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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Oct 15. 2023

프랑크푸르트 5.


  나플리오에서 고대 올림피아, 리메니, 미스트라스, 스파르타, 미케네를 거쳐 다시 나플리오에 왔다가 거기서 또 아테네로 가서 아테네에서 이틀을 잔 후 드디어 다시 프랑크푸르트에 왔다. 길고 긴 이번 여행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남편이 이제 독일이나 그리스는 더 이상 안 와도 좋겠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일견 수긍했지만 마음 한편으로 그래도 아쉬움 비슷한 것이 남았다. 그렇다. 사실 그리스만 줄곧 오느라고 서유럽 다른 나라들 중엔 아직 못 가본 나라도 있고 동유럽은 유일하게 체코만 가봤으니 형평성(?)을 위해서라도 독일과 그리스는 이제 그만 오는 것이 맞다. 그런데... 모르겠다. 사람 마음 언제 바뀔지 모르니... 그래도 어쨋든 독일 프랑트푸르트도 이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 속에서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잊지 않도록 잘 봐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가 갑자기 우리가 독일 땅을 처음 밟았을 때 삶의 거처를 마련했던 곳, 우리의 첫집에 찾아가 보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불현듯 머리를 스친 이 생각을 남편에게 말하자 그도 손뼉을 칠듯이 반색을 하면서 자기도 마침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번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예약해놓은 호텔은 마인 강 바로 옆이었다. 호텔을 나와 걸으면서 코너를 돌아 횡단보도만 건너면 바로 마인 강변이었다. 그래서 마인 강변을 동네 골목 걷듯이 수시로 걸을 수 있었다. 호텔 조식을 먹고 나와서 강변을 걷다가 이런 생각을 서로 확인한 우리는 그길로 바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옛날에는 전차로 가던 그 동네는 이제 전차 노선은 없어지고 지하철로 연결되게 돼있었다. 역 이름은 옛날과 똑같이 <Bornheim Mitte>였지만 지하철역 부근과 옛날의 전차역 부근이 꽤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어디가 어딘지 도통 분간할 수가 없었다. 옛날에 살던 집의 주소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기에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 집의 모양과 거리 모양을 기억속에서 끄집어 내어 그 비슷한 것을 찾아보려 애썼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집은 흔히 보는 유럽식 3층 집이었는데 주인할머니가 3층에 사셨고 우리가 밖의 거리가 보이는 방향의 2층에 살았었다.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딱 여섯 달만 살았던 집이어서 무려 43년 전의 일이었으니 그집과 거리의 특징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몇 개 안 되는 단서에 불과했다.

