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하이델베르크

by olive

셋째 날은 하이델베르트에 가기로 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당일치기 여행으로 제일 갈 만한 곳이 하이델베르크이기 때문이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좀 느긋하게 나서 중앙역에 가니 벌써 10시 반이 되었다 제일 빠른 기차표를 사니 11시 기차였고 수 년만에 독일에서 다시 기차를 타는 것이라 설레임도 살짝 느꼈다.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길에 차창밖으로 줄곧 독일 중소도시들과 시골마을이 이어졌지만 특별히 별다른 점은 눈에 띄지 않고 너무너무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해서 성까지 택시를 탈까 어쩔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걸어서 기껏해야 30분 정도이니 가면서 거리 구경도 할 겸 하이델베르크를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약 40 년쯤 전에 우리가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동안에도 하이델베르크에 온 적이 있었으나 그때는 기차가 아니고 자동차로 다른 일행과 같이 왔기도 했었고 큰 아이가 겨우 걷기 시작하던 때라 유모차를 끌고 다녔기 때문에 뭘 봤었는지 별로 기억이 안 난다.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에게 집중하느라 반은 내 정신이 아닐 수밖에 없었다.


하이델베르크 기차역에서 20분쯤 걸어 밋밋한 시가지를 지나니 오래된 구시가지가 나타났다. 하이델베르크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는 도시로서 도시 규모가 크지 않고 중세 때 지은 성과 교회, 집들이 어우러져 있어서 본격적으로 구시가지(올드 타운)로 들어가면 한 순간에 시간이 몇 백년 전으로 옮겨 간 듯 기이한 느낌을 받게 된다. 고성으로 가기까지 큰 길 하나가 이어지며 그 길들에는 여느 관광도시들처럼 기념품 가게들과 식당, 카페, 크고 작은 생필품 가게들이 빽빽이 자리잡고 있고 사람들은 거기서부터 약간의 흥분된 얼굴들이다. 소비를 부르는 가지 각종의 물건들이 길 양옆에서 빨리 들어와 보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엄마 아빠의 양손에 붙잡힌 아이들은 벌써 무슨 장난감 아니면 주전부리, 아니면 아이스크림 등을 손에 들고 행복한 얼굴들이다.


시간이 거의 두 시가 가까웠으므로 우리도 뭔가 먹어볼까 해서 사람들이 가득가득 앉아 있는 식당들을 두리번거리면서 걸어가다가 결정을 못 하고 수많은 식당들을 지나치고 나서야 겨우 한 터키 식당으로 들어갔다. 다른 손님들은 다들 식당 앞의 거리에 놓여있는 바깥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거기에 자리가 없어서 우리는 가게 안으로 깊숙히 들어갔다. 안에는 늙수구레한 터키 아저씨들이 3명이 앉아서 터키식 홍차를 마시고 있었고 분위기로 보아 아주 오래된 친구들 같았다. 몇십 년 이상된 친구 사이라면 그들은 아마도 30~40 년 전에 외국인노동자(Gast Arbeiter) 신분으로 들어왔다가 옵션 기간이 지나서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식당이나 가게 등을 하면서 눌러 앉아 살게된 케이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몇십 년 전에 여자들은 간호원으로, 남자들은 광부로 들어왔다가 주저앉아 살게된 교포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런 분들은 남달리 생활력이 강해서 아주 잘 적응해서(integrated)살고 계셨다. 그런데 그들 중 내가 아는 몇 분은 이미 고인이 되셨다. 나는 터키 아저씨들로 인해서 떠오른 오래전의 기억으로 어쩐지 숙연한 기분마저 들었다. 터키식 식사는 꽤 괜찮았고 다리도 좀 쉬고 배도 불러지자 다시금 걸어갈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하이델베르크 구도심(Altstadt)과 고성(Schloss)에는 수 백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있다. 과거의 풍경들을 그려놓은 어떤 그림 속으로 실제의 내가 들어간 듯한 착각을 느끼게 만든다. 이곳엔 아예 새로운 건물을 지을 수도 없이 옛 건물들을 고쳐나가며 살고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초라하거나 낡고 빈한한 모습이 아니고 동화속의 풍경 같기도 하면서 엄숙한 아름다움이 스며나오고 있어서 나 같은 사람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말수가 적어지게 만든다.

고성까지 올라가려면 꽤 비탈진 길을 내 걸음으로 20분쯤 걸어 올라야 했으므로 나는 후니쿨라를 타기로 했다. 입장권을 사서 조금 기다리니 바로 차례가 돌아와 후니쿨라에 탈 수 있었다. 기계의 덕분으로 순식간에 손쉽게 올라온 우리는 고풍스러운 큰 성문을 지나서 곧바로 커다란 술창고를 향해 발을 옮겼다. 지하에 자리한 이 술창고와 술통은 정말 너무나 거대해서 술통이라기 보다는 조그만 집 한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자그마치 22만 리터의 와인을 저장하고 있다 했다. 그 술통을 보니 옛날에 봤던 ‘황태자의 첫사랑’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뮤지컬로도 제작되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그 뮤지컬 속 마리오 란자가 부른 “드링크, 드링크, 드링크, 드링크~~”라는 노래는 너무나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을 아름다운 환상 속에 몰아넣은 바 있다. 그 영화의 바탕이 되었던 희곡 “알트 하이델베르크”가 바로 이 하이델베르크 성을 무대로 한 것이었으니 이 하이델베르크 성이라면 그 정도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깃거리가 탄생하고도 남을 충분하고도 넘치는 장소였다고 할 수 있겠다.

