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청량함을 머금은 커밍아웃 04
- 남자아이들은 언제부터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소파에 누워 TV 채널을 돌리던 도중, 평소에는 보지 않을 육아 프로그램에서 모교수가 청중을 향해 질문하고 있었다.
- 당연히 태어났을 때부터 아니야?
물으나마나 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곧바로 다른 프로그램을 향해 리모컨을 돌렸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의문을 갖게 될 때가 있다. 내게는 저 질문이 그랬다. 샤워를 할 때나 연필로 무언가를 끄적일 때나 잊힐만하면 주기적으로 저 질문이 나에게 들어왔다. 그때마다 내가 언제부터 여자와 남자를 나누어 생각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다가 차츰 질문의 빈도수가 늘어나더니, 언젠가부터는 그 질문은 나의 일상이 되어있었다.
시간이 흘러, 전공 수업을 듣던 어느 날. 나와 사귄 미주와 헤어지고나서부터 남녀를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슬라이드 폰을 쓰던 중학교 1학년. 첫 핸드폰을 폴더 폰이 아니라 슬라이드 폰으로 결정한 건 미주 때문이었다. 폴더 폰은 사용하기 위해서 여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그 시간마저 아껴 문자하고 싶었다. 하루 종일 문자를 주고받는데 핸드폰 뚜껑이 얼마나 성가셨겠는가. 하지만 스마트폰 시대와 비교해 봐서 2G 시대 통신기기의 불편함이 우리 사이를 방해한 것만은 아니다. 45자 안에 보내야 하는 제한된 글자수와 느린 송신 속도는 어쩐지 설렘을 증폭시키는 낭만 같은 거로 작동하고는 했다.
나에게 친함이란 단계별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친함은 사귐이 되고, 사귐은 결혼이 되고, 결혼은 출산이 되는 식의 전개 같은 것.
어린 소년 소녀 시절. 미주와 나. 우리는 친했다. 그래서 사귀자고 말했다. 별 이유는 없었다. 평소처럼 문자를 주고받다가 우리 둘의 사이가 가까워졌음을 느꼈고, 고백했다.
하지만 친함 하나만으로 연애를 시작하는 것은 서로에게 몹쓸 짓이었다. 사귀고나서부터 미주에게 나만 모르는 교우 트러블이 매일 같이 생겨났다. 내가 바람을 피우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당시 나는 친구가 여자 밖에 없었는데, 도처에 여자만 있는 남자랑 사귀는 것이 여자 친구 입장에서 얼마나 고역이었겠는가.
한 번은 내가 롯데리아에서 친한 여자인 친구랑 양념감자를 먹고 있었는데, 그걸 본 어느 누군가가 미주에게 고자질했다.
- 너 남자 친구가 어떤 여자애랑 롯데리아에 있던데?
처음 그 제보를 들은 미주는 남자친구가 원래 여자 친구들이 많다고 되받아쳤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고, 가십으로 떠도는 얘기가 많아 질수록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아했다. (나에게 따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후에 나의 여사친과 기싸움을 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시기 나는 여자와 남자를 어떻게 구분하고 있었을까? 솔직히 머리 길이의 차이 말고는 구분하지 못했던 거로 기억한다. 또 이성 교제의 상대로 ‘여자 친구’와 그저 친구 사이인 ‘여자 사람 친구’를 구분하지도 못했다.
내게 여자 친구인 미주는 그저 다른 여자들보다 더 빨리 친함을 느껴서 교제 상대가 된 것이지, 그 이상이 아니었다. 때문에 미주와의 연인이라는 타이틀이 다른 여사친 사이와 어떤 차이(섹슈얼한 접촉 같은 것)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친해서 사귀었지만, 사귐이 친함과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친한 사이만 못했다. 오히려 친한 것 이상의 차이를 기대하는 사람에게 비참함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연애 전선의 이상 감지를 느낄 때쯤, KBS2에서 꽃보다 남자 드라마를 방영하기 시작했다. 드라마는 F4라는 꽃미남 재벌 2세 4명이 금잔디를 두고 사랑 전쟁을 펼치는 이야기였다. 미주와 나는 꽃보다 남자의 열성 팬이었다. 학원을 마치고 나면 놀이터에서 꽃보다 남자 얘기를 했다. 어떤 남자가 더 매력적인지 누구랑 금잔디가 이어질 것인지 내기를 하곤 했다. 평소처럼 놀이터에서 나란히 그네를 타고 있었는데, 미주는 금잔디와 구준표가 키스하는 장면을 꺼내 물었다.
