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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BE Aug 24. 2023

08 엄마, 난 초록이 참 좋더라

대학시절 청량함을 머금은 커밍아웃 03


08 엄마, 난 초록이 참 좋더라


초록색을 좋아하는 것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일까


엄마는 가끔 내 어린 시절 모습들을 들려주었다. 그 때면 빠짐없이 했던 말이 있다. 


- 넌 어린이집 선생님한테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얘기를 그렇게 했다? 그전 날 공주 만화를 보여주었는데, 그걸 선생님한테 조잘조잘 말을 했어. 선생님이 어찌나 오밀조밀 말하는 것이 귀엽다고 하던지 아직도 다 기억이 나.



5살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디즈니 프린세스 애니메이션인 잠자는 숲 속의 공주였다. 악역인 말레피센트가 등장할 때면 초록색 아우라가 그녀의 테두리를 감싸는 것이 참 좋았다. 내가 접해 본 초록색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햇빛에 반사되는 나뭇잎의 쨍하고 청량한 느낌과는 달리 말레피센트를 감싸는 초록색은 음산하고 스산했다. 그게 묘한 끌림이 있었다. 또 그녀가 마법으로 사용하는 불꽃은 특이하게 초록색이었다. 가스레인지에 피어나는 가스 불이 파란색인 것도 이해하지 못하던 나이였는데, 불이 초록색으로 묘사된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정작 주인공인 오로라 공주는 영화에서 18분 밖에 등장하지 않는 것도 - 공주보다 마녀가 더 끌린다는 것도 그 당시 모든 게 신선했고 신세계였다.


물론 위의 감상평들을 어린이 집 선생님한테 얘기하지는 못했다. 아마도


- 선생님 이짜나요. 마녀가. 불을 쓰는데. 초록색이에요. 이짜나요. 그리고. 왕자랑 싸워서. 져요. 그리고. 공주가요. 드레스 색깔이. 분홍색. 파란색. 변해요. 재밌죠?


식으로 어린이들 특유의 말버릇인 이짜나요와 접속사 그리고를 단어마다 반복하면서 말했을 것이다. 또 내 감상평을 들은 선생님한테 ‘재밌죠?’라며 공감을 바랐을 것이다.


엄마가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들려줄 때, 나도 어떤 장면들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5살 아이는 영리한 강아지 취급을 받을 때가 있다. 어른들의 말들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아이를 앞에 두고 아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주인공으로 두고 선생님이 엄마와 통화하던 장면이 기억난다.


- 아이가 귀엽기는 한데, 일반적인 남자 애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보통 또래 아이들은 전설의 용사 다간과 같은 로보트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에요. 댁의 아이는 … 여자 아이들과 어울리고, 공주 얘기만 좋아하네요. 로보트를 갖고 놀지는 않고요.


선생님의 말은 염려인지 오지랖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이후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좋아하는 내가 이상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선생님한테 내 어린이집 생활을 들었음에도 구태여 내 귀에 들리게 말하는 일이 없었다. 좋아하는 걸 좋아하게 내버려두었다. 퇴근길에 아빠한테 비디오 가게에 들러 ‘아들이 좋아하는 영화 대여해 와 줘, 여보.’라며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비디오를 대신 부탁을 해주기도 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남들도 좋아하게 하는 일이 쉬운 일인 줄 알았다. 자연스럽게 보고 느낀 좋았던 것들을 주변에게 말하는 걸 좋아했다. 이렇게 좋은 걸 놓치는 사람들을 불쌍해했다. 그래서 열심히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줄거리를 주변에 말하고 다녔다.


선생님을 비롯해 내 옆에 있는 짝 그리고 놀이시간에 같이 보드게임을 하게 된 친구들한테까지 모두 말하고 다녔다. 선생님은 또래 동성과 다른 나의 모습에 대해 뒷이야기를 했지만, 직업 정신이 투철하여 앞에서는 열심히 경청하였다. 그리고 여자애들은 나의 말들에 공감하며 같이 열 띈 토론을 했다.


