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덧이라는 것은 내가 그동안 봐왔던 것들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내가 아는 입덧이라 하는 것은 '우웩, 우웩'하는 헛구역질이 전부라 생각했는데
나의 입덧은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 그 이상인 것이었다.
갑작스레 모든 향과 냄새들이 날카로운 화살촉을 달고 내게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머리를 감으면 샴푸 냄새에 울렁거리고, 이를 닦으면 이를 닦다가 게워내고, 냉장고를 열면 쏟아져 나오는 온갖 음식에 괴롭고, 밥 짓는 냄새에도 하물며 곁에 있는 남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냄새 또한 참기가 괴로워졌다. 그러니 교회라도 갈라치면 아주 큰 마음을 먹고 가서 앉아있는 내내 정신을 혼미해하며 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신혼이었으니 집도 열심히 꾸미던 중이었고 하필 한창 제라늄 향에 심취해 있어 우리 집이 온통 제라늄 향을 풍길 때였는데 집안에 들어오면 그 사랑해 마지않던 향기가 내게 달려들어 나를 괴롭히는 것만 같았다. 정말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것만이었겠는가 모든 음식들이 속에 들어가면 울렁거림을 유발하여 다 게워내기 일쑤였다. 내가 지금 배를 타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만치 울렁울렁- 배멀미하는 기분으로 보내는 날들이었다. 음식을 먹을 수 없으니 속이 비어 아프고 기운 없는 날들이 점점 늘어가고 몸무게는 하루같이 빠져갔다.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은 임산부 맞냐며 안 그래도 작고 왜소한데 임신하고 살이 왜 더 빠지냐고 묻기 일 수였다. 병원을 가 선생님께 읍소 아닌 읍소를 해도 선생님은 어쩔 수 없다며 시간이 약이라는 말뿐, 어디서도 내가 위안을 받을 곳도 없다. 결국, 자다가도 욕실로 기어가 그나마 속에 남아 있는 것을 다 긁어 게워내다 못해 피까지 토해내는 나를 보며 남편은 임신을 중단함이 어떨까를 고민하며 권유하기 시작했으나, 너무 힘들어서 정말 딱 죽기 직전 상태 같으면서도 이미 심장소리를 들은 내 아이인데 임신 중단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가족들은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내가 쓸 수 있을만한 향기가 없는 일상용품들을 찾아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빌런은 계속 존재했는데 바로 내 코, 후각이었다. 어디서든 조금의 향이 틈을 비집고 나오면 있는 대로 내 속을 뒤집어대는 것이었다. 보다 보다 못한 친정부모님의 구조로 친정집에 요양하러 내려갔을 때엔 멀찌감치 꺼내 올려둔 두루마리 휴지향을 아무도 느끼지 못했는데 "엄마 어디서 향이 자꾸 나" 하며 토악질을 해대니 동생들은 나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하루하루가 괴로운 날들의 연속, 아이를 갖고 품는 게 이리 힘든 거였다면 시도조차 안 했을 건데 우리 엄마는 나만치 힘들지 않았다는데 난 왜 이리도 힘들고 괴로운 건지. 임신의 초반은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임무이고 큰 과제였다. 오죽하면, '이 녀석 나오면 엉덩이 한 대씩 때려주고 시작해야겠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생각보다 입덧의 시간은 많이 길어져 임신 후 5킬로가 빠졌다. 아직 우린 신혼인데 나는 사람 채취 자체를 불편해하니 남편은 침실도 들어올 수 없고 밤마다 잘 자라 인사하며 각자의 방으로 헤어졌다. 그렇게 겨우 잠이 들던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찢어질 것처럼 당기고 아파 눈을 떴는데 그 통증 끝에 무언가 안에서 배를 차고 있었다. 태어나 정말 처음 느껴보는 느낌이었다.
태동이었다.
