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에 4년만에 다시 왔다. 프랑크푸르트는 나와 남편이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을 보내면서 유학을 했었고 거기서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거의 9년을 살았던 도시이다. 우리에겐 마치도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처음 이 나라에 왔을 때 우리나라는 아직 개발도상국이었고 독일은 모든 것이 앞서 나가던 선진국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겐 문화충격이 꽤 컸었다. 모든 것이 신기하게 보였고 부러웠고 우리로하여금 왠지 모를 조바심을 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나라도 세계10위권의 어엿한 경제대국으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우리 또한 그동안 나이를 많이 먹어서 이 도시의 달라진 모습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많이 느끼면서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에 잠기게 된다.
나는 젊은 시절에 이 도시에 살면서 외로웠고 슬펐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었다. 앞날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이 항상 공존했고 해야할 일과 신경쓸 일, 다시 말해서 학업과 살림과 두 아이의 육아에 늘 지쳐 있었다.육아에 있어서도 외부로부터의 도움의 손길은 전혀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고국의 원조는 기대할 수 없는 처지여서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생계를 마련해야했으므로 나는 중간에 학업을 쉬고 한국상사의 지사에서 사무직 (Sekraetaerin )일을 하며 3년간 돈을 벌기도 했다. 그 후에는 남편이 독일 정부 장학금을 타서 일을 그만뒀으나 그때쯤엔 또 둘째까지 태어나서 결국은 학업을 완전히 마치지 못하고 Diplom 학위까지만 따고 돌아왔다. 남편이 목표로 했던 박사학위를 끝내자 나이가 너무 많아지면 국내에서 대학에 자리를 잡는데 어려움을 겪게 될까봐 서둘러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나의 학업은 거기서 중단되었고 한국에 돌아가 다시 계속하려던 계획은 여러가지 이유로 계획으로만 남았다.
그래서 독일, 특히 프랑크푸르트의 옛날 일을 생각하면 조금은 아쉬움과 함께 회한에 잠기게 된다. 그러나 4년전에 독일 땅을 다시 밟게 되자 그런 복잡한 감정은 씻은 듯이 없어지고 그저 다시 반가운 마음만 솟아 올라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마치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릴 적 옛친구를 우연히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고 해야할까? 내마음은 반갑고 설레고 눈물나고 신기함, 그 자체로 가득찼었다. 우리가 살던 동네와 매일같이 다니던 대학근처를 다 둘러보았는데 마치도 며칠전에 떠났던 곳에 다시 돌아온 듯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에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렇게도 고스란히 옛날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어서 이런 일이 도대체 가능한 것일까 오히려 내가 나를 진정시켜야 할 정도였다. 정신없이 돌아가며 휙휙 바뀌는 세상과 그렇지 않고 고요히 머물러 있는 세상이 각각 따로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몸으로 직접 체험한 셈이었다. Bockenheimer Warte(보켄하이머 바르테) 라는 전차정거장 모습도, 그 앞 세모진 코너에 서 있던 Commerz Bank(코메르쯔 은행) 모습도, 우리가 살던 기숙사에 가려면 내려야했던 Industrie Hof(인두스트리 호프) 정거장도 거의 변함없이 똑같은 모습이었다. 우리 기숙사와 아이가 다니던 Kinder Garten(유치원) 도, 큰 아이가 귀국하기 일년전에 입학했던 Grund Schule (초등학교)도, 동네 근처에 있던 Altenheim(양로원)도 다 그대로였다. 한가한 시간이 날때 아이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던 Nida(니다) 강도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알던 동네가 통째로 고이 잠자고 있다가 타임캡슐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양을 보니 참 기이했었다 시간을 뒤로 되돌려 옛날을 재현하면 꼭 그대로일 것 같았다. 하루가 다르게 무섭도록 변하는 세상에 살다가 모든 것이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인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4년만에 다시 이 프랑크푸르트에 오니 눈에 띄는 커다란 변화가 느껴졌다. 프랑크푸르트도 뭔가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옛날의 주택가들 모습은 변함이 없었지만 도심의 번화가에는 확실히 옛날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빌딩들이 높게 서 있었고 스카리이라인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로 지어진 빌딩들은 새것답게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이번에 다시 프랑크푸르트에 들리게 된 것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여행이 주목적이었고 그곳으로 가기 전 비행기 스케줄을 조정하다가 너무 시간에 쫓기듯 여행하기 싫어서 중간 기착지로 우리 살던 곳에 다시 가자 하는 마음으로 앞쪽에 4일, 뒤쪽에 3일을 끼워 놓은 것이기 때문에 프랑크푸르트 자체가 여행의 목적지가 아니었던 만큼 별달리 큰 설레임도 짜릿한 기대도 없이 평범한 마음으로 다시 보기를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옛날에 자세히 못 보았던 곳을 다시 한번 가서 새로운 마음으로 보고 또 옛날에는 미처 못 보고 지나쳤던 곳에 가보자 하는 심산이었고 추억여행 비스무리한 것을 해보고 싶었다. 4년전의 여행에선 프랑트푸르트에서 너무 짧게 이틀동안만 체류했으므로 뭔가 미진한 감이 남아 있었던 까닭이다. 자기 삶에 있어서 커다란 획을 그었던 중요한 삶의 현장에 다시 가 보고 마음을 정리하고 의미를 되새겨보고 추억에 잠겨보는 것은 누구라도 원하는 일일 것이므로.