때론 여자 애들과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백설공주가 더 예쁘다. 아니다. 인어공주가 더 예쁘다. 아니다. 오로라가 최고다.라는 식의 논쟁이었다. 그 논쟁을 통해 다른 공주들의 매력들을 알아가기도 하고, 또 새로운 공주의 존재를 알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반 남자아이들과는 늘 마찰이 생겼다. 본인들은 공주 영화를 본 적도 없고 흥미도 없다는 애들이 많았다. 말을 해도 소 귀에 경읽기처럼 관심이 없는 남자 애들과 말하기를 점점 줄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작은 사회는 여자 애들로만 채워지기 시작했다. 공주 이야기를 비롯해 작은 취향들을 공유하고 생각들이 오고 가며, 나는 여자아이들과 비슷한 사고와 취향을 지닌 남자아이로 자라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여자/남자아이가 좋아하는 취향의 경계가 조금씩 더 명확해졌다. 그리고 각자의 바운더리에 어긋나는 것들을 보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남자아이들은 내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좋아하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그 의문은 곧 ‘이상함’이란 결론이 되었고, 나의 취향을 바꾸고 싶어 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내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남들도 좋아할 줄 아는 착각에 살고 있던 것처럼 - 다른 아이들도 자신의 취향에 맞춰 나를 요리하고 싶어 했다.


- 야 공주들은 여자애들이나 좋아하는 거야. 너도 로보트 좋아해야 해.


- 난 로보트는 싫은데….


- 로보트가 얼마나 재밌는 데.


- 왜?


- 그건 말이야. 로보트는 건물도 부수고, 네가 그 안에 들어가서 조종도 할 수 있어. 얼마나 강하다고!


- 그게 재밌어?


- 아무튼 공주는 여자 꺼고 남자는 로보트 좋아해야 해. 이거 보면 재밌어.


이런 식의 대화는 나를 옥죄는 느낌이 들었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말하는 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과 다른 취향을 갖는다는 것. 무리에 배제된 다는 것이 나를 사회적으로 고립시켰다.


이따금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로보트를 보기도 하고, 관심 없는 게임들도 조금씩 해보았다. 2살 터울 형이 갖고 노는 장난감들을 따라서 갖고 놀고, 어떻게 해서든 흥미점을 찾아냈고, 친구들과 말할 건더기를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애써도 두 가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좋아한다는 것과 내가 남자라는 사실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로보트는 좋아할 수 없었고, 그 이유로 여자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좋아하는 남자일 뿐이었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나의 취향은 두 사실에 인과 관계를 만들어가며 사실들을 왜곡해 갔다.


언젠가 발표를 했는데, 같은 모둠에 있는 아이가 맥락 없이 “선생님. 얘는 하리수예요?”라고 질문했다. 그 말로 인해 반은 뒤숭숭 해졌다. 모두가 나를 처다 보았다. 그리고 뜬금없는 이목에 내 몸은 굳었다. 반에 있던 다른 무리들은 내가 약해져 있는 틈을 타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 맞아. 쟤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좋아해.


- 목소리도 얇아서 여자 같아.


- 글씨도 예쁘게 쓰는 거 보면 하리수 아니야?


- 어제 축구 시간에 여자애들이랑 운동장에서 공기놀이 했어.


- 맞아 하리수야.


선생님은 나를 자리에 앉히고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건 급한 불을 껐을 뿐, 그 시간 이후에 나는 반에서 하리수가 되어있었다. 모든 수업 시간마다 아이들은 나를 타깃 삼아 주목 했고, 하리수라고 놀리는 것을 하나의 놀이처럼 만들어갔다. 뭐가 그렇게 좋다고 낄낄거리던지 모두가 낄낄거렸고, 나는 사색이 되었다. 아니라고 몸부림칠수록 아이들은 광기 어린 눈빛을 지으며 더 큰 소리로 하! 리! 수! 를 연신 외쳤댔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복도를 걸어갈 때면 여자 화장실에 왜 안 들어가냐고 낄낄댔다. 화장실에서 바지를 내려 쉬를 쌀 때면 ‘꼬추는 있냐.’라며 내 성기를 보려 했다. 민망함에 소변기에 내 허벅지를 더 붙여가며 볼 일을 보았다.