   3층 집이라는 것과 현관과 창문의 아치형 모양과 건물 색이 연한 자줏빛이었다는 것, 마주보이는 건물도 3층이었고 회색의 벽과 슬라브식 구조의 지붕이었다는 것, 우리가 살던 집이 19세기의 집이었던 데 비해 건너편 집들은 한 세기쯤 후에 지어진 비교적 단순한 모양의 아파트였다는 것, 거리 양쪽에 가로수가 심어져 있었고 그 밑에는 차를 주차시켜 놓을 정도로 건너편 집들과는 꽤 사이가 떨어진 거리였다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아무리 골목골목을 돌아다녀 보아도 비슷한 집이 보이면 거리 모양이 달랐고 거리 모양이 비슷해 보이면 이번엔 집 모양이 다르거나 건물 색이 달랐다. 한 시간 반 가까이 목을 빼고 머리를 들어 아무리 집들과 거리 모양을 기억과 비교해 보아도 일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거리 거리의 분위기도 우리의 기억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보른하임 미테(Bornheim Mitte)에는 옛날에 입구에 싸구려 물건이 잔뜩 쌓여 있던 Woolworth 라는 백화점이 있었고 우리가 어느 날 저녁에 모처럼 맘먹고 나가서 영화(갈리굴라)를 보았던 영화관이 있었는데 그것들도 오리무중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길거리의 분위기가 그런 평범하고 일반적인 동네와는 확 다른, 중산층 동네의 젊잖고 조용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뭘 잘 모르고 있었던 건가, 우리의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기억과는 아주 다른 고급스런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동네에 와 있는 것 같았다. 한 시간 반 정도 거리를 헤매던 우리는 집 찾기를 포기하고 돌아가기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찾는다고 한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추억을 확인하는 의미밖에 없었으므로 마음 복잡할 이유도 없었다. 집주인 할머니도 그때 이미 60을 한참 넘은 나이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고 여태 살아 계실리가 만무했다. 이래저래 기억이란 것의 불확실성과 유한성 앞에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 입구를 찾아가다가 길거리에 있는 아이들 장난감 가게를 발견했다. 독일 장난감은 잘만 고르면 비싸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에게 유익한 것이 많아서 들어가서 커다란 퍼즐조각을 사 갖고 나왔다. 우리 애들이 어렸을 땐 주로 라벤스부르거(Ravensburger) 퍼즐을 사주었는데 아이들이 늦게까지 잘 가지고 놀았었다. 그런데 사려는 그 상표는 없고 대신에 그 비슷한 것이 있어서 부피가 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민하다가 사기로 했다. 장난감에 관해서는 나는 독일 것에 항상 기울어 있으므로 좋은 선물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지하철을 타고 다시 뢰머광장으로 가서 저번에 들렸던 카페에 가서 차와 케익을 먹고 다리를 쉬었다. 카페의 상호가 <황금저울>이어서 건물 지붕 모서리에 예쁘게 장식으로 달아놓은 저울 모양을 이번에는 신경을 써서 예쁘게 찍어봤다. 이 카페에는 여전히 손님들이 가득이다. 돈을 도대체 얼마나 많이 벌고 있을까 잠시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바로 그옆에 있는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 다시 한번 들어가 보았다. 성당 내부가 아주 화려한 편은 아니고 정갈하고 소박했다. 여기서 옛날에 1562년부터 1792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대관식이 열렸다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 성당 내부가 대단히 화려하고 멋있게 장식돼있고 뭔가 멋진 것이 있으리라고 기대했다면 큰 착각이다. 여기에서도 독일인들의 검소하고 겸손한 태도를 잘 확인할 수 있다. 외양의 화려함 보다는 역사적 상징성과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뢰머광장의 옛시청 건물과 대각선 방향에 있는 성 니콜라이 교회로 갔다. 이 교회는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크지 않은 교회지만 왕실교회였다. 원래는 로마카톨릭 교회였으나 종교개혁 후인 1530년부터 미사가 중단되고 교회서적 등의 보관창고로 사용되어 오다가 다시 1721년에 가서야 개신교 교회가 되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95조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채교회당 ((Schlosskirche zu Wittenberg) 문에 발표를 하고나서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1521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는 루터에게 소명의 기회를 주려고 보름스 의회에 루터를 소환했고 루터는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이제나흐에서 보름스까지 가는 길 중간에 있는 프랑크푸르트에 1521년 4월 14일에 도착했다. 그때 이 성니콜라이 교회 바로 근처의 여관( Haus zum Strauss) 에서 잤음을 기념해서  <루터의 순례길>(Der Lutherweg 1521) 을 만들고 매년 순례자들을 모집해서 360km에 달하는 순례행사를 갖는다.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보름스까지 오고 가는 순례길에 대한 자세한 안내가 성 니콜라이교회 게시판에 붙어 있어서 보게 되었다. 루터는 종교적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마녀사냥과 면죄부판매가 횡행했던 중세시대를 끝장내고 새로운 근대를 열어제친 위대한 인간이다. 누가 그 당시에 감히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고 세속황제의 명을 거부할 생각을 했을까? 불합리한 교리에 등불을 비춰 무지몽매한 인간들을 계몽하려 했던 그의 행위는 휴머니즘의 관점에서도 눈물겨운 일이다. 그의 생애를 묵상하며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되리라 생각했다.


  관광객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걸어가는 하우프트 바헤 쪽으로 가다 보면 콘스타블러바헤(Konstabler Wache)라는 역이 있다. 거리가 여러 개가 겹치는 곳으로서 중요한 상업지구 중 하나인데 옛날엔 꽤 번화한 곳이었다. 뢰머쪽으로 걷다가 식당들이 많이 밀집해 있어서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거리 모습이

180도 바뀌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보도 여기저기 에 쓰레기와 담배꽁초 등이 버젓이 넘쳐흘렀다. 이 동네는 오히려 더 나쁜 쪽으로 변한 것 같아서 무슨 이유일까 궁금해졌다. 밀집한 식당가에서 어디를 들어갈까 고르다가 맛있을 것 같아 보여 들어간 터키 음식점에서 모처럼 생선요리를 시켰는데 맛은 없었고 싱싱해야할 샐러드도 이상한 모양이어서 손이 가지 않았다. 손님을 대하는 정성도 부족해 보였다. 값은 생각보다 비쌌고 결과적으로 대실망이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먹었던 터키음식은 맛있었는데 왜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와서 돌아다니다 보니 거리의 70%이상의 사람들이 우리를 비롯한 중국인 등 동양인과 아랍인, 흑인들이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터키음식점에서도 손님 모두가 우리를 제외하고 흑인이어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잠시 쉬기 위해 호텔에 들어가기 전에 과일을 사려고 들어간 조그만 마트에도 계산원도, 손님도, 일하는 사람들도 거의 아랍인들로 보여서 낯선 느낌이 들었다. 길거리에서 하는 일 없이 군데군데 모여 담배를 피는 사람들도 아랍인 아니면 흑인이었다. 원래 독일인들이 90% 이상이었던 거주민이 크게 바뀐 것 같았다. 원래의 동네에서 상주인구와 유동인구가 다른 나라 사람들(외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로 바뀌다보니 동네의 분위기가  많이 바뀐 듯 했다. 백인, 흑인, 황색인종 등이 섞여 살다 보면 서로간의 동질감은 없어지고 배타적 마인드가 되고 코뮤니티의 화합과 발전은 안중에도 없어지고 각자도생에만 힘쓰고 제멋대로가 된다. 이것은 정반대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 섞여 살다 보면 서로간의 유대감이 떨어지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글로벌 시대가 되어 각기 다른 나라 사람들이 뒤섞여 살게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조만간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 속에서도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지구촌이라는 말처럼 세계인이 한가족이라는 마음으로 서로 돕고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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