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에서 강점으로
저벅저벅.
툭.
선생님이 건반 앞에 앉았다.
선생님의 손이 건반을 스치자
나는 곧장 녹음 버튼을 눌렀다.
모든 길이 정해진 듯 달리다가도
새로운 길로 가고 싶어지면
두 마디 전으로 되돌아가는 게 내 몫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눈과 손이 되어
곡이 완성될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움직였다.
그날, 손님으로 온 작곡가가 물었다.
“신호가 따로 있나요?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셨는데...”
스물다섯 살 봄, 선생님을 처음 뵀다.
시각장애인을 처음 마주한 날이기도 하다.
놀라긴 했지만, 특별한 반응은 하지 않았다.
그저 일상 속 누군가를 만난 것처럼
선생님의 삶을 조심스레 따라갔다.
기타 줄을 늘 같은 굵기로 감아
서랍 왼쪽, 원래 자리에 똑같이 정리했고,
누군가 테이블 끝에 둔 선생님의 물컵을 치우면
어디로 옮겨졌는지 조용히 알려드렸다.
우리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다.
대신 감각으로 서로를 이해했고,
그 침묵 속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그 시기도 오래가지 않았다.
선생님의 단 한 마디에
내 안에 적대감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내가 예민하다고? 너는 무례해.'
잠들기 전까지 수없이 되뇌었다.
말의 맥락이 아니라,
'예민함'이라는 단어가 가진 부정적인 결이
나를 깊이 찔렀다.
그 단어 하나가
내 정교한 노력과 집중을
가볍게 매도하는 것만 같았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예민하다'는 그 한마디가
나를 판단하고, 깎아내리고,
내 모든 애씀을 대수롭지 않게 만드는 줄 알고...
나는 분노라는 감정에 잠식되었다.
사실, 누구보다 예민한 사람은 선생님이었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전,
선생님은 늘 모든 악기의 음색과 볼륨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조율한 뒤에야 연주를 시작하셨다.
0.01초의 밀림도 용납하지 않으셨고,
일곱 번째 비브라토의 음정이 미세하게 내려가는 것도
단번에 알아채셨다.
그토록 정교하고 섬세한 감각을 지닌 선생님이
나에게 ‘예민하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은 아마도 나를 위한 말이었을 것이다.
예민함이 때로
자기 자신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선생님이 누구보다 잘 아셨을 테니까.
그렇게 아프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뜻을 이해하기까지,
나는 3년이 더 걸렸다.
"네가 너무 섬세해서 조심스러워."
"정말 예민한 사람은 겉으론 무던해 보인대."
"넌 진정한 완벽주의자야."
"예민함은 강점이 될 수 있어."
누군가 툭 내뱉은 말,
책 속 문장,
유튜브 썸네일에 떠 있는 글귀까지.
다양한 상황에서 스쳐간 말들이
조금씩 내 안에 쌓여
하나의 결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은,
내가 오래 붙들고 있던 정의를 허물었다.
예민하다는 건
사소한 일에 화내는 단순한 모습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말도 아니었다.
예민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자
이유 없이 힘들었던 많은 순간들이 설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위안과 감사를 마주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특성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특성에는
장점과 단점이 함께 깃들어 있다.
단점만 바라보면
그 특성은 끝없는 약점처럼 느껴지지만,
조금만 시선을 달리하면
그 안에는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도 있다.
알아가고, 받아들이고,
조금씩 나아가는 것.
그렇게 성숙해지는 거라고,
서른 즈음의 나는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