- 구준표가 금잔디한테 키스하는 장면 보았어?
- 나는 당연히 지후 선배랑 금잔디가 잘 될 줄 알았는데, 잔디가 구준표에 넘어가서 놀랐지 뭐야.
- 추운데 갑자기 꼭 껴안으면서 키스하는 게 로맨틱하더라.
- 그래? 나는 추운데 왜 안 들어가고 벌벌 떨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던데.
- 아 춥다.
- 옷 벗어줄까?’
- 아니, 그 정도로 춥지는 않아.
지금 돌이켜 회상해 보면, 그것은 안아달라고, 혹은 드라마 속 구준표처럼 키스해 달라는. 소년을 좋아하는 소녀가 던지는 명백한 사랑 표현이었다. 다만 내가 캐치하지 못했다. 대신 미주가 드라마를 무척 몰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근 레코드샵에 드라마 OST앨범과 브로마이드를 몽땅 구매하여 그녀에게 주었다.
미주는 앨범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했고, 그날 저녁 내게 문자로 헤어지자고 했다. 우리는 친했지만, 헤어졌다. 나는 헤어지면서 헤어짐에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다지 슬프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여자 친구가 없어지는 바람에 다른 여자인 친구들과 자유롭게 놀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도 2차 성징이 왔다. 야한 걸 조금씩 찾아보게 되었고, 내가 성적으로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친한 정도를 따지면 미주랑 더 친했던 거 같은데, 말도 안 통하고 짜증 만나던 몇몇 남자 친구들이 눈에 자꾸 거슬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주는 나를 보며 이 느낌을 받았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한참이 지나 16년도 대학교 3학년. 전공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익숙한 이름이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느 웃긴 연예인의 이름과 같아서 누군가는 코믹한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나에게는 아련함이 담긴 이름이었다.
- 미주
락을 풀지 않아 핸드폰 창에 이름만 떴다.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지만, 열고나면 아련함에 수업을 집중하지 못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뭐, 오랜만에 연락온 거라 안부인사가 전부였겠지만, 잘 지내냐는 문장을 보는 것조차 설렘이 아니라 불안감이 될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고, 커밍아웃을 한 동기들을 불러 모았다. 원형 탁자에 빙 둘러앉게 한 뒤, 내 핸드폰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 애들아, 나 중학교 1학년 때 사귀던 여자애가 연락 온 거 같아. 이거 같이 열어보자.
- 너 여자랑 사귄 적도 있어?
-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같이 볼 거지? 뭐라고 답해야 하는지 조언해 줄 거지?
- 당연하지
애들은 흥미로운 드라마가 펼쳐질 생각에 지들끼리 킥킥 거리며 웃었다. 나의 심각함은 전혀 모른 듯했다. 그런데 락을 켜고 메시지를 보니 내 이름만 덩그러니 보내 놓은 게 전부였다.
- 나 뭐라고 보내야 해?
- 뭘 뭐라고 보내, 씹어. 아니면 잘 지내냐고 물어보던가.
생각보다 별 내용 없는 시시한 문자에 동기들이 실망했다. 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다음 수업 시간이 찾아왔다.
수업에 집중을 하려 했지만,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초조하게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알림 없는 메신저만 계속 처다 보았다. 그때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왜 카톡이 아니라, 페이스북 메신저를 보내왔을까. 그 의문이 들 때쯤 메신저 화면은 … 표시가 뜨며 미주가 메신저를 입력하는 신호가 나왔다.
-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연락했어.
그 문자를 본 옆에 동기 친구가 멜론 어플을 켜더니, 프라이머리의 ‘자니’ 앨범 커버를 쓱- 하고 들이밀었다. 그리곤 전공책 끄트머리에 ‘널 아직도 그리워하는 거 아니야? 크크크’라고 적어 보였다.
거의 10년 만에 연락 온 연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14살 첫사랑을 한 사이였고. 그 나이치고 100일을 넘긴 거면 꽤 오래 만남을 유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직도 나를 그리워하던가 - 아련한 기억에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10년이 흘렀어도 우리는 20대였고,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적절한 나이었으니까. 진심까지는 아니어도 외로워서 만나자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었으니까.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 나도 잘 지내고 있어.
문자를 보내고 너무 성의가 없었던 것 같았다. 몇 분 뒤 어색하지만,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한 말들을 보냈다.
