 않았다고(이 당연한 것을) 자부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사표, 사표하고 울었다. 각 SNS에서는 이용자들의 정치적 쟁점에 따라서 지지하는 당이 ‘통일’되어야 했는데, 이 지점에서 구역을 느끼다가도 언제는 그 ‘단결’감에 뿌듯해하기도 했다. 통일이라던가 단결이라던가. 여러모로 아주 위험한 ‘정치적 의도’가 있어 보이는 단어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의 목적은 명확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심판하자,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자(그리고 민주당을 심판하자). 총선 결과 300석 중 여당은 총 108석을 차지하며, ‘여권 참패 야권 압승’의 헤드라인이 등장했다. 유권자들은 ‘윤 심판’에 더 의미를 둔 것이다. 심판. 뭐, 심판하고자 하는 이유는 각자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달라, 쉽고 짧게 일반화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사건들이 있지 않은가.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부터,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그리고 이것은 어디로 이어질까.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10주기.

잊지 않겠습니다.     




4월 11일 저녁에는 문흥동에 곱창전골을 먹으러 갔다. 곱창볶음에 가깝긴 한데, 국물이 자작한 채로 계속 끓인다는 점에서는 전골이 더 어울려 보인다. 국물이 졸아야 맛있다는 사장님의 말을 듣고 이마에 땀을 줄줄 흘리면서 기다렸다. 소주를 안 마시는 나 때문에, 그리고 이것이 그냥 곱창이 아니고 간이 짭짤하게 잘 되어있는 양념이 묻은 곱창이라는 점에서, 카스를 시켰다. 


팔팔 끓는 뚝배기에 담긴 (광주에서 기본 반찬으로 주는) 맑은 선짓국을 한 숟갈 먹고선 늙은 아저씨 같은 감탄사 내뱉었다. 윗지방의 선짓국은 언제나 빨갛게 나왔고, 다대기(혹은 느끼한 고추기름) 맛만 났다. 후추 향 솔솔 나고 큼직하게 썰린 무 몇 덩이와 콩나물이 들어가 시원한 맑은 국물의 선짓국을 보면서 ‘이게 광주다’ 생각했다. 진보의 도시고, 뭐고, 선거철마다 광주에 빚을 지고 있네. 뭐네, 하는 거 말고, 이 음주와 해장을 동시에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맑은 선짓국과 존나 맛있는 곱창전골을 먹으면서, 씨발 이게 광주지. 그리고 어쩌다 나온 선거 이야기에는 친구의 잔에 잔을 부딪치면서, 선거 이야기하려면 술 더 시켜야 한다는 말로 답을 갈음했다.      


이쯤에서 슬슬 제목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는 게 좋겠다. 


도대체 사람들은 ‘정치적’이라는 단어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따금 ‘정치화’라는 단어는 집단의 목적을 악마화하는, 즉 듣는 이로 하여금 멀어지고자 하는 욕구만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같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이 너무나 정치적이고 급진적이기에 ‘페미니즘을 대중화’하자던가,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때 내가 아는 ‘페미니즘’이 일견 대중화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차치하더라도 도대체 이 발화자에게 페미니즘은 무엇을 뜻하는지를 먼저 묻게 된다. ‘대중화’. 소수자성이라는 말은 당사자인 소수자를 제외하고는 경험하기 어려운 경험이라는 뜻이며(물론 당사자 간의 경험의 차이도 존재한다), 대중들은 오로지 전달된 경험을 ‘지지’할 뿐이라는 건데. 여기서 발화자가 말하는 ‘대중화’는 다수를 이해시키라는 말보다는 정치적 의미를 탈각시켜 ‘대중이 허락한 페미니즘’을 퍼트라는 말에 가깝다. 페미니즘에서 정치를 빼면, 무엇이 남을까? ‘페미니스트’라고 음각이 새겨진 팔찌? ‘너 페미하냐?’의 ‘페미’? 탈진실 세상 속의 집게손가락?


