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론
(2편에 이어서)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면, 작가란 무엇이고 예술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떤 마음으로 시를 썼던가. 어떤 작품을 보고 예술을 느꼈나.
하루 이틀 사이에 답을 얻을 만큼 쉬운 질문이 아니었다. 예술에 대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마다 나는 내가 몹시 싫었다. 인스타그램에 상업 사진 닮은 것이나 올리면서, 뒤로는 작가가 될 준비라니. 유명하면 모르겠다만 그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깊은 고민과 실망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주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출발했다.
삶은 무엇인가. 지난 시간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빈손으로 떠날 날을 대비하는 과정이다.
그 속에 소유란, 과정을 편리하게 도와주는 도구다. 소유는 기본 내에서는 가치가 일정하지만, 일정 기준을 넘어서면 도리어 불행을 가져온다. 그것은 모든 도구의 성질이고, 어떠한 도구도 목적 없이는 쓸모가 없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금전이나 명예로서 삶을 편리하게 영위하도록 돕는 도구인가? 대체로 그렇지 않았다. 소수의 성공 사례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불행을 더 겪어야 했다. 죽어서야 이름이 남겨졌고, 죽기 전에는 아무도 그들의 예술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내가 확인하지 못하는 곳에서 뜻이 관철되는 것은 도구가 아니라 유산이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자기만족으로서 나만 즐거우면 그만인가? 또한 그렇지 않았다. 나라는 존재 또한 시간 속에 서슴없이 바뀌는 자아로 존재한다. 내가 작품이라 불렀던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흑역사가 되고, 대다수는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신세가 된다. 아무리 당시에 훌륭한 작품이라도 아포리즘에 의한 죽음을 맞는다. 마치 상한 포도 주스를 마시면서 '이것이 바로 진짜 포도주다'라고 외치는 모양새로.
그렇다면 예술이란 무엇인가. 나는 우습게도 자기만족에서 답을 찾았다. 나의 속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무언가를 남기는 것.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곳에서 아포리즘에 의한 죽음을 맞지 않는 작품.
그러므로 궁극의 아름다움이 되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작품. 그래서 당당히 나의 대표작이자 유작이 될, 단 하나의 사진을 찾아 나서는 일이다.
그게 나의 결론이다.
이 사진은 내가 고민에 빠졌을 적 찍었던 사진이다. 정확히는 편집한 사진이다. 사진을 찍을 때 내가 고려하는 것들, 무엇을 아름답다 여기는지,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지, 구도는 어떻게 잡았는지에 대한 시선을 표현했다.
"제대로 정돈되지 않아 어수선한 가지와 덤불을 흑백 처리했다. 반대로 과하게 정돈되어 인문학적 소양마저 느껴지는 일종의 공학 유산을 흑백 처리했다. 그리고 주인공, 주인공의 무대, 주인공의 배경에서 '특수한 장면이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 색만 강조했다. 무대는 앞, 배경은 뒤인 원근감을 유지한다. 무대는 직선을 부드럽게 개조하고, 배경은 어수선함 속에서 희소성을 찾았다."
..라는 것이 당시의 설명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 날이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은 날이었나 싶다.
사진을 찍은 날은 <자연의 선, 인간의 선>보다 한 달 전이지만, 색감은 그보다 4달 이후인 5월에 입혔다. <나의 시선>은 내가 추구하는 사진을 설명하기 위한 도슨트였다면, 이 사진은 내가 추구하는 궁극에 일보 전진한 작품이다.
얼핏 보면 그저 절묘한 시간대에 찍은 사진 아닌가? 싶겠지만, 이 사진은 구석구석 편집에 의해 의도적으로 변형되어 있다. 파도와 구름의 질감을 일치시키고, 노을과 등대 구조물의 색을 일치시켰다. 그 속의 갈매기와 두 사람, 안내 표지판의 구도가 완벽하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했다. 보통은 사진에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꺼리고, 부득이하다면 편집으로 지워서 올리는 편인데. 지우지 않고도 높게 평가한 이유도 사진적 완벽함 덕분이다.
구름의 방향, 파도의 방향, 등대 구조물의 방향이 만들어낸 선이 오른쪽 중앙을 향해 모이고, 갈매기들은 금방이라도 날아가는 이별의 온상, 두 사람의 대화도 슬슬 돌아가자는 말을 할 것 같이 옷을 여미고 있다.
이런 사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에 값어치가 있다. 마치 낭만주의 화가들이 창작자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는 자유로운 표현을 동경했던 것처럼.
그 이후로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다.
이 사진은 공터에 핀 꽃을 벽의 질감과 대조시켜 구성한 사진이다.
이 사진은 일부만 단풍이 물든 사진을 단풍 부분만 밝게 편집한 사진이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비로소 궁극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평소처럼 편집하던 와중에, 우연히도 사진에 잘 맞는 편집점을 찾았다. 이 사진은 선명한 다른 사진들과 다르게 질감을 뭉개 놓았기 때문에, 다큐멘터리스러운 깨끗한 사진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몰매를 맞을 사진이다. 엄밀히 말하면 미술 회화에 가깝다.
점묘화처럼 편집하는 조절점을 '그레인'이라고 부르는데, 본래 의도는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필름 사진으로 인화한 것처럼 보이도록 함이다. 하지만 나는 그레인을 극한으로 높이고 텍스처를 극한으로 뭉개서 '사람이 직접 그린 것 같은, 그래서 현실이 아닌 감정이 담긴 사진'을 얻는 데 성공했다.
사진에 내 감정을 담아내면서, 그 안에 내가 생겼다. 나는 이제 사진 속에서 살아 숨 쉬며, 도슨트를 영원히 진행할 것이다. 이 사진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보고 싶었는지 설명해 줄 거다. 다른 사람이 이 사진을 좋아해도 감사할 일이지만, 내가 영원히 인정할 사진을 건졌다는 데 의의를 갖는다.
20MB가 넘는 사진이라 어쩔 수 없이 용량을 낮춰야 했다.
방금 본 사진과 구성이 비슷하다. 왼쪽 위가 열리고, 오른쪽이 채워지는 사진. 내가 가장 아름답게 여기는 구도면서 다양한 시도를 포괄적으로 담는 방법이기도 하다. 왼쪽은 나무 사이에 구름이 없고, 오른쪽은 빈틈없이 채워져 있어서 마음에 든다. 포인트가 되는 분홍색의 꽃도.
만약 단 하나라도 아쉬움이 있었다면 편집하지 않았을 사진. 틀림없이 아름다우리란 믿음으로 만든 사진이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노을과 바다>처럼 오른쪽으로 선이 모이는 사진이다. 가장자리의 어두운 면이 '햇빛이 닿는 영역'으로 잘 표현된 것 같아 마음에 든다.
무조건 그레인을 높이냐면 그렇지 않다. 모든 사진에 똑같은 편집을 적용한다면 그건 한 취향만 고집하는 변태지 예술이 아니다. 나는 사진 본연이 갖는 아름다움을 존중한다. 나는 햇빛이 언제 아름다운지, 노을이 언제 예쁜지, 파도가 언제 가장 매끈한지 알고 싶다.
나는 이 길의 끝에 가보고자 한다. 그레인의 궁극을, 사진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느끼고 싶다. 그리고 이 삶이 끝날 때, 나의 대표작들을 모아두곤.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느끼는 세상의 본질이자 예술의 존재 이유이고, 이름 석자 뒤에 붙을 작가라는 족쇄를 기쁘게 받고자 한다. 세상이 내가 작가이길 원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당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