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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담 Feb 09. 2024

마감이 없다면

20호_건축과 마감_특별잡담

당신은 마감이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마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 마감이 스스로 정한 것이든,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것이든 말이죠. 그리고 가끔 당신은 ‘마감이 없었으면 좋겠다.’던가, ‘마감이 미뤄졌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감이 없는 삶을 종종 상상하곤 합니다. 마감이 없으면 마감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고, 많이 자기도 하며 행복할 것입니다. 마감이 없이 설계를 한다면 수많은 경우의 수들을 천천히 많은 시간을 들여 분석하고, 최고의 대안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감이 없으면 왠지 더 멋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조금 더 완성도 있게 패널과 모델을 만들고, 발표도 완벽하게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마감이 없으면 타인의 강요가 아닌 나의 의지로 프로젝트를 해내는 주체적이고 멋진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죠. 



그런데도 마감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죠. 마감이 없었다면 지금, 이 순간 글을 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일 해야지, 시간 많을 때 여유롭게 해야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미뤘을 수도 있죠. 지금도 미루다 미루다 마감 전에 급하게 글을 쓰고 있고요.


또한, 위에서 상상한 마감이 없는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현실성이 없다고 느끼며 다시 한번 마감의 필요성을 깨닫기도 합니다. 마감이 없으면 여유롭게 살 수 있지만, 어떤 성과를 내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고, 많이 자기도 하는 삶에 마감이 없다면 하기 싫은 공부는 영원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개인적인 발전의 속도가 느려지겠죠. 설계를 할 때도 최고의 대안을 선택하기 위해 분석만 하면 선택을 계속 미루게 될 것이고, 설계 속도가 현저히 느려질 것입니다. 계속 미루다가 결국 선택을 하지 못할 수도 있죠.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연구하여 심리적 요인이 행동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는 행동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데드라인 이펙트(Deadline Effect)’, 우리말로는 ‘마감효과’라고 설명합니다. 마감효과는 마감일이 동기를 자극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감이 여유롭게 남았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마감 직전에 가서야 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이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매주 마감효과를 경험해보고 싶다면 건축학과에 오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주 2회로 진행되는 설계 수업의 과제를 매번 수업 하루 전 저녁에 시작해 밤을 새우고, 수업 시작 전에 과제는 제출하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설계 수업이 끝난 날은 수업이 끝났기에 놀고, 다음 날은 수업 날까지 많아 남았기에 놀고, 그다음 날은 내일의 내가 하면 된다며 놉니다. 그렇게 설계 수업 하루 전날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매주 이런 경험을 하는 건축학도는 마감일이 동기를 자극하는 마감효과의 대표적인 예시가 되기에 너무 적합한 것 같습니다. 



‘마감효과’를 뒤집어봅시다.


마감이 없다면 우리는 동기를 자극받지 못해 결국 일을 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조금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뒤의 사례를 보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심리학자 아모스 트버스키와 엘다 샤퍼는 실험을 통해 마감이 없다면 일을 해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실험에 참가한 대학생들에게 설문지를 나눠주고, 이를 작성하면 5달러를 준다고 했습니다. 실험에 참가한 대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에는 제출 기한을 정해주었고, 다른 그룹은 제출 기한을 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이때 제출 기한을 정해준 그룹은 66퍼센트가 설문지를 제출했지만, 제출 기한을 정해주지 않은 그룹은 25퍼센트만 제출했습니다. 이를 통해 마감일이 없다면 일을 수행할 확률이 낮아진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위에서 이야기한 건축학도의 마감효과 예시를 뒤집어봅시다. 건축학도에게 매 수업마다 제출해야 할 과제의 마감이 없다면, 동기를 자극받지 못해 과제를 제출하지 못할 것이고 그에 따라 설계가 진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마감이 있을 때는 2개의 프로젝트를 했을 기간 동안 하나의 프로젝트도 완성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설계 실력이 지금보다 더 안 좋았을 것입니다. 지금 실력도 정말 별로인데, 이것보다 더 별로라니. 마감의 중요성을 한 번 더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중요한 마감을 잘 지키기 위해서 마감 일정을 잘 설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벼락치기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죠. 여러분들은 벼락치기를 해도 과제를 다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터무니 없는 생각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그 생각이 어떠한 법칙으로 증명되어있습니다. 바로 ‘파킨슨의 법칙(Parkinson’s Law)’이죠. 파킨슨의 법칙은 일의 양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한도까지 늘어난다는 법칙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어려울 수 있어 파킨슨의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편지를 쓸 시간이 10분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10분 안에 마칠 것이다. 만약 4시간이 있다면 4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제 완벽히 이해가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벼락치기를 해도 과제를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겠죠. 파킨슨의 법칙에 의하면, 마감까지 2시간이 남았다더라도 과제를 2시간에 마칠 수 있기 때문이죠.


설계 마감 때 파킨슨의 법칙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다. 설계 마감을 빨리하고 쉬기 위해 작업을 일찍 시작했었습니다. 그래서 설계 마감일보다 2일이나 일찍 대부분의 작업을 끝냈습니다. 그러나 작업물을 제출하지는 않고, 계속해서 수정을 했습니다. 결국 마감일까지 작업을 하다가 최종 제출을 했습니다. 일찍 시작했지만 결국 작업은 마감일까지 한 것이죠. 반면 설계 마감을 일찍 시작하지 못했을 때는 시간이 별로 없다며 불안해하면서도 작업을 다 끝내고 마감에 맞춰 작업물을 제출했습니다. 늦게 시작했지만, 마감을 맞춘 것이죠. 일찍 시작하던, 늦게 시작하던 마감을 맞출 수 있다는 건축학도의 파킨슨 법칙이라고 볼 수 있죠. 


마감이 이렇게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더라도, 여전히 마감이 없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마감은 우리에게 많은 불안감과 부담감, 스트레스를 주기도 하니까요. 마감 직전에 가서야 일을 해낸다면 마감 직전까지 스트레스를 받겠죠. 설계 마감을 일찍 시작해도 마감에 대한 불안함은 계속 느끼기 마련이니까요. 그럴 땐 빨리 제출해버리는 건 어떤가요? 이러면 그나마 마음이 괜찮더라고요. 빨리 제출해서 마감을 없애버리는 거죠.


참고문헌

정경수. (2022). 행동심리학으로 증명된 ‘마감 효과’와 ‘생각의 습관’. 



  


게재 : Vol.20 건축과 마감, 2022년 겨울

작성 : 프로잡담러 L | 조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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