그렇다면 대중이란, 소수자의 어려움을 설명하면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존재인가? 여러모로 어불성설이다. 애초에 소수자의 어려움이 매끄러운 언어로 설명될 리가 없다. 명명 권력 없는 소수자의 언어는 언제나 다수자의 언어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정치화’가 부정적인 단어로 쓰이는 현재에 구구절절한 소수자의 언어는 기득권이 짠 프레임 하나를 넘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이 정말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일을 전적으로 공감하고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나? 불가능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가능하지도 않다. 이는 개개인의 도덕성에 맡길 사안이 아니라 인권 감수성 교육을 기반으로 한 사회 공동체 단위의 포용력이 필요한데, 경기도교육청에서 직접 학교에 “부적절한 논란 내용이 포함된 도서를 처리”[1]하라는 공문을 내린 걸로 보아 한참은 더 먼일이 되었다. 여기에는 ‘동성애 조장 도서’를 포함함 ‘인권, 페미니즘’ 등을 다루는 도서들이 유해 도서 목록에 대거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성애를 조장하는 세상에 동성애를 다루는 책 한 권 읽는다고 동성애를 한다는 주장은 헤테로 특유의 자의식 과잉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논리에 따라 동성애 책 한 권 읽고 동성애가 하고 싶어진다면, 이성애 책 두 권 읽어서 해결하면 될 일이다. 호들갑은.


문제는 학부모 단체의 도 넘은 요구에 공공기관이 응하며 학교 도서관과 공공도서관에 실제로 해당 도서들을 ‘처리’하라는 지시가 내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 이런 상황에서 이들에게 ‘정치화’가 얼마나 두렵게 느껴질지 예상할 수 있는가? 유해 도서 리스트를 지정한 경기 학부모 단체 ‘다음세대를위한학부모연합’이 보기에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동화책도, 미국 여성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책도, 여성가족부에서 성평등 도서마저도 모두 다 ‘특정 세력의 정치적 의도가 있는’ 그러므로 불순한,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읽힐 수 없는 책이다. ‘젠더 정체성’도 ‘페미니즘’도 ‘성평등’ 도서들도 다 그렇다.     

 

이러한 두려움은 마치 동성혼 법제화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너무 급진적이니 일단을 생활동반자법부터 시작하는 건 어때’와 같은 제안이고, 그럼에도 동성애를 조장하는 문항이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처리되지 못한 채 국회에 계류 중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 일과 같다. 급진적인 것은 정치적이라는 뜻이고, 과격하다는 뜻이고 꺼려지고 피곤하며 피하고 싶다는 뜻이다. 일단은 사회적 협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정치인들의 입에 발린 소리 또한 그렇다. 이러한 ‘정치적 의도’에는 언제나 ‘대중화를 통한 사회적 합의’라는 조건이 붙지만, 이들은 ‘동성애 대중화(이때 대중화란 대중들에게 퀴어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지 무슨 ‘너 당장 동성애 해!’와 같은 몰상식적인 시도(?)가 아니며 그런 시도였던 적도 없다)’를 들었을 때조차 불안해하며 너무나도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말에서 ‘정치적 의도’를 제하고자 한다. 이유는 다양하다. 개인적으로는 괜해 트집 잡히고 싶지 않아서, 단체에서 튀고 싶지 않아서, 반대 견해와 논쟁할 만큼 그 주제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해서, 정치적 신념을 밝혔을 때 돌아올 악영향이 두려워서, 한 의견을 지지하는 것보다 중립적 태도를 보이는 게 더 ‘쿨’해서 등등.      


하나의 집단에서는 자신들의 주장을 특정 이념에 물들이고 싶지 않을 때, 그리고 그 집단이 소수자이면 일수록, 그리고 그 소수자성으로 인해 미디어나 정치권에서 뜯어먹을 기회만 노리고 있을수록 자신들의 주장에 다른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한다. 특정 이념이나 단체와 만나는 순간 자신들의 의제가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과 특정 이념이나 단체의 이미지가 덧씌워질 것 같은 공포는 학습된다. 


