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OBE Aug 25. 2023

번외_고백을 기다렸더니 결혼할 여자가 있단다.

대학시절 청량함을 머금은 커밍아웃 번외 편


번외 2편_고백을 기다렸더니 결혼할 여자가 있단다.


이 에피소드는 짧게 요약된다. 100일 정도 썸 탄 형이 있었다. 그 사람은 사귀자고 고백하는 대신 결혼할 여자가 있다고 고백했다. 끝.




부연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백일쯤 만남을 이어오고 있었다. 사귀기 알맞은 타이밍이었고, 언제든 누가 고백해도 이상하지 않을 때였다.


그 사람은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보통은 내가 그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날은 할 말이 있다면서 그가 내가 사는 곳으로 왔다. 그리고 평소 파스타처럼 데이트 음식을 먹자고 하는 것과 달리 그날 따라 닭갈비 집에 갔다. 그것도 닭갈비 정식 먹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돈 좀 아끼겠다고 짠내 나게 철판 볶음밥을 먹자고 했다.


어찌어찌 주문을 하고, 내가 셀프 코너에서 코울슬로랑 무를 올린 쟁반을 들고 와서 식탁에 그릇을 까는데, 급하게 할 말이 있다고 앉으라 했다. 나야 뭐, 그날 저 인간이 고백하지 않는다면 내가 고백할 생각이었으므로. 먼저 할 말이 있다고 하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 첫 연애 시작점이 눈앞에 놓인 것 같아 아주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어휴, 당연히 나랑 사귀자고 말하는 고백인 줄 안 거지. 김칫국 먼저 마신거지.


그나저나, 그 사람은 볶음밥이 나오기도 전에 그걸 조급하게 말해야만 했던 이유가 뭐였을까. 결혼할 여자가 있다고 말하는 건 밥 다 먹고 나서 느긋하게 말할 수도 있었던 거잖아. 하여튼 새콤한 무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데, 1년 교제한 여자가 있단다. 그것도 곧 결혼할 것 같단다. 무가 머금은 식초가 내 기도를 한 대쳤고, 사레가 들렸다.


- 겨… 결… 케켁.


그 타이밍에 서빙해주는 아르바이트생이 무겁게 철판 볶음밥을 들고 왔다. 모차렐라 치즈까지 옹골차게 볶는 아르바이트생 앞에서 차마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이 자식. 내 입을 막아버리려고 볶음밥 세팅 해주기 전에 급하게 말한 거구나.


- 엄마가 사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이제 곧 결혼한다고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더라. 너랑 사귀기도 해야 하고. 그래서 파혼하려고.


다 볶아진 볶음밥이 입에 들어가지 않아서 낱알을 세어가며 밥을 먹는데 첩첩산중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했다. 게이면서 여자랑 잠도 잤고, 약혼까지 했는데 - 나 때문에 파혼한다고? 이걸 고백으로 볼 수 있을까.



- 형 이거 혹시 고백이라고 하는 거죠?


- 당연하지. 네가 좋아서 파혼한다고 했잖아.


갑자기 뜻밖에 내연남 된 기분이 들었다. 사랑과 전쟁을 보면서 모든 내연남들을 싸잡아 욕했었는데, 번복해야겠다. 본인도 모르게 내연남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고려하지 못했던 내 잘못이다.


사귀는 것은 보류로 남겨두고 만남은 조금 더 이어나갔다. 그 자식은 파혼이 진행될수록 젠틀했던 초반의 이미지와 다르게 짜증 많은 쓰레기가 되어갔다. 그 후, 참다 참다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짐을 고했다. 부연 설명은 여기까지 하겠다.


이전 13화 10 어플에서 만난 사람에게 포르노가 찍힐 확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