- 지금 대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어. 너도 학교 다니고 있겠지? 스트레스받으면 수학 문제 풀고는 했잖아. 딱 부러지는 해결책이 나오는 게 좋다며. 난 그런 사람이 너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은근히 많더라? 대학은 좋은 데 갔지?
- 아, 내가 그렇게 재수 없는 타입이었나? 지금은 미국에 있어. 뉴욕대에 다니고 있고. 여기서는 카톡 안 써서 페이스북 메신저 보내는 거야. 메신저로 해서 놀란 건 아니지?
- 미국에 있었구나.
카톡 대신 페이스북 메신저를 보내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후 대화는 유하게 흘러갔다. 대게 나는 미국과 한국의 시차와 미국 문화에 대한 환상이 진짜인지 확인하는 질문을 했고, 미주는 몇 년 전 한국에 있었을 때와 지금의 한국이 같은지 혹은 요즘은 어떤 유행이 있는지 묻는 상투적인 질문을 했다. 그 상투적인 질문이 모두 배려라고 느껴졌다. 대화를 끊기지 않기 위해 어떤 말이라도 이어가려는 우리의 노력이 보였다.
하지만 이 대화는 단순히 배려로 채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어색한 대화 뒤에는 더 어색한 14살의 소년 소녀가 사귀었던 시절에 대한 회상이 기필코 나오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다.
- 나 너한테 언젠가 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어.
- 뭔데?
미주는 이 타이밍에 우리의 과거 이야기가 나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궁금했다.
- 그냥, 뭐. 나 지금은 남자친구를 만나고 있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어. 맞는 타이밍은 아닐 수도 있겠다.
나는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하며 커밍아웃했다.
말하고 아차 했다. 나는 무슨 말이 듣고 싶었던 걸까. 말을 해야겠어서 했는데, 그 뒤의 일은 상상하지 못했다. 언젠가 이런 상상을 했던 적은 있다. 미주를 만나면 난 게이라고 말하고 싶다는 상상. 그런데 그게 현실이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 그게 오늘이 될 거라고는 더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의 전개가 맞기는 한 걸까.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 나는 게이라는 말. 그 말로 인해 미주와 한 사랑이 거짓이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미주가 그 사랑이 거짓되었다고 받아들인다면, 나는 숙연히 죄인이 되는 것이 맞았다. 어린 내가 누군가의 순수한 감정을 망가뜨렸다면, 미주란 이름이 들려올 때 심심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쯤은 감수해야 했다. 더 심하다면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아웃팅 당하는 것 또한.
- 아 정말? 나도 남자친구 있는데. 지금 뉴욕대 같이 다녀. CC야. 너도 CC야?
- 어…. 어…. 나도 CC 기는 해.
내 우려와 달리 미주의 대답은 너무나 일상적이었다.
-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 네가 게이였다는 것을. 여자인 친구도 많았잖아. 그것 때문에 내가 힘들어하기도 했고.
- 아, 그렇지. 알고 있었구나.
그 시기 내가 유추만 하고 있던 미주의 감정을 글들로 확인을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 그래도 네가 내 첫사랑이야. 그건 변함이 없어. 너는 어때?
훅 - 들어오는 미주의 질문이었다. 질문은 우리가 헤어진 15살 봄으로 나를 플레이백 시켰다. 그리고 육아 프로그램에서 인간은 언제부터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냐는 모교수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미주에게 차인 이래로 나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수 있었다. 단순히 머리의 길고 짧음으로 구분하는 것보다 생물학적인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그 맘 때쯤. 친함의 메커니즘은 좀 더 정교해졌다. 친하면 사귀고, 사귀면 결혼하고의 일련의 과정에서 몇 가지 단계가 추가된 것이다. 친하면 손 잡고, 손잡으면 키스하고, 키스하면 섹스하고, 섹스하면 사귀고, 사귀면 결혼하고 등의 단계 말이다. (근데 선생님, 이게 머리 길이로 남자 여자를 구분하는 것보다 조금 더 정확한 방법이긴 할까요?)
나는 미주를 사랑했을까. 나는 분명 미주를 사랑했다. 당시 사춘기가 오기 전, 여자와 남자를 구분하지 못하던 순수한 사랑을 했다. 이제는 성적인 감정 없이 사랑을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 그때의 사랑이 사랑처럼 느껴지지는 않지만, 열다섯 살 소년은 분명한 사랑을 했다.
- 나도 네가 첫사랑이야.
- 그럼 됐어. 서로 첫사랑으로 남아있자 그럼. 잘 지내. 나 남자친구 만나러 갈게. 안녕.
미주는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며 나와의 대화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