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1
사진을 찍는 이유-2023.10.21
2018년 봄의 국립 수목원을 떠올린다. 경기도 포천시 광릉숲에 위치한 넓은 공원은 내겐 어려서부터 자주 방문하곤 했던 추억의 장소다. 그땐 광릉의 의미도, 수목원의 의미도 모른 채로 부모님만 따라다녔었다. 광릉 잔디밭에서 굴러다니고 입구 옆 숲에 돗자리도 펴곤 했다. 그런 게 당연한 세상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내 손에 처음 카메라가 들렸으니, 고등학교에 진학한 기념으로 아버지께서 내게 선물하신 캐논 600D가 그것이었다. 그때는 아버지도 나도 작품을 만들기보다 사진을 남긴다는 취지였다. 아버지께서 사진학 강의를 듣고 내게 전해주신 일은 그보다 한참 이후였다.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는 1년 가까이 되었지만, 나는 사진에 깊이 빠져들지 못했다. 사진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굳이 사진을 찍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재미있는 일이 더 많았고 사랑을 배우기에도 바빴다. 그런데 사진이 내게 왔다. 무관심 속에 가장 밝게 태어났다.
그날도 평범하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카메라는 그때까진 그저 주말 가족 여행의 유희 정도로 생각했다. 멋진 사진을 찍으면 자랑해야겠다며 공원을 거닐었는데, 문득 한 장소가 내 눈길을 끌었다. 큰 나무 한 그루 주위를 연못이 두르고 있었다. 그곳으로 직접 걸어갈 수도 있어서 섬처럼 보이기도 했다. 당연히 초짜답게 큰 나무에도 초점을 잡아보고, 연못도 비추어 봤다. 하지만 사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무는 내 렌즈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게 담겼고 연못의 맑은 빛은 지극히 평범했다. 실망하고 돌아가려는 찰나에 한 장면이 내 시선을 끌었다.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분명 눈으로 봤을 때는 평범했는데, 카메라 렌즈로는 아주 화려한 색색의 공연이 보였다. 당연히 나는 아직 이 순간을 온전히 담아낼 능력도 지식도 없었다. 이 사진은 그 순간 우연의 일치로 찍혔다고 말할 수 있다. 여러 장을 찍어 하나를 추린 것도 아니었다. 한 장도 일단 카메라에 담은 후에 걸어가면서 확인하던 시기였다. 렌즈를 맞추는 한 장면에 짧은 쾌락을 느끼고, 사진을 확인하면서 한 번 더 느꼈다. 사진의 구성요소가 눈에 들어오면서 내가 어떤 사진을 좋아하는지 깨달았다.
전문가의 시선엔 난잡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부족한 식견으로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으니까. 다만 이 사진이 내게 특별한 이유는 첫 경험이기 때문이다. 햇빛의 방향으로 검어진 나무와 다리는 유명한 화가의 손길처럼 프레임을 감싸 안는다. 연못은 빛을 온전히 다 머금으며 색을 잃었지만, 다른 풀잎들의 시선을 가져왔고, 난잡하게 자란 풀들은 물감을 쏟은 듯 추상적이다. 앞으로 나온 몇몇 풀잎들과 뒷배경으로 들어온 거대한 숲, 인간의 예술로 조각해 놓은 조경수가 각자의 소리를 내며 한자리씩 파고들었다. 다리를 지탱하는 돌무더기에 들어온 빛도 아름답지만, 나는 다리 밑에 핀 특별하지 않은 붉은 꽃을 무척 좋아한다. 특히, 무언가를 찍겠다고 찍은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모니를 만들고 있기에 더 좋다.
내 기억엔 아버지도 같은 장면을 보셨지만, 세로로 찍으셨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이유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한데, 너무 오래된 일이라 마치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듯이 감정으로밖에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도 조금 의아해하셨는지, 칭찬으로 하신 말씀이었는지, '내가 찍은 것 아니냐.'라고 하신 것도 기억난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세로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시지 않았을까. 진실은 천국에서 필름을 돌려 보자.
여하간 나는 이 사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날 찍은 모든 사진에 영향을 줬을 정도였다. 아마 그때부터 좋은 사진에 대한 소신과 미적 감각에 대한 나만의 철학이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이후에 재방문하게 되었을 때는 지인들과 함께한 터라 카메라를 들고 가지 않았고, 핸드폰으로 드문드문 담아내기만 했다. 그러다 카메라를 가져왔어야 했다고 후회하면서도 핸드폰으로 이만한 사진을 건졌음에 감사한 사진이 한 장 나왔다.
나무들, 단풍, 원근, 빛, 바위, 듬성듬성 자란 풀잎들과 낙엽들이 모두 사랑스럽다. 왼쪽 호수를 가린 사람들과 오른쪽 인공물만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사진은 사진이기에 아름다운 것 아닌가. 나는 자연스러운 자연을 사랑한다. 그저 순간이 눈에 들어왔기에 찍은 것도 있고, 세상을 억지로 담아냈다간 자연스러움도 희석될 것이다.
다시 방문했을 때 추억의 그 장소를 가보았는데, 갈대가 길게 자라서 같은 구도로 찍을 수는 없었다. 같은 사람이 찍었어도 매 순간의 우연이 다르기에 사진도 다르게 나온다. 모쪼록 초심을 잃지 않고 빛과 렌즈의 마술을 이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나가면서 찍어서 자랑스러운 사진은 아니다. 보면 볼수록 그땐 대체 어떻게 찍었을까 싶기는 하다. 좀 더 오른쪽 아래에서 쭈그려 앉아 찍었던 것 같은데, 갈대가 가려서 이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주인공들은 다 남아 있어서 반가웠다. 다리 밑에 핀 특별하지 않은 붉은 꽃은 사랑처럼 떠나갔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