아이들이 나를 하리수라고 놀릴수록 나는 모순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좋아하고 여자 아이들과 취향이 비슷하다면 성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 자명한 진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 하리수라고 놀림을 받기 싫었지만, 하리수가 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여자들만 할 수 있다면, 난 여자가 되고 싶었다.


하리수라고 놀림받은 날이면 기분이 하루종일 우중충했다. 때로는 누워서 잠만 자기도 했고, 치토스를 와구와구 먹기도 했다. 어느 날은 의욕 넘치게 남자아이들이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을 앉아서 꾸역꾸역 보기도 했고, 어느 날은 형한테 찾아가 흥미 없는 스타크래프트 얘기를 억지로 듣기도 했다. 그리고 꼭 그런 때면, 새벽에 네이버 지식IN에 검색했다. 하리수. 트랜스젠더. 성전환. 등등.


내가 트랜스젠더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넘치고도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좋았고. 머리를 길러 방울 머리로 찰랑 거리고 싶었고. 솔직히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리를 꼬고 가랑이 사이로 성기를 집어넣으면 자연적으로 여자가 될 거라는 믿음을 갖고 행동하기도 했다.


매일 같이 지식IN에 검색해 보며 내가 트랜스젠더가 되어야 하는 이유와 그 위험성을 찾기 시작했다. 트랜스젠더는 가랑이 사이에 고추를 집어넣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환을 적출해야 했고, 성기를 반으로 잘라 안으로 밀어 넣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통증이 엄청나다고 했다. 또한 실제 여성의 성기와 달라 아이를 갖지도 못한다고 했다. 겉보기에 여자와 유사한 사람이 될 뿐 생물학적으로 여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자 아이들과 취향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런 위험성을 감내해야 하는가? 하는 여러 가지 의문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남자인 내 모습이 싫은지 나 자신에게 물었다. 비록 체리필터의 낭만고양이를 원키로 지르고 싶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사람이 되고 싶고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남자인 나 자신이 좋았다. 몇 가지 취향 때문에 내 성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쉬를 쌀 때 앉아서 싸는 것은 죽어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 그래, 하리수 같은 사람은 트랜스젠더야. 나는 여자 같은 취향을 지녔지만,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




학년을 거듭할수록, 내 성정체성에는 조금씩 꼬리표가 붙기 시작했다. 그 시기 즈음부터 동급생 아이들은 나에게 하리수라고 부르기를 멈추고, 트랜스젠더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그러나 나는 타격이 없었다. 나는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아이들은 나의 무반응에 재미없어졌다는 듯 새로운 타깃을 삼아 놀았고, 나는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들은 성에 눈을 띄기 시작했고, 새로운 용어들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 난 민영이가 예쁘던데, 넌 누가 좋아?


- 난 딱히 없어.


- 너 게이 아니야?


나는 여기서 ‘좋다’라는 말이. 단순히 프린세스 애니메이션과 로보트 사이에서의 좋고 별로고의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호불호에 대한 얘기였다.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시기부터 남자를 좋아했다. 나를 놀리는 남자 애들이 죽도록 싫었지만, 그 틈 사이에 초록색 로빈후드 모자를 쓴 백마 탄 왕자처럼 선량이 나를 구주해주는 구원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좋았다. 그리고 TV에서 나오는 누군가를 보듬아주는 듬직한 남자들이 좋았다. 그것이 내가 여자애들과 공기놀이를 하며 느끼는 좋음과는 차이가 있었다. 뭐랄까. 더 야릇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트랜스젠더는 아니지만 게이라고 나 자신의 꼬리표를 나 스스로가 붙였다. 물론 남들 앞에서는 그 꼬리표를 얼른 떼내었다.)


