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정원 19-1
"계세요? 언니들?"
인기척에 일어나 나가보니 정범이 와 있었다.
"아침부터 어쩐 일이에요?"
정범은 밭에서나 쓸 법한 외발 수레를 끌고 마당으로 들어왔다.
"죄송해요. 괜히 잠을 깨운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어차피 일어날 때 됐어요."
"뭐야, 깨우려고 부른 거 다 아는데 어디서 아닌 척하고 있어? 수레 주려고 왔어?"
언니도 주섬주섬 옷매무새를 만지며 밖으로 나왔다.
"아하! 무슨 그런 말씀을."
정범은 수레에서 전기 주전자 하나를 꺼내 주었다.
"제가 요즘 폐지에서 고물로 업무를 확장했거든요. 확실히 고물이 돈이 더 되더라고요. 이거 어때요? 쓸만하겠죠?"
"이런 거 말고, 전기난로 같은 거 갖다 줘. 곧 추워지는데, 그거 필요해. "
"네! 열심히 찾아볼게요.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바로 가시게요?"
"네. 어차피 집에 가는 길에 잠시 들른 겁니다."
"이따 점심에 이모네서 보자! 11시 30분까지 와."
" 왜요?"
"점심 먹게."
"이번에도 큰언니분이 사주시나요?"
"늦지나 말어. 근데 왜 자꾸 언니라고 불러?"
"어쨌거나 현재 나이로는 위긴 하지만, 그렇다고 누나나 누님이라고 부르긴 너무 낯 뜨거워서요. 제가 한참 위인데......"
"언니가 더 낯 뜨겁지 않니?"
"아뇨. 편한데요?"
"어떻게 한 참 아래인 제가 이렇게 반말하는 것은 괜찮겠습니까요? 조범 님?"
"옷이 날개라고, 외모가 변하니깐 저도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큰언니 외모로 저에게 존대를 하는 건 너무너무 불편합니다."
"확!"
"이따가 뵐게요. 전 그럼 이만!"
정범은 수레를 끌고 집을 나섰다. 안 본 사이에 언니와 정범의 사이가 친밀해진 듯 보였다.
"옷이 날개라는 말을 저럴 때 쓰는 거야? 확실히 좀 모질란 게 맞아."
"해석하기 나름이겠죠. 그런데 이 주전자에 마실 물을 끓이기에는 좀......"
"세숫물 끓일 때 쓰면 되지, 뭐. 근데 지원아. 네가 보기엔 진짜 조범이 어때?"
"저 진짜 관심 없다니깐요!"
언니는 갑자기 배를 잡고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그게 아니라, 진짜 그냥 좀 모질 한 사람인지 아니면 뭔가 음흉함을 숨기고 순진한 척하는 건지......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냐고......"
"전에도 말했잖아요. 제 느낌에 음흉은 아닌 것 같아요. 또 왜요?"
"축제 답사 갔다가 조범이도 봤었거든. 내가 한치 떨어져서 준영이를 보고 있었는데 반대쪽에서 조범이 도 준영이를 훔쳐보고 있었던 거야! 장난 아니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전기 주전자에 물을 담아 전기를 꽂았다. 전원에 불이 들어왔다. 언니는 왜 그렇게 준영이에게 집착하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다만, 또다시 반복되는 것 같아 기분이 별로였다.
"제삼자가 봤을 땐 언니 역시 준영이와 정범 씨를 번갈아 가며 훔쳐보는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았을까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말투에 날이 섰고 언니는 이내 눈치를 챈 듯했다.
"알았어! 그만할게."
마침 전기주전자에 전원불이 꺼지면서 물이 바글바글 끓었다.
"근데, 지원아. 이건 그냥 정말 궁금해서 그런 건데 준영이가 있는 곳에 조범이가 왜 항상 있는 걸까?"
"맙소사!"
"그렇지? 니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왜...... 거기에 언니까지 항상 있었을까요?"
대야에 팔팔 끓는 물을 부으며 언니를 쏘아보았다.
"물 잘 끓네. 사람들이 멀쩡한 걸 버리고 구래."
언니는 너스레 떨며 찬물을 섞어 세수를 했다.
"가을이라 그런가, 마루에 먼지가 많이 묻는 거 같아. 아침마다 이젠 여기 좀 청소하고 그래야겠지? 언제 손님이 올지 모르니깐. 지원아 걸레 어딨니? 따신 물 아까운데 걸레나 빨아야지."
******
"이모님, 저희 왔어요!"
합을 맞춘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의식적으로 오전에는 이모네로 왔다. 간단히 가게 청소도 하고, 이모님의 기분 상태도 확인했다. 가게 앞 평상에 가만히 앉아 이모랑 함께 채소거리를 다듬거나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며 오전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한 날은 동네 분이 일당을 준다며 곶감 만들 감 깎는 일을 부탁한 적도 있었다.
오늘따라 음식 냄새도 나지 않았고 이모님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모! 이모!"
"어디 가셨을까요?"
"어디 갈 데가 없을 텐데......."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언니는 주방 안쪽까지 이모를 찾아 둘러보았다. 그 쯤 가게문을 열고 이모가 들어오셨다. 외출을 하셨는지 옷을 차려입으셨고 낮은 구두도 신으셨다. 얼핏 보아도 마을 밖을 다녀온 차림새였다.
들 뜬 화장과 반은 지워진 흔적만 남은 립스틱 자국. 이모님은 얼마 만에 멋이란 걸 부렸을까!
갈색과 붉은색의 체크로 된 투박한 원피스와 스카프, 손가방까지 챙기신 듯했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이모! 이런 모습 첨이네. 이렇게 멋 내고 어딜 다녀오셨대? 데이트 다녀왔어?"
"점심 맞춰 서둔다고 서둘렀는데 늦어부렀네. 조금만 기다려."
이모님은 서둘러 목에서 스카프를 풀며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뭐야! 이렇게 멋 부리고 어딜 다녀온 건데? 자꾸 이렇게 비밀 만들 거야?"
언니는 넉살을 부리며 이모를 따라 주방 쪽으로 따라 들어갔다. 나는 이모의 멋이 보기 좋아 잠시 보다가 테이블을 정리했다.
이내, 이모님은 여느 때의 모습으로 점심상을 내어 주셨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청국장찌개에 무수한 반찬가지들로 보아하니, 아마도 오늘의 외출을 감안하여 어제 미리 준비를 해 두셨던 것 같았다.
"어서 들 먹어. 아휴 을마만에 구두를 신었는가. 발이 아파 누워야 쓰겄어."
"우리가 알아서 먹으면 되는데, 들어가라도 고생을 사서 한다니깐!"
"그래요, 얼른 들어가 쉬세요."
들어가는 이모님을 바라보는 언니의 표정에서 걱정스러움이 묻어났다.
"언니! 표정이 왜 그래요? 이모님은 어디 다녀오신 거래요?"
그때 정범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우와! 잘 먹겠습니다. 제 밥은요?"
언니는 으이그! 하는 표정으로 주방으로 가서 밥 한 그릇을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