프랑크푸르트에서 4일간 묵을 곳은 프랑트푸르터 메세(박람회장) 주변의 뫼벤피크(Moevenpick) 호텔이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내려 공항철도를 타고 중앙역에서 내리면 그 근처에 있는 곳이라서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그날 불운의 시작이었다. 계획대로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 내린 우리는 캐리어를 끌고 택시정거장에 가서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택시에 올라 탔다. 택시에 타서 운전기사에게 우리의 목표인 호텔 주소를 말하자 그는 크게 상심한 듯 '후'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가까운 곳에 가는데 뭐하러 택시를 탔어요? 거기라면 걸어가도 충분한데요" 라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우리는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렇게 가깝나요?" 라며 다시 물어봤으나 기사아저씨는 확고하게 그렇다고 하니 석연치 않긴 했으나 올랐던 택시에서 내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캐리어를 각자 하나씩 끌고 가방 하나씩을 어깨에 메고 중앙역 정문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게 왠일? 정문 앞은 높은 가림막에 둘러쳐져 공사중이었고 사람들이 겨우 지나다닐 좁은 공간만 남아 있었다, 그 좁은 곳을 캐리어를 끌고지나가려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악취가 코를 찔렀다. 나는 진저리를 치면서 코를 막고싶은 심정으로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갔다. 아니 중앙역을 이렇게 관리해도 되는건가? 나는 얼굴도 모르는 프랑크푸르트 시장에게 욕을 해주고 ‘똑바로 하세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확실히 이런 것과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가 management가 잘 돼 있는 나라라는 것을 역으로 느낄 수 있다. 중앙역을 나가서 큰 길을 따라 가다가 옆길로 두 블럭쯤 들어가서 조금 찾아보면 되겠지 요량을 하며 짐을 끌고 거리를 기웃거렸으나 왠일인지 호텔은 보이지 않았다. 부킹닷컴으로 호텔을 예약한 터여서 거기 나와 있는 주소와 희미하게 그려진 약도에 의하면 필시 그 자리쯤에 있어야 하는데도 호텔의 모습은 오리무중이었다. 그 지도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다. 택시만 타면 호텔 앞에 그대로 당도하겠지 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이쯤되니 택시 운전자에개 승차거부를 당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자꾸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우리가 프랑크푸르트에 살았다고는 해도 이 박람회장 주변은 우리 생활반경이 아니었으므로 그부근의 지리는 우리에게도 생소했을 뿐더러 그쪽에 유난히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 많아서 완전히 새로운 곳이나 다름없었다. 쉽게 생각한 것이 화근이었다. 더우기 그곳은 박람회장 주변이라 블럭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커서 한 번 길을 잘못 들면 돌아나오는데 거의 5-6분 정도가 소요됐고 그러다보니 20분 정도가 지나자 더위에 약한 나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캐리어를 끄는 손에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눈치 챈 남편이 어디 의자에 가서 앉아서 기다리라고 제안을 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이 다시 택시를 잡아 보자고 했지만 남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기가 발동했는지도 모른다. 할 수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전차정류장을 발견하고 (아직도 시내에 전차가 다니고 있다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쪽 의자에 앉아서 남편 혼자 호텔을 찾고 나는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지만 예상을 한참이나 넘어서 초조감의 절정을 지나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남편이 나타났고 우리는 헉헉거리며 호텔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쪽 지역은 박람회장 근처라서 보통의 주택가하고는 달리 길 하나가 너무 길었고 격자형의 길도 아니고 휘어져서 이상하게 생긴 길이 많았다. 그 호텔은 특이하게도 매우 짧은 길 안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우리는 그 부근을 지나치면서도 뱅뱅 돌다가 헛걸음만 무수히 한 탓이었다. 호텔 하나 찾느라고 이렇게 고생을 하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에 어이가 없고 황당하고 스스로에게 화가 나는 심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호텔에서 방 키를 받고 올라가서 짐을 대충 정리하고 나니 거의 여덟 시가 다 되어 있었다. 식욕이고 뭐고 없었지만 그래도 배를 완전히 곯고 잘 수는 없는 일, 우리는 호텔 밖으로 나와 바로 건너편의 커다란 쇼핑몰로 식당을 찾아나섰다. 그런데 왠만한 가게, 식당, 카페 등이 이미 문을 닫고 불이 다 꺼진 상태였다. 맞다, 독일에선 특별한 곳이 아닌 한 저녁 7시면 모든 가게의 문이 닫힌다는 것이 그때서야 다시 기억이 났다. 하는 수 없이 건물 내를 빙 돌고 다시 입구로 나오니 들어설 때 보았던 푸드 트럭이 아직 서 있었고 반갑게도 맛있는 냄새를 솔솔 풍기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고 뭐고 없이 우리는 푸드트럭 앞으로 다가섰다. 메뉴는 토핑만 각기 다른 햄버거 하나 뿐이었다. 나는 남편과 같은 걸로 "Mama's original" 햄버거를 시켰다. 거리 음식치고는 만만치 않은 가격인 8,5유로에다가 제로콕 콜라가 2,5유로, 일인당 11유로의 햄버거는 꽤 먹을만 했다. 우리는 4년만에 다시 찾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2번의 불운을 당한 뒤에 비로소 맛있는 음식을 배속에 넣은 뒤에야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