2018년 5월, ‘불편한 용기’의 불법 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는 페미니즘 제4물결로 지칭되는 디지털 페미니즘의 ‘익명성’을 특징으로 한다. ‘불법 촬영 편파수사 규탄’이라는 정치적 구호를 외치지만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금지이며, 기존 여성 단체나 시민 단체의 도움도 일절 받지 않았고 참가자 개인 인터뷰를 제한하였다. 이는 단일한 의제, 즉 여성 의제 중에서도 ‘불법 촬영 문제’ 해결에 집중하기 위하여 고려된 방식이다.[2] 이는 2021년 스타벅스 노동자들이 직장인 익명 애플리케이션 블라인드를 통해 익명성을 기반으로 트럭 시위를 조직한 일과 유사하지만, 사뭇 다르다. 스타벅스 트럭 시위 총대(익명)는 스타벅스 노동조합 설립을 지원하겠다는 민주노총의 논평에 “우리는 노조가 아니”며 “트럭 시위를 당신들의 이익 추구를 위해 이용하지 말라”고 답했다.[3] 


어떤 집단은 단일한 메시지를 유지하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리고 어떤 집단은 특정 이념의 낙인에서 벗어나고자 특정 정치적 이념을 가진 단체의 참여를 제한한다. 시위라는 명확한 ‘정치적 목적’이 존재하는 집단에서조차 정치적인 의도를 제한하곤 하는데, ‘존재만으로 정치적인 존재’라면 어떻게 될까? 

    





4월 8일 제22대 총선을 이틀 앞둔 날, 트위터(현 X)에 이러한 트윗이 피드에 흘러왔다. “나는 민주당 지지자지만 국민의힘 지지자와도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걸 못 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정치 성향과 진형을 자신의 인간관계와 동치시키는 사람들이다. 이를 우리는 정치병자, 극단주의자라고 부르며 또한 사회의 암덩어리라고 부른다.”(사진)라는 트윗이다.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현재 정치 상황에 대한 일갈이지만, 다른 이용자들이 많은 인용으로 달아두었듯이, 존재만으로도 정치적인 존재에 대하여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자신의 정치적 의도는 ‘그런 뜻’이 아니라며 감추는 와중에, ‘나’만이 차마 ‘뜻’이라는 말로 숨길 수 없는 ‘존재’로 벌거벗겨져 있다. 만약 짧은 머리를 한 여성이라면, 퀴어라면, 혹은 혜화역에서 지하철을 타려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라면? 그저 이 공간에 이 상태로 일상을 보낼 뿐인데, 그러한 존재는 정치적이다. 사람들은 그 공간과 존재만으로도 쉽게 의미를 읽는다. 개인의 외현은 하나의 정치적 기호가 된다. 


디스토피아 시리즈 영화 〈헝거게임〉의 캣니스 에버딘은 살인 게임인 ‘헝거게임’에서 보인 플레이가 정부에 반항적이라는 이유로, 반란군의 상징이 되었다. 반란군의 선전물이 된 캣니스는 개인적인 외출과 일탈조차, 정부인 판엠과 반란군 13구역에 모두 특정 정치적 의도를 지닌 행동으로 이해되었다. 캣니스 또한 영화 속에서 ‘반란’을 뜻하는 하나의 기호다. 캣니스가 있는 곳에는 반란이 있다. 의미를 획득한 것은 메신저이다. 그렇기에 시위 집단은 특정 정치색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단일한 의제를 고수한다. 그렇게 해야지 메신저와 메시지의 의미가 뒤바뀌지 않는다. 


머리 짧은 여성이, 퀴어가, 장애인이 있는 곳에 ‘정치적’인 게 있다. ‘나’라는 개인은 메신저와 메시지가 일치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특정 이념을 제외한다. 신체적 외현을 바꾸도록 요구받고(여성의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페미는 맞아야 해’라며 폭행한 사건의 판결문에는 ‘혐오범죄’라는 단어도 없었으며, 가해자의 형량은 고작 징역 3년이었다. 이 판결은 분명 여성이 ‘여성적인 외형’을 취하지 않으면 남성에 의해 ‘폭행’당할지도 모르지만, 사법부는 여성 피해자의 편을 들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기능한다), 바꿀 수 없다면 자신이 ‘그렇게 정치적인 인간’이 아니기에 공동체의 평화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증명하도록 요구받는다. 소수자들은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자신이 다르다고 대중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한 증명, 즉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스스로 디스포리아를 겪는다. 