나는 여자애들과도 친했기 때문에 그날 이후에 같은 질문을 받으면 나랑 친하게 지내는 애들 중 가장 여리여리하고 예쁘게 생긴 애의 이름을 댔다. 대중적으로 좋아하는 대중픽을 말했달까. 남자 애들 취향에 어긋난 외모의 이름을 대면, 나는 또 다른 의심을 사기 때문에 그랬다.




또다시 시간은 흘러 나의 학년은 바뀌어갔고, 그럴수록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좋아한다는 말도,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도 숨겨가며 학교 생활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늘 내 또래의 남자 애들이 좋아하는 것과 달랐기 때문에 항상 조심했다. 특히 누군가가 뭐 좋아하냐는 질문을 한다면, 뭉뚱그려서 대답해야만 했다. 가령 걸그룹을 좋아하는 거면, 단순히 노래 듣는 걸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식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성적 취향과 연관될 수 있는 작은 건더기들을 제거하며 대답했다.


이어서 혹여 누군가가 어떤 노래를 추천해 달라며 내 MP3를 가져갈 때면 - 내가 걸그룹을 좋아하는 걸 들킬까 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했다. 걸그룹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겠지만.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대답했을 때, 그때마다 안 좋은 반응이 (그래 봤자 10대였지만) 평생 연 이어지다 보니까 쉬이 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한참이 흐른 어느 대학생 교양 시간에 교수는 어떤 색이 좋냐는 질문을 했다. 모두들 각자가 좋아하는 색을 돌아가며 빠르게 대답했지만, 나는 쉽게 말할 수 없었다. 교수는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면서 답변을 듣고 있었는데, 내 차례에 오래 지체되니 답답해했다. 나는 어떻게든 대답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어린 시절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 대해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게 참 귀여웠다며 말한 엄마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말레피센트를 감싸던 초록색이 좋았던 것도 기억났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초록색을 참 좋아한다고 했다. 젊었을 때 비가 오는 날이면 밖으로 나가 온몸으로 비를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물기를 머금다 못해 송글 송글 맺혀있는 나뭇잎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보통은 처량하게 묘사되는 비 맞은 여자의 모습과는 달리 예뻤다. 듣는 것만으로도 청량함이 느껴졌었다. 그때의 비와 나뭇잎의 색은 초록이었다고 했다.


나는 찰나에 떠오른 엄마와의 대화를 회상하며, 무심코 초록색이 좋습니다 교수님.이라고 답했다. 왜냐고 물으면 엄마와 얽힌 이야기를 해야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교수는 재빨리 다른 학생 차례로 넘겼다.


찰나의 순간에 준비한 것이었지만, 준비한 대답을 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하지만 그때가 처음이었던 거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어떤 이유도 묻지 않았던 적이 말이다. 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내가 왜 좋아하는지 이유를 설명해야 하고, 상대에게는 그걸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를 들었던 거 같은데, 초록색에는 어떤 이유도 없었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는 어떤 설명 없이 그냥 넘어갔다.


이성을 좋아해야 하는 사회에서 게이로 살아가기 위해서 동성이 매력적인 이유에 대해 상대방을 설득해야 한다. 같은 사회이지만, 초록색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이 불필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이 ‘초록’이었다. 이 사실이 너무 기뻤다. 한 동안은 정말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말처럼 초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초록색 옷으로 나를 도배시켰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가 초록색을 좋다고 한 걸 기억하냐고. 엄마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비를 좋아하긴 했지만, 이제는 빗물이 신발을 축축하게 만드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럼 혹시 엄마는 내가 어린 시절에 공주를 좋아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엄마는 그저 아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게 내버려두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는 당시 엄마한테 커밍아웃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턱끝까지 차 올랐다. 하지만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은 차마할 수 없었다. 대신 다른 말을 했다.


- 엄마, 나는 초록색이 참 좋더라. 비도 참 좋고. 말레피센트도 좋고. 엄마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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