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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우 Sep 26. 2023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202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 시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야 

엉망으로 구겨진 얼굴, 머리카락을 커튼처럼 늘어뜨리고 얼굴을 가려 봐 이 거울은 흉한 것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 날 거야 터무니없이 지긋지긋한 행복은 뭉개 버려 어쩌다라는 말 뒤에 붙은 운 따윈 내겐 오지 않았어 내 목소리만이 내 슬픔을 위로할 뿐이야 어느 날 문득 첫눈처럼 너는 뜻밖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지 맹지여서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는 곳처럼 오랫동안 거기 서 있었어 너의 다정한 눈빛, 편협한 단어 몇 개로 단꿈을 꾼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너는 나를 얼마나 알까 내 진짜 얼굴을 보지 못한 너의 선택을 탓하지 않을게

 

내가 유일하게 보는 색깔은 검정이다

유리조각이 내 모든 것을 찌른 후, 내가 기억하는 건 입술의 붉음, 카펫의 파랑, 눈꺼풀 위에 떨어지던 하얀 햇살뿐이다 새소리가 들리던 아침 책을 읽어 주는 너의 낮은 목소리에 슬픔이 들어 있었다 난 이불을 덮어쓰고 숨을 죽이다가 고함을 질렀다 참을성이 좋은 너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흰건반을 누르는 네 손을 만져 보고 싶었다 차가운 네 손가락 끝에서 마왕의 망토 자락이 만져지고 놀란 화병이 소리치며 깨졌다 이젠 목소리만으로 너를 찾을 것이다 너 거기 있는 거 맞지 얼음송곳을 쥔 손아귀가 떨리고

 

숲의 새들이 푸드득 햇살을 물고 사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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