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청량함을 머금은 커밍아웃 01
- 우리 셋은 여행지에서 함께 자도 아무 일이 안 생기는 거지?
- 그렇지? 여자 하나, 남자 하나, 게이 하나니까?
- 그럼 우리 셋이 여행 갈까?
- (동시에) 아니
우리 셋의 관계성은 이 대화처럼 어이없고 두서없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준석과 윤지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우리 셋은 번갈아 가며 모두 짝을 했었다. 윤지와 나. 나와 준석. 준석과 윤지. 짝은 했지만 친밀하다 보기에는 어딘가 부족했다. 왜 그런 사이 있지 않은가. 분명 대화가 잘 오고 가는 것 같은데, 계속 어긋나는 느낌. 그런데 그 어긋남이 꼭 싫지 않은 사이.
그렇게 별다른 추억 없이 시간은 흘렀고, 졸업 후, 서로에게 서로가 잊힐 때쯤 준석이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 우리 동남아 갈래?
정말이지 뜬금없는 제안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연이어 메시지가 왔다.
- 오션타워 앞에 있는 카페 알지? 거기서 만나서 이야기하자
나는 동남아 가는 건 안 되어도, 카페는 쉽게 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쩐지 그의 계략에 넘어간 기분이었지만, 두 번째 물음에는 흔쾌히 YES라고 대답했다. 집에서 할 것도 없는 여름 방학을 틈 타, 씻지도 않은 채 검은색 캡 모자만 쓰고 준석을 보러 나갔다.
준석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동남아 지역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아마 그 전날 밤 그 지역 다큐멘터리를 본 모양이었다. 한국에서는 8-9000원쯤 하는 망고들이 태국 길거리에 300원에 팔고 있는가 하면, 관광객들이 지나가지 않는 골목길에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지구촌 모습이 환상적으로 펼쳐진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흔들리게 캡처한 다큐멘터리 속 한 장면을 나에게 보여줬다. 나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짤뿐이었다.
저렇게 호들갑 떠는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해서 거절의 말을 고르고 골랐다. 그냥 거절하면, 내가 너무 못 돼 보일 것 같기도 하고. 나도 타국에 여행 가는 설렘을 모르는 게 아니었으니까. 말을 조심히 하게 되었다.
- 제주도면 내가 갈게.
그렇게 짜낸 말이 제주도 가자는 제안이었다. 동남아가 저렇게 꽂혀있으니. 한국 여행은 당연히 거절하겠지 하는 마음에 큰 수를 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준석은 내 말을 덥석 물며, 동남아는 핑계고 나랑 어디든 여행을 가보고 싶다 말했다. 어색하고 불편하고 또 보수적인 성격 탓에 박첨지쯤으로 여기고 있는 준석과 제주도에 함께 가는 것은 상상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절을 잘 못하는 나는 어영부영 얼추 거절의 대답한 것 같은데, 준석은 승낙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더니 약속을 매듭지어야 한다면서 우리 집에 찾아와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밥 좀 얻어먹으러 왔습니다.’며 가족들과 식사 자리를 만들어냈다. 때마침 엄마 아빠도 할 일이 없었는지 집에 있어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식사 자리에서는 ‘댁의 아드님은 제가 책임지고 제주도 여행을 무사히 다녀오겠습니다.’고 호언장담하며 20대 초반의 딸과 여행 가려는 남자친구 마냥 엄마아빠를 안심시켰다. 나는 속으로 ‘이게 뭔 시추에이션이지…?’ 생각했지만, 꽤 재밌을 것 같아 지켜보기로 했다.
그날 이후, 속전속결이었다. 박첨지 보이답게 잔소리가 많을 것 같은 우려와는 달리 준석은 뒤에서 얌전히 서포트했다. 조금 비싸거나 같은 가격 대비 시설이 구린 곳을 제안해도 군말 없이 따랐다.
다 하고 보니. 준석은 넋 놓고 바라보기만 하고, 결국 하나부터 끝까지 다 내가 했다.
그러나 의외로 상관없었다. 오히려 나의 모든 제안에 흔쾌히 따르는 준석이가 어쩐지 고마웠다. 삐뚤빼뚤해도 온전히 내가 기획한 여행이라는 게 조금씩 보였고, 설레기 시작했다.