하이델베르크 성은 1225년대에 지어진 후에 1537년 낙뢰로 인한 손실을 크게 입고나서 처음의 자리에서 조금 내려온 산 중턱에 다시 지어졌으며 30년 전쟁과 그 이후 이어진 프랑스와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고 그후에도 화재로 인한 파괴 등 수많은 고난을 겪은 후 2차 대전 후 복원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그런데 부서져내린 성벽과 폭발로 무너진 화약고는 그대로 놔두어서 옛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모습이 우리와 다른 방식이다. 그래서 군데군데 허물어진 모습으로 있는 과거의 흔적이 더욱 애틋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지도 모른다. 웅장하면서도 고색창연하고 묵직하고도 오밀조밀한 모습의 하이델베르크 성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이유이다.

하이델베르크를 얘기할 때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빼놓고는 불가능하다. 그만큼 대학은 하이델베르크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하면서 그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386년에 건립되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라는 수식어에 못지않게 그곳을 거쳐간 인재들 또한 대단하다. 독일철학의 거장들인 헤겔이 이곳에서 교수를 지냈고 야스퍼스도 1938년 나치정권에 의해 교수직을 박탈당할 때까지 이곳에서 재직했다. 심지어 괴테도 이곳에 와서 금지된 사랑으로 만년을 불태웠으니 독일의 지성들에게 하이델베르크가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비블리오테카 팔라티나(Bibliotheca Palatina) 라는 당대 최고의 도서관을 갖추고 있었고 많은 지성들을 키워낸 지성의 성지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1848년 칼 막스의 공산당선언이 발표되면서 대학은 또 공산주의 사상의 거점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 프로이센군에 의해 철저하게 분쇄당했다. 여담이지만 이 대학에는 우리나라 유학생들도 많아서 내가 아는 독일 유학파의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 대학 출신이다


성 위의 발코니에서 내려다 보이는 하이델베르크의 시내 모습 또한 아름답기 그지 없다. 시내를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는 네카강 위에 몇 개의 다리들이 걸쳐져 있고 그 양 옆으로 펼쳐져 고요히 자리잡은 오래된 건물들과 교회와 집들의 모습은 그냥 한 폭의 그림이다. 동화 속의 마을처럼 포근하고 예쁘고 서정적인 그 모습이 너무나도 마음에 와 닿아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오래도록 지켜보게 만들었다. “하이델베르크에는 이 고성이 있고 그 아래 작은 도시가 있으며 옆에는 네카강이 흐르고 그 위엔 다리들이 있다” 결론처럼 나에게 떠오른 이 말은 평범한 말이지만 자꾸 이것을 중얼거리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내려갈 때는 걸어서 가기로 했다. 타박타박 조심조심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보이는 길가의 집들과 길들에는 오래된 것들에게서 풍기는 묵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분위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밑으로 다 내려간 다음에는 강가로 발길을 돌려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한 여행자라면 다 한 번쯤은 걸어보았을 칼 테오도어 다리 ( Karl Theodor Bruecke )위를 건너갔다. 건너편 기슭의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 로 가기 위함이었다.


이 철학자의 길은 옛날에 40년전에 왔을 때는 멀리서 바라다만 보고 직접 가보지는 못했다. 무엇보다도 유모차에 탄 아기를 같이 데리고 왔기 때문에 언젠가 다시 오리라 다짐만 하고 아쉽게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번엔 떠날 때부터 여기에 꼭 와보리라 생각했기에 지나칠 수 없는 장소였다. 다리를 건너가니 바로 눈앞에 철학자의 길 안내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길은 사람 혼자 지나갈 수 있을만큼의 매우 좁은 길이어서 위에서 내려오는 누군가와 마주치면 어깨를 옆으로 하고 지나갈 때까지 멈춰서야만 할 정도였다. 작은 돌들로 쌓아놓은 돌담이 올라가는 길 내내 이어졌고 그 옆으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풀과 나무들, 과일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길이 가팔라서 나는 몇번이나 멈춰 쉬면서 숨을 고른 다음 올라가야만 했다.


이 길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재직했던 수많은 유명한 철학자들이 걸으면서 산책하고 명상하고 영감을 얻고 생각을 다듬어 자신의 사상을 구축해 나가면서 걸었던 길로 유명하다. 그래서 길의 이름이 ‘철학자의 길’이 되었던 셈이다. 야스퍼스, 헤겔 등이 그에 속하는데 아마도 그들 중 몇 명은 이곳에 직접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가파른 길을 올라간 다음에 이어지는 너른 신작로 양옆에는 저택이라 할만한 큰 집들이 중후한 멋을 뽐내고 있고 그쪽에서 바라보이는 강 저쪽의 뷰도 기가 막히게 좋아서 철학자들이라면 그런 뷰를 탐내며 이쪽에 거처를 마련할 욕심을 가져보았으리라 생각되었다. 독일 사람들의 중요한 일상 중의 하나인 ’산책하기‘는 비단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애게도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이 산책로는 하이델베르크에 사는 모든 시민들에게 마음의 안식처 역할을 했을 것 같다.

내려가는 길은 차도 다닐 수 있는 넓은 길로서 띄엄띄엄 서 있는 큰 저택들과 정원의 나무들, 길의 완만한 경사 등으로 인해 이것 저것 구경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걸어갈 만한 길이어서 쉬웠다. 그런데 내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나서 그 다음부터는 걷는 것이라기 보다는 발을 끌어서 겨우 몸을 움직여간다는 표현이 맞을만큼 혀를 빼물고 연신 부채를 부쳐가며 간신히 역까지 걸어가면서 하루 온종일 부려먹은 내 다리에 대한 댓가를 톡톡히 치를 수밖에 없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