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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Oct 15. 2023

아테네3.


  나플리오에서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이제 펠로폰네소스 반도와는 볼일이 다 끝난 것이다. 5년 전에 나플리오, 코린토스, 미케네를 보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고 뒤통수를 맞아 얼얼한 것 같은 느낌과 또 전혀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영역을 탐험한 것 같아서 신선한 충격도 느끼고 했던 그러한 일주일이었다. 미케네는 전에도 한 번 가봤었지만 여전히 놀라움과 찬탄과 감동의 연속이었고 에인션트 올림피아, 리메니, 미스트라스, 스파르타는 그야말로 경이로움과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고대의 그리스는 분명 현대와는 단절된 놀라운 세계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른 법칙과 인생관과 신관, 정신세계와 예술세계를 가진 사람들이었고 그 세계는 현대보다 훨씬 우월한 신비로운 세계였다. 그들은 우리보다 몇 배의 뛰어난 천재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몇몇 암호를 가지고 그들을 해독하려 하지만 그 세계는 영원히 우리에게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외계인들 만큼이나 우리와 다르다. DNA도 다르고 피도 다르고 머리속 회로도 다르다. 어쩌면 그들은 그들이 믿었던 신화 속의 신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여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내 곁에 다가왔다. 그것은 영원히 베일 속에 싸여서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겠지만 나는 그 그림자와 조그만 편린을 본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그 경이롭고 감동스러웠던 느낌은 내 머리 속에 오래 남아서 내 삶을 더욱 묵직하고 고요하게 인도할 것이다. 나는 내 눈으로 그 모든 것들을 볼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나플리오에서 버스로 도착한 다음에는 택시로 갈아타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이름과 주소를 말하고 10유로를 주기로 하고 택시를 탔는데 어림잡아 5유로면 충분히 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이번에도 조금 씁쓸했으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이 정도의 바가지는 그냥 관례라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내 정신건강에 좋으리라고 생각했다. 레오포로스 안드레아 시그루 거리에 있는 호텔은 썩 마음에 들었다. 깨끗했고 인테리어도 현대적이었고 침대 사이즈와 방 크기도 넓었다. 새로 오픈한 지 몇 년이 채 안된 새것 느낌이 났다. 다음날의 조식도 있을 게 다 있어서 대접 받는 느낌을 주었다. 호텔 창문에서 본 거리는 여태껏 보던 아테네의 거리와는 많이 다른, 관광지의 느낌이 아닌 상업지역의 분위기였다. 나는 그 풍경이 신기해서 자주 커튼을 열고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짐을 정리해 놓고 점심을 먹으러 나섰는데 어디가 좋을지 망설여졌다. 호탤에서 몇 걸음 오른쪽으로 걸어가니 국립현대 미술관(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피곤해서 나중에나 들어가 봐야지 했던 생각은 왠일인지 지켜지지 않았다. 고대문명에서 현대문화와 예술로 한 걸음에 건너뛰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내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거리를 두리번 거리며 걷다가 참신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던 우리는 5년 전에 아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는, 아크로폴리스 담을 끼고 있고 근방에서 제일 높은 언덕에 있는 식당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그리스 당국에서  폭염경보를 내리고 아크로폴리스를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 폐쇄한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일기예보상으로는 낮시간 최고기온이 41도이지만 언덕과 바위가 많은 아크로폴리스는 3~4도 정도 더 높은 기온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며칠 전부터 보도되기 시작한 남유럽의 폭염상태는 이 지구가 들끓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지구인들에게 환경오염을 경고하고 있지만 글쎄 우리 지구인들이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낼 수 있을까 나로서는 몹시 회의적이다.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오버투어리즘에 나 자신도 한몫하고 있는 처지로서 사실 아무 할말이 없으니 다음부터라도 조심하고 사양하겠다고 결심해야하나 싶다. 여행을 다 마치고 서울로 와서 그리스 산불 소식과 하와이 마우이 섬의 산불 소식을 들었을 땐 마음이 아프고 죄진 듯 해서 몹시 불편했다. 우리 남편 왈 “지구의 적은 인간이므로 인간이 멸망해야 지구는 비로소 되살아날 것”이라고 과격하게 말해서 남편이 많이 얄미웠지만 어찌 보면 또 한편으로 맞는 말이기도 해서 마음만 복잡해졌다. 지구와 인간이 평화롭고 따뜻하게 공존할 수 있기를 !!


  아크로폴리스 역에서 내려 슬슬 걸어서 아크로폴리스 출입구를 왼쪽으로 끼고 돌면서 좁은 골목에 가득한 기념품 가게들을 거쳐서 오르막을 5~6분 올라가면서 그 사이에 있는 골목 식당들을 애써 외면하고 끝까지 오르면 우리가 갔던 식당이 나온다. 그 식당에서 옛날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어서 다시 간 것이었다. 그리스 관광지에선 대형 식당에서는 식당 앞에 나와서서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꼭 하나, 둘 있다. 그 날도 한 사람이 서있다가 우리가 가쁜 숨을 쉬면서 올라가자 기다렸다는 둣 우리에게 손짓을 해 와서 우리가 앉을 의향을 밝히자 가장 좋은 자리로 안내를 해줬다. 남편은 오랜만에 램찹(양갈비)을, 나는 문어튀김과 사가나키(튀긴 치즈요리)를, 곁들여 차지끼를 시키고 렛치나를 마셨다. 주문 후에 아까 우리에게 자리를 안내한 직원이 한국인이냐고 물어왔다.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는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들을 구별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웃으면서 그 사람과 몇 마디를 더 나누었는데 그러자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벨기에에서 왔다는 여행객이 오, 한국인이세요? 라며 반색을 하는 거였다. 자기 딸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고 현재 한국에 가 있다며 제주도에서 찍었다는 휴대폰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 사람은 갑자기 한국인을 만나 딸 얘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약간 흥분한 듯 그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와 동행한 사람은 흑인여자였는데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으나 매우 차분하고 조신해 보였다.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국에 대해서 아는 체하는 여행객과 식당 직원과 즐거운 담화를 하며 맛있는 점심식사를 했던 오후가 그렇게 지나갔다.

