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7년차.
20대 초반에 만나 우리는 수없이 많이 싸우며 그렇게 20대의 후반에 도착했다.
사실 말이 싸움이지, 예민함이 하늘 끝까지 솟아 뾰족뾰족 온몸이 가시를 두른 내가. 현남편, 구남친인 그를 못살게 구는 것이었다. 그저 사랑을 더 받고 싶으면 그렇다고 하면 될것이지 온갖 이유로 그를 닥달했다.
어쩌면 그시절 그가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은 것만도 어쩌면 감사할 일이었다.
실용음악과를 나와 직장생활을 하며 공부를 지속하던 나는 끝내 프리랜서로 자리를 잡아 일을 했다.
어느날은 어린이집에서, 어느날은 복지센터, 쉼터, 요양원, 초등학교, 특수학교 등으로 치료를 다니며
장애가 있는 친구들에게 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음악치료사였다.
그러던 어느날.
연애만 7년, 결혼 계획이 없던 우리에게 최후 통첩이 내려졌다.
주말마다 동네의 산으로 등산을 다니던 우리는 그날도 여느때처럼 주일 예배를 드리고 산을 터벅터벅 올라갔다. 나는 그에게 지난 주에 있던 아빠와의 대화를 이야기 했고, 결혼을 안할거면 곧 조만간 나는 여기서 하던일과 집, 그리고 남자친구까지 정리하고 본가로 돌아가야 한다며 우리의 관계 정리를 어찌하면 좋을지 그에게 물어보자 그는 생각보다 너무 쉽게 답을 내렸다.
"그럼 결혼해야지."
뭐라구..? 응? 내가 잘못들은게 아닐까 재차 물어도 그의 대답은 똑같았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은 결혼식을 일년 앞두고 천천히 하나씩 준비하기 시작했다.
평소 몸이 매우 약한 나는 아이라면 꿈벅죽는 그를 생각하며 산전검사를 받는 것도 준비의 일환이라 생각해 부끄럽지만 나이 서른이 다되어 내 발로 산부인과에 처음 방문을 했다.
검사결과는, 다낭성 난소라 난임이 예상된다고 임신이 쉽지 않을 거라며 1년 정도는 아이가 생기기 쉽지 않을터이니 피임도 하지말고 식이와 운동을 병행하며 몸을 만들 것을 추천한다는 소견이었다.
그 당시인 11년 전만 해도 내 나이가 되게 많은 줄 알았기에 (이 점은 훗날 산후 조리원에서 생각이 바뀌었다)
유럽으로 약 20일정도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내 식사 챙기는 게 제일 귀찮은 내가 밥을 때마다 맞춰먹고 쓰디쓴 한약을 열심히 챙겨먹어가며, 6시에 출근하는 남편을 따라 함께 나가 헬스장에 매일같이 출근하듯 아침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고 집을 예쁘게 꾸미며 그렇게 신혼생활을 보냈다.
이듬해 1월. 결혼 후 처음 맞는 남편 생일을 준비하다가 몸이 여느때랑 너무 다르게 안좋음을 느꼈다.
장을 보고 집에 와서 급하게 산부인과를 갔더니 몇주되지 않은 점 하나가 내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함을 확인했다.
신혼을 좀 더 즐기고 싶었는데 결혼 3개월만인 남편생일에 알게 된 아기의 존재.
첫 일주일은 아기가 생겼단 사실도 신기하지만 잘먹고 잘자는 내 몸상태에도 너무 감사했다.
어머, 나 임신이 체질인가 진짜 괜찮은데? 라며 남편과는 우스개소리도 많이해가며 참 즐거웠다.
그래도 부모님께는 아이 심장 소리 듣고 와서 말씀드리자며 자꾸만 말하고 싶은 입을 우리 둘 다 부여잡아가며 그렇게 또 2주를 보내고, 아이의 심장소리를 듣고 나서 양가 부모님께 말씀 드리니 모두가 나처럼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셨다. 알아요. 저도 그랬어요. 라는 말을 하고싶었지만 그저 웃었다.
임신 사실을 알고 처음으로 친구와 서촌까지 나가 시간을 보내고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길이었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더니 사람들의 냄새가 역하게 그리고 크게 느껴졌다. 이 느낌은 뭐지 이 냄새는 뭐지?
그 날이 시작이었다.
4주 하고 5일이 된 어느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