내가 제안한 우리의 목표는 단순했다. 서점에 가서 제주도가 그려진 큰 지도를 한 장 구했다. 그리고 공항에 빨간색 색연필로 깃발을 그렸다. 그리고 ‘이 깃발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쭉 한 바퀴 돌고 오자’가 목표의 전부였다.
2박 3일 동안 우리가 그려 놓은 빨간 선을 따라 조금씩 전진해 나아갔다. 해변 도로에 괜찮아 보이는 카페가 보이면 가서 커피를 마시기도 했고, 갑자기 감자튀김이 먹고 싶다며 롯데리아에 들어가서 감자튀김과 치즈스틱을 쌓아놓고 먹기도 했다. 갈치나 흑돼지는 제주도에 처음 오는 하수나 먹는 거라며 먹지 않았다. 그래도 바다 근처에 왔는데 회 비슷한 거 먹지 않겠냐며 관광객만 가는 뻔한 회 상차림 정식을 먹기도 했다.
시작점에서 점점 멀어졌다가 다시 점점 가까워질 때쯤. 오토바이의 질주가 만들어낸 공기를 마주하며 불현듯이 ‘이제쯤 준석한테 게이임을 말해야 하는 타이밍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전까지 내가 커밍아웃을 마친 친구들은 다 여자였다. 여자 애들한테만 하자 다짐했던 것은 아니었고, 나를 이해할만한 친구들의 성이 여성이었을 뿐이다. 반면 유교 박첨지 보이로 분류되는 준석에게는 커밍아웃의 가능성조차 열어 둔 적이 없었다. 학창 시절 여자 같다고 놀리는 주동자들과 오버랩되는 준석이었기 때문에 굳이 말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냥 준석에게 커밍아웃하기로 마음먹었다.
준석이 믿을 만한 사람이어서 커밍아웃을 결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 기준에서 믿지 못할 사람에 가까웠다. 준석을 앞으로 믿어보자고 다짐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이지 그냥. 이유 없이 말해보기로 한 것이었다. 제주도를 지도 한 장과 빨간 선 하나로 의지해 여행을 같이 한 사이라면, 커밍아웃 한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나를 걸어봤을 뿐이었다.
여행을 다 마치고. 준석과 윤지에게 오븐 구이 치킨 집에서 모이자고 말했다. 준석과 단둘이서 밥을 먹으며 커밍아웃하는 어색해서 윤지를 끌어들인 것이다.
졸업 후 처음, 셋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명 우리는 썩 친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서로가 이해할 수 있을 만치의 다름과 적당한 공통분모가 있었다. 그래서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치킨 무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말할 타이밍을 쟀다. 그리고 두서없이 말했다. 나는 게이라고. 윤지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 놀랄 줄 알았지만, ‘이 타이밍이 맞나?’하는 표정에 얼떨떨해했다. 반면 준석은 알고 있었다는 듯 태평하게 말했다.
- 그럼 우리 셋이 여행 같이 갈 수 있겠다.
이게 뭔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었다. 윤지 역시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 자 생각해 봐. 너는 남자를 좋아하고, 나는 여자를 좋아하고, 윤지는 남자를 좋아하잖아.
- 그렇지?
나와 윤지는 동시에 대답했다.
- 그럼 우리가 한 방을 쓰게 되었을 때, 너랑 내가 같이 자면 내가 위험하고, 윤지가 나랑 같이 자면 윤지가 위험하고, 윤지랑 너랑 같이 자면 네가 위험하잖아. 그니까 우리 셋이 같이 여행 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라고.
- 응? 그렇긴 하네.
- 그럼 우리 셋이서 여행 갈 수 있는 거야?
- 지금 내가 커밍아웃한 것보다 여행이 중요한 거지?
- 그렇지?
나는 이 대화가 참 기억에 남았다. 내 커밍아웃이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가벼운 여행이 나의 커밍아웃보다 중요했다. 이 사실이 너무 좋았다. 내 커밍아웃을 이제는 무겁게 가져가고 싶지 않았고, 믿지 못하는 관계에서도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괜찮았다. 왜냐하면, 적어도 내 정체성이 무기로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우리가 모일 때마다 우리의 대화를 상기시키는 밈(meme)을 농담처럼 사용하고 있다.
- 애들아 우리 셋이 여행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