“그러니까 모든 (  )이/가 그런 건 아닌데, 그런데 일부는 그러기도 한데, 그러니까 편견이기도 한데 누군가는 실제로 그 고정관념에 조금 부합하기도 한데, 그런데 ‘나’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스스럼없는 대화를 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나’가 배제된 ‘−나’이다. 내 앞에서 누가 동성애를 찬성하냐느니 생활동반자법이 통과되면 가족이 해체되어 한국이 망하며 이 법은 감히 동성 결혼이 가능한 조항을 숨기고 있는 법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상대 지지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레즈비언이 어떻게 ‘극단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그들에겐 존재 자체가 극단적일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다 내가 한 것일지도 모르지.      


녹색정의당 심상정 대표의 정계 은퇴 기자회견을 보면서, 2017년 4월 25일 제19대 대통령 후보 TV 토론회가 떠오른다. 이건 뭐, 나만은 아니고 다들 자연스럽게들 떠올린다. 당시 홍준표 대선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TV에서 당당하게 “동성애에 반대합니다”라고 말한 후의 당시 심상정 대선 후보의 발언을 다들 안다. ‘심상정의 1분’[4]. ‘정의당이 이래서 망했고, 저래서 망했다’라는 ‘정치적인’ 말 사이에서 대선 TV 토론회에서 다시 이런 발언을 해줄 여성 정치인이 언제쯤 다시 나오려나 생각한다. 대선 TV 토론회에서 ‘나’를 처음으로 배제하지 않은 심상정 대표의 발언은 상대 지지자에게는 ‘무척이나 정치적’이겠지만, 나한테는 ‘술은 많이 마시면 취한다’와 같은 평이한 문장이다.     


진부한 결론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소수자가 된다. 어디서든, 어떻게든, 어느 논지에서든. 소수자가 되는 경험으로 ‘평생 내가 경험할 일 없는 소수자성으로 사회에서 ‘나’를 깎아내는 소수자’를 이해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제는 너무 많은 믿음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정말 자신이 경험하기 전에는, 사실은 경험하는 순간에도, 경험한 이후에도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란 게 없는 것 같다. 정정한다. 이렇게도 없는 이가 있고, 자신이 경험하지 않아도, 직접 겪은 것보다 더 크게 이해하는 이가 있다. 세계는 너무나 양극화 되어있다. 


우리가 언제나 소수자가 된다면, 우리는 동시에 언제나 다수자이기도 하다. 다수자인 나는 소수자인 ‘그’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두려움이 먼저 덮친다. 나도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처럼 ‘그’를 바라보는 게 아닐까? 오히려 나의 소수자성을 가면 삼아 ‘그’를 거만하게 깔보고 있지 않을까? ‘그’는 나를 다수자의 얼굴로 생각하게 되는 게 아닐까? 차라리 그렇다면,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게 나을까?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다수의 얼굴을 취한 눈동자가 얼마나 오만하고, 턱을 치켜올린 표정이 얼마나 역겨울지 상상하는 데, 힘을 다 쓸 수는 없다. 고통을 멈추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글이 너무 쉽게 쓰이거나 글 쓰는 게 재미있는 날이면, 오늘은 내가 누구를 짓밟고 서 있을지 상상한다. 이 세상은 누굴 짓누르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으니까, 나는 누구의 마음을 뭉개 즈려밟고 서 있을까. 재미있을까. 행복할까. 이제는 괴롭지 않으면 불안하다.










[1]경향신문(2024.04.01.),"'성교육 도서'는 '유해 도서', 학교 도서관에서 없애라고요?",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404011708001

[2] 김해원 외(2018), 〈5월 19일, 여성들은 혜화역에 어떻게 모였나?〉, 《언론과 사회》 제26권 제4호, 사단법인 언론과 사회, 85-139쪽

[3] 서울신문(2021.10,09), “[이건 못 참지]‘굿즈’에 폭주한 자본…스타벅스 ‘트럭시위’가 남긴 세 가지” https://www.seoul.co.kr/news/economy/industry/2021/10/08/20211008500170     

[4] 4월 25일, JTBC에서 진행된 제19대 대통령 후보 4차 TV 토론회 심상정 대표 발언 일부. 

“저는 동성애는 찬성이나 반대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성정체성은 말 그대로 정체성입니다. 저는 이성애자이지만 성소수자들의 인권과 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이어 “1분 더 쓰겠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추진했던 차별금지법, 또 계속 차별금지법 공약으로 냈는데 그것을 후퇴한 문재인 후보께 매우 유감스럽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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