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SP가 무던해 보이는 이유 *Highly Sensitive Person
"공감은 인정이야.
상대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돼.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도
'너는 그렇구나' 하면 돼. 그게 다야."
공감이 뭐냐고 투덜대던 엄마에게 무심히 대꾸했다.
"역시 우리 딸.
수업 때 배운 거랑 똑같이 말했어!
어디서 그런 걸 배운 거야?"
성에 차지 않은 듯 입을 꾹 다문 엄마 옆에서,
늦깎이로 상담심리를 공부하던 아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냥, 그렇게 느꼈어."
"난 네가 전혀 신경 안 쓰는 줄 알았어."
어릴 적, 사소한 다툼 끝에 화해한 친구가 툭 뱉은 말이었다.
그날 나는 온종일 마음을 졸였다.
혹여 마음이 많이 상했을까, 나에게 실망하진 않았을까, 관계를 되돌릴 수 있을까.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렸는데.
정작 매일 붙어 다니는 친구들 중 누구도, 타들어가는 내 속을 알지 못했다.
내 마음이 대접받지 못하는 것엔 익숙했지만,
종일 쏟아부은 걱정이 모두 무색해져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 억울함은 얼마 안 가 혼란으로 바뀌었다.
남들 눈에 나는 생각보다 훨씬 무심한 사람으로 보였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 나는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애가 나를 좋아하는 건, 반 아이들이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중학생이 되어 단짝 친구에게 털어놓기 전까지.
나는 아무도 모르게ㅡ11월 11일, 가장 비싼 빼빼로를 건네는 식으로ㅡ마음을 보였지만,
그 애는 내게 더 다가오지 않고 그저 주변 친구들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뿐이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비슷했다.
어느 날 같은 반 친구가 재미있다는 듯 넌지시 말을 건넸다.
"우리 반에 너 좋아하는 애 있다? 누군지는 안 가르쳐 주지."
평소 행실을 고려하면 말을 지어낼 인물은 아니었지만, 나는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그 마음의 주인을 알아낼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서로 마음이 통했던 초등학교 동창도, 몰래 나를 좋아했다던 중학교의 그 아이도.
결국 누구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아니, 다가오지 못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나에게는 타인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단단하고 높은 벽이 있었다.
"누구는 이게 안 맞고, 누구는 저게 안 맞고ㅡ이런 게 하나쯤은 있거든?
근데 너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게 아무것도 없어."
올해로 12년 된 친구의 말이었다. 내심 뿌듯했다.
'거슬리지 않는 사람'이 되려 한 오랜 시도가 증명서를 받은 듯했다.
그 칭찬의 바탕은 타고난 성향이 아니라, 오래전에 익힌 본능이자 생존 전략이었다.
타인의 감정선에 생채기를 내지 않고 매끄럽게 넘어가는 것.
당연히 처음부터 능숙하진 않았다. 시작은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여섯 살 무렵, 다섯 살 터울 언니에게 혼나던 날.
나는 진심으로 반성한다는 걸 보여 주려고 필사적으로 울음 흉내를 냈다.
그런데 그 회심의 퍼포먼스가 오히려 독이 됐다. 문제는 눈매였다.
잔뜩 찡그린 눈꼬리가 하필 웃을 때와 같은 모양으로 휘어지는 것이었다.
그 사실은 호되게 혼난 뒤, 거울 앞에서야 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열 살 어느 날, 언니가 엄마에게 혼나고 있었다.
'창피하지 않게 모르는 척해야지.' 하고 나는 멀찍이 앉아 공기놀이를 시작했다.
찰그락.
적막한 방에 번진 공기알 소리가 엄마의 신경을 긁었고, 결국 나까지 손을 들고 서 있어야 했다.
나의 눈치 게임은 언니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한 살 터울의 오빠는 어릴 때 눈물이 많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집에 부모님이 없거나,
갖고 싶은 장난감을 가질 수 없거나,
집으로 억지로 돌아가야 할 때면 어김없이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오빠 옆에 앉아 덩달아 울었다.
부모님은 아셨을까.
나는 울음소리로 오빠와 감정의 짝을 맞췄을 뿐,
혼자서는 좀처럼 눈물이 나지 않는 아이였다는 사실을.
이처럼 그 시절 내 1순위 목표는 누군가가 민망하지 않게 돕는 것이었다.
그 목표를 이루려고 나는 상황에 가장 적절한 반응을 찾아 헤매며, 끊임없는 눈치 게임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감정의 튀어나온 모서리가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깎고 깎아서 마침내,
아무 데도 걸리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이었다.
겉으론 잠잠했지만, 내 안에서는 매 순간 감정이 태어나 움직였다.
그 감정은 밖으로 흐르지 못하고 안쪽 깊은 곳을 맴돌았다.
고요한 수면 아래 소용돌이가 거세진 탓일까.
사춘기 무렵, 느닷없이 연기에 흥미를 느꼈다.
주변 반응은 뻔했다. "네가? 연기를?"
감정 기복이 없어 보이는 애가 가장 감정적인 일을 하겠다니.
상상이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뻔뻔하게 말하자면, 나는 연기를 잘했다.
내 안에 갇힌 수많은 '나'들이 대본이라는 수문을 만나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온 덕이었다.
현실적인 이유로 꿈은 금세 접었지만, 그 물줄기는 음악으로 이어졌다.
나는 내 안의 감정들로 수많은 곡을 썼다.
그리고 그 곡들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마이크 앞에 서서 노래를 불러야 했다.
보컬 실력은 정말 형편없었지만, 내 목소리는 뜻밖에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 이유는 결코 노래 실력 때문이 아니었다.
가사를 입에 올리는 순간, 내 안에 쌓인 감정이 제멋대로 튀어나와 빈칸을 채우는 것.
어떤 노래든 단숨에 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그 재능 덕분이었다.
그 재능이 아니었다면, 나는 노래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음악과 한 걸음 떨어져 지내고 있다.
누군가는 지난 노력과 재능이 어딘가에 도달하지 못해 아쉽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아쉽지 않다. 그저 그 치열했던 시간을 사랑한다.
깊숙이 묵힌 감정을 꺼내 마주하고, 타인에게로 실어 보냈던 그 시간들을.
그 시간들 덕분에 나는 '겉은 조용하지만 속은 시끄러운 사람'이 아니라,
'겉은 잔잔하고 속은 단단한 사람'에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