  

식사를 마치고 탐스러운 부겐빌레아 꽃이 만발한 아크로폴리스 담벼락을 낀 골목길을 내려오다 보면 아주 옛날에 지어져서 이제는 다 쓰러져가고 있는 집이 코너에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옛날에도 그런 모습이었는데 지금도 변치않고 그대로다. 주변에 있는 집들도 오래되고 낡은 모습이니 유별나게 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왜 저렇게 놔두고 있는 것인지 좀 의아했다. 길을 끝까지 다 내려가서 다시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완만한 경사의 산책길을 올랐다. 하늘에 구름이 좀 껴 있어서 좀전보다 덜 덥게 느껴졌기 때문에 아크로폴리스에 들어가지 못하는 마음을 달래려 아레오파고스 언덕에 올라가 거기서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신전들을 건너다 보고 싶어서였다. 미끌미끌한 바위투성이인 그 언덕은 올라가기에 좀 성가셨지만 그리 높지 않아서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아테네에는 이 아레오파고스 언덕과 필로파포스 언덕, 리카베투스 언덕이 있는데 그 중 리카베투스 언덕이 제일 높고 정취가 있어서 사람들은 해질녁이면 그곳을 찾아 올라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풍경과 황혼의 하늘을 즐기면서 데이트를 즐기는 것 같다. 아레오파고스 언덕과 필로파포스 언덕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어서 관광객들이 빠트리지 않고 들리는 코스이며 여기도 저녁이면 일몰명소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또 이 언덕은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에게는사도 바울이 설교를 했던 곳으로 유명해서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꼭 들르는 장소이기도 하다 올라가는 입구 돌탑의 석판에는 사도행전의 귀절들이 새겨져 있다

아레오파고스 언덕은 ‘아레스신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전쟁의 신 아레스가 자신의 딸을 강간한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오스를 살해한 사건이 벌어지자 포세이돈이 아레스를 고발해서 그에 대한 재판이 열렸던 장소이다. 제우스와 신들이 모여서 최초의 살인 사건 재판을 다루었던 곳인데 신화와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에서도 종신귀족들이 모여서 막강한 사법권과 정치권력을 가지고 최고 법정 역할을 해왔던 터여서 오늘날에도 그리스에서는 대법원을  ‘아레오파고스’ 라고 부른다.


  그곳에 올라 아크로폴리스를 바라보면 아주 가깝게 프로필라이아(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입구, 신전처럼 웅장하며 6개의 도리스식 기둥이 있음) 니케 신전, 파르테논 신전 등이 보인다. 안타깝게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레크테이온 신전은 잘 보이지 않았다. 에레크테이온 신전은 에레크테우스와 포세이돈, 아테나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각각의 신들에게 바쳐진 부분이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어서 어찌 보면 통일성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이 신전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부분은 남쪽으로 튀어나온 발코니를 지탱하고 있는 6개의 카리아티드(Karyatid)들이다. 이 카리아티드는 여성모습의 조각상인데 머리로 지붕을 힘들게 떠받치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벌을 받는 모습을 상징화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여신상의 자태가 너무도 아름다워서 상징성과는 별도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듯 하다. 머리는 길게 땋아 늘여 양쪽에서 한 가닥씩 모아서 묶고 머리 위에는 화관을 씌운 듯, 납작한 동이를 인듯 하면서 그 위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윗옷과 치마의 주름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모습과 오른쪽 다리를 살짝 앞으로 내밀고 맨발을 드러낸 모습이 너무나 고혹적이고 아름답다. 도대체 이런 조각상을 만들고 기둥으로 써먹겠다는 발상은 누가 했을까? 그 심미적 창의력이 놀랍고 놀라울 뿐이다.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에서 헤로데스 아티쿠스 오데온(음악당)을 보면서도 또 저렇게 아름다운 음악당은 어떻게,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으로 지어졌을까 감탄과 부러움 속에 올려다 보았다. 산의 지형을 이용해서 원형 계단을 대리석으로 배치하고 중앙무대 뒷편의 들어오는 입구 쪽은 몇 층의 아치로 건축한 그 음악당은 조형미만으로도 얼마나 뛰어나고 아름다운지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기원전 2세기경에 이렇게 멋진 음악당을 지을 수 있었던 그리스인들이라니!!  그러고보니 7년전쯤인가 그 극장에 들어가서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스국립오페라단과 러시아출신 한국계 소프라노가 협연한 무대였는데 음악성이 뚸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여름 밤 야외음악당, 그것도 그리스 본토 아테네의 수천 년이 된 석조음악당에서 공연을 직접 보고 듣고 한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고조되었었다. 관객들은 대부분 그리스 사람들로 보였는데 야회복으로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도 많았고 수수하면서도 신경 쓴 듯한 옷차림을 하고 온 사람들도 많았었다. 일인당 단돈 20유로로 즐겼었던 화려한 여름 밤의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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