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함의 극치
커피 없이는 버티기 힘든,
사무실의 오후 두 시.
통유리 앞 소파에 둘러앉아
보드게임으로 졸음을 밀어냈다.
아쉬움이 한 줌 남았을 무렵,
우리는 흩어져 각자의 일에 몰입했다.
배려 어린 웃음 때문이었을까.
사무실을 감싸던 몽글한 음악 때문이었을까.
술도, 담배도, 위계도 없던 그 무리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정규직이 된 첫 달,
새로운 유튜브 채널을 전담하게 됐다.
나는 모든 일에 책임감을 갖고
무던히 노력했다.
무엇을 하든
예민한 감각은 여전했지만,
음표처럼
한 번에 고칠 수 있는 문제는 드물었다.
그저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하루하루 애쓸 뿐이었다.
그러다 보면
퇴근 시간은 늘 훌쩍 지나 있었고,
선배들뿐 아니라
대표님도 자주 말했다.
"완벽하게 하지 마. 70%만 해!"
회사에 정착하면서
조금씩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배려 어린 웃음 뒤에는
불안정한 매출이 있었고,
보장된 자율성 뒤에는
허술한 구조가 숨어 있었다.
정규직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불안정함은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걸 바로잡기 위해
회사 경험이 풍부한 대표님의 와이프가
부대표로 합류했다.
체계를 잡는다는 명목 아래,
부대표님은 큰 일부터 작은 일까지
하나씩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 손길은
동료들의 사소한 업무와 말,
책상 위 물건 하나하나에까지 뻗었다.
하지만,
나는 그 선에서 살짝 비껴나 있었다.
동료들 눈에는
열정이 과한 신입이었겠지만,
상사들 눈엔
회사에 잘 어울리는 인재쯤으로 보였을 테니까.
그래서 비껴나 있었다고,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열심히 하다 보면
가끔은 뿌듯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날도 그랬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왔다.
전반적인 구성도 괜찮았고,
내용도 깔끔했다.
만족한 만큼,
조회수도 평소보다 잘 나왔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유튜브 팀 채팅방에 결과를 공유했다.
그 방엔
나를 믿어주던 대표님 두 분과 사수,
출연자들, 그리고 부대표님이 있었다.
평소처럼
귀여운 이모티콘들이
잇달아 날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
"이 부분, 수정해서 다시 올리세요."
"조회수와 구독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세요."
…
어디선가
버튼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타다다닥
타다닥
타다타다닥
적막한 사무실이
두 사람의 타자 소리로 가득 찼다.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고,
생각은 한참 뒤를 따라갔다.
"그 부분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편집했습니다."
"다시 올리면 같은 결과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충분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부대표님의 말 한 줄 한 줄에
모두 반박해야만 했다.
멈추면,
내가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멈추지 않았다.
"잠깐, 방에서 봐요."
결국 부대표님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에서 마주한 부대표님은
생각보다 온화한 표정이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전에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를
차분하게 설명해 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그걸 먼저 말하지.’
시간이 조금 지나고,
감정이 가라앉은 뒤에서야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돌아볼 수 있었다.
회사 어른들이 다 지켜보는 채팅방에서,
나는 트럭으로
부대표님을 들이받은 셈이었다.
후회했다.
너무 후회돼서,
부대표님을 마주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서 회사 멘토분께
내 상황을 털어놓고 상담을 받았다.
그러면서 내 상태를 하나씩 점검했고,
부족했던 부분들을
인지하고, 인정하고, 고민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부대표님께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메시지엔
미안함도, 설명도,
앞으로의 방향도 담겨 있었다.
다행히 부대표님은
나의 예민함을 너그러이 받아주셨다.
그 뒤로 나는,
기존 동료들이 모두 퇴사할 때까지
나름 평화롭게 회사를 다녔다.
얼마 안 가
급발진 퇴사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 때문에 크게 고통받진 않았다.
(급발진 덕분에 편하게 다녔나 싶기도 하다.)
회사를 다니면서,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민하다는 걸 알게 됐다.
화가 별로 없는 사람,
평정심이 깊은 사람이라 믿었는데
그건 그냥,
그런 환경에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이번엔,
부족한 면이 더 쉽게 드러나는 환경이었다.
그렇다고
그 안에서의 내 모습이
고정된 '진짜 나'라고 믿지는 않는다.
예민하다는 건 그저,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크고
더 잦다는 뜻일 뿐이다.
그리고 그 반응을
어떻게 다루고 전달하느냐는
내가 계속 배워야 할
삶의 방식이다.
그 회사에서의 미래는 끝났지만,
진짜 함께하는 삶은
이제야 비로소 시작된 것 같다.
트럭처럼 거칠게 부딪혔던 그날은,
단절에서 연결로
내가 겨우 한 발 내딛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