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장미정원
어느덧 가을이다. 물기가 빠지고 바스락거리는 마름이 숨에서도 느껴졌다.
'우와! 말 그대로 쾌청하는구나!'
지나치게 쾌청한 하늘이라, 드물게 보이는 구름은 그 자체로 조각 같았다. 늘 그랬듯 세상사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간은 제 뜻대로 때를 맞추는 것 같았다. 미처 나만 몰랐을 뿐, 이미 산과 들. 하늘과 땅, 나무와 이파리, 풀과 꽃들은 진즉부터 가을로 가고 있었다.
혼자 마루에 누워 유유자적 다가오는 가을과 교감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을 때였다.
"실례합니다, 계세요?"
그때 중년의 남자와 여자가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 세요?"
"아, sns 보고 찾아왔어요."
'아뿔싸!'
나는 헐레벌떡 일어나 일단 맞이하는 자세를 취했다. 급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테이블을 중앙으로 옮겼다. 장식용 꽃병을 올려놓고 조촐하게 테이블을 세팅했다.
"아직 오픈 전인데 저희가 방문한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내가 허둥지둥 거리는 모습이 신경 쓰였는지 여자는 나에게 예의를 보여주었다. 적잖이 당황스러웠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대청마루 쪽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죄송해요. 사실은 정말로 손님이 오실지 모르고 준비가 미흡했어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 정말로 그런 걸 보고 찾아 온다고?'
언니의 말이 완전하게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 신기했다. 다행히 남자와 여자는 불쾌감이 없이 대청마루에 올랐다. 오롯하게 대청마루 아래로 펼쳐진 산의 모습이 미진한 모든 것을 대신해 주었다. 남자와 여자는 자리에 앉아 산을 바라보며 이미 이곳에서 얻고자 했던 모든 것을 얻은 표정들을 지었다.
커피와 다과를 내놓고 부엌으로 돌아와 둘의 동태를 몰래 살폈다. 만족스러운 둘의 표정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풍경에 흠뻑 빠졌으나 호들갑스럽지 않았고, 간간하게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사장님?"
"아! 네!"
"괜찮으시면 뜨거운 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뜨거운 물과 잔을 함께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여자는 나를 잠시 붙잡고, 작은 병에 담긴 마른 꽃잎을 서너 개 띄워 내게 먼저 꽃차를 건네주었다.
"맛이 어떨지 모르겠네요. 차를 잘 몰라서. 새금봉 내려오는 길에 이뻐서 들어간 곳이었는데 꽃차 공방이었어요. 여유 시간만 있었음 꽃차 만들기 체험도 하고 싶었지만, 아쉬운 대로 구경하다가 그냥 이쁜 걸로 골라서 몇 개 샀어요."
"아. 저도 다음에 한 번 가봐야겠네요."
쭈글쭈글한 붉은 콩알 같은 것이 물 위에서 우아하게 기지개를 켜더니 금세 짙은 자홍색으로 물들였다. 상큼한 내음이 색과 너무 잘 어울렸다.
"대문 밖 앞이랑 개울 사이의 땅도 여기 소유인가요?"
이번엔 남자가 물었다.
"네.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럼 앞에 바디나물이 많이 있던데 조금 뜯어가도 괜찮을까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요."
"그런 게 있었군요. 괜찮으니깐 뜯어가세요."
남자는 슬그머니 바깥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이 먹더니 약초 같은 거에 관심을 갖더라고요. 그거 먹고 천년만년 살려고 그러나..... "
여자는 찡긋하면서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화를 시도하는 것인가 싶은 마음에 순간적으로 부담감이 밀려왔다.
"무슨 나물이라고 하신 것 같던데......"
"약초니깐 캔다고 했을 거예요. 나물 같은 건 먹지도 않고 아는 것도 없어요. 그나마 콩나물이나 시금치정도나 알까...... 아마 고사리는 땅에서 날 때부터 갈색인 줄 알걸요!"
이중적인 느낌에 어떤 감정인지 아리송했다. 말하는 표정은 남자를 아끼는 듯했으나 말투에선 얄궂게 험담을 하는 것처럼 들렸으니 말이다.
"여긴 정말 좋군요. 고민상담 태그 걸려 있던데 혹시 직접?"
"아. 아뇨! 원래 여기 주인 언니가 계시는데. 지금 어디 가셔서......"
"그랬군요. 여긴 SNS 보고 난중에 이혼하고 혼자 들러 볼 생각이었는데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같이 와버렸네요."
나도 모르게 갸우뚱거렸다.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던 것일까. 여자는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비밀인데요. 이번 여행을 마지막으로 저 사람과 이혼할 예정이에요."
이곳엔 여자와 나, 남편만 있는데 비밀이라며 속삭이듯 작게 이야기했다.
"저 사람은 아직 잘 몰라요."
양치하고 엄마 몰래 사탕을 먹은 아이의 표정이 저럴 것 같았다. 그러나 이혼을 앞두고 부부의 모습처럼 보이진 않았다.
"어떤 의미인지 제가 이해를 잘 못 한 것 같아요."
여자는 나를 보며 지그시 깊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내가 말하면서도 이상하네요. 멀쩡하게 여행 온 평범한 부부의 모습일 텐데...... 남편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제법 우리 사이가 괜찮다고 생각하겠죠. 다음에 이혼에 성공하면 혼자서 다시 찾아올게요."
여자는 대화를 마무리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남자는 풀떼기를 한 움큼 캐어 가며 답례로 공방에서 샀다고 했던 꽃차 한 병을 선물로 주고 갔다. 여자는 가면서,
"고마워요. 다음에 또 봐요!"
라며 여운을 가득 남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것은 설명하기 힘든 어떤 인연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접대한 첫 번째 손님이라 의미 부여가 지나쳤던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부부가 개울을 지나 산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을 때, 인기척에 보면 마침 언니가 반대쪽에서 다가왔다.
"어머! 누구야? 지원이 손님 치렀니?"
"뭐야, 왜 거기서 와요?"
"아니 뭐, 왜? 저기서 오면 안 돼?"
"그쪽은 우리 대청마루 바깥쪽이랑 연결된 곳이잖아요. 거기 길이 없는데..... 뭐야? 설마 숨어 있었어요?"
"숨기는 누가. 내가? 왜? 나 이제 막 도착한 참이었는데."
"내가 혼자서 얼마나 당황하고 긴장했는지 알아요? 이상하네. 진짜, 왜......?"
"진짜야. 나 막 오니깐 막 나가던데. 근데, 저 남자는 풀을 왜 뜯어간 거야?"
"말 돌리는 거 보니깐 진짜 숨어 있었나 보네, 아니 왜?"
"아니라니깐! 이 풀이 먹을 수 있는 거라고? 그럼 뜯어서 이모 좀 갖다 줘야겠는걸."
"먹으려고 가져가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요?"
"저 많은 걸 그럼...... 키우려고 가져갈라고!"
언니는 흐느적대며 풀을 골랐다. 애써 흘기는 나의 눈빛을 피해 애먼 풀들을 잡아 뜯어댔다.
"그거 아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