병원에 쪼르르 달려가 물어보니 엄마인 내가 너무 살이 많이 빠져서 다른 산모들보다 빠른 주차에 아이가 움직이는 것을 느낀 것이라고 했다. 그 후로 새벽만 되면 배를 툭툭 쳐대는 아이 때문에 불편하지만 그 움직임이 또 너무 귀여워서, 못 먹어 아프지만 또 이렇게 이 아이는 잘 살아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아서 그래 다시 또 이것저것 먹어보는 시늉이라도, 노력이라도 해보며 또 마음을 다잡았다. 아이가 발을 차며 잘 노는 그 태동이 내게 힘을 준 것이 분명한 것은 훗날 아이를 출산해야 하는 날이 다가왔을 때에 다른 임신의 모든 상황은 내게 너무 버거웠지만, 아이를 내 품에 품고 있는 그 느낌을 줬던 아이의 발차기가 너무 그리울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사람들은 그럼 둘째를 또 가지면 되겠네라고 말했지만, 그게 아니라고요. 이 아이랑 나의 교감을 말하는 거지 다른 아이와의 교감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전.
갑작스레 와서 나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 놨던 입덧은 또 갑작스레 사라졌다. 무심결에 남편이 냉장고를 열었는데 그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아프지 않았다. 다만 그다음 스텝이 남아있었다.
죽음의 입덧이 떠나간 자리엔 새로운 통증이 찾아았다.
이번 주인공은 '가진통'이었다. 입덧이 사라진 6개월 즈음부터 출산을 하러 가던 그날까지 나는 밤마다 그리 아팠다. 오죽하면 2주에 한번 또는 1주에 한번 가는 병원을 1주일 동안 4번을 간 적도 있었다. 계속되는 가진통이 너무 괴로워서 이 상황이 말이 되는가 싶어서 그렇게 병원을 들락거렸다. 아이를 낳아 본 엄마들은 다 알겠지만 정말 이래도 되나 싶게 아프다가도 마치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아이처럼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전혀 아프지 않아서 내가 매일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기분이었다. 다시 내 옆에 누워 잘 수 있게 된 남편도 처음엔 매일 같이 일어나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러니 남편도 나도 낮에 온전한 생활이 되지 않았다. 출근하는 사람이라도 잘 자야지 싶어 앞으론 내가 지금 병원 당장 가자고 하는 거 아닌 이상 어지간함 그냥 자라고 남편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그리곤 매일 밤마다 혹시나 싶어 시계를 켜두고 가진통의 간격을 체크하고 다시 잠드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이건 입덧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길고 긴 입덧 때문이었을까 아이가 조금 작은 것 같아 고기를 많이 먹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심란해하며 동네 마트에 들어갔는데 마침 돼지고기 2킬로를 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팔고 있었다. 정육점 아저씨는 임산부가 소고기를 먹지 돼지고기를 왜요라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오늘만 달랑 구워 먹는 게 아니고 매일 조금씩 계속 먹어야 한다는 과제를 받았기에 거의 만삭의 몸으로 2킬로가 되는 고기를 이고 지고 우리 집이 있는 언덕을 올랐다. 지금도 남편과 이 시기를 회상하면 남편은 그 시기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집에서 해 먹을 수 없던 음식이라 생각했던 요리들을 엄청 다양하고 맛있게 해 줘서 진짜 신혼 같았고 좋았다며 말이다. 꾸준히 매일 같이 요리를 하며 고기를 먹어 그런가 아이는 잘 커가고 있었다. 더불어 입덧으로 빠진 몸무게는 임신 전 몸무게만큼 보다 아주 조금 더 찌며 회복도 되고 있었다.
예정일이 지났는데도 아이는 방을 뺄 생각이 없다. 첫아이는 원래 늦게 나온다던데 얼마나 늦게 나오려고...
키가 많이 작은 나는 이제 만삭의 몸이 너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늘 말라깽이로 살았는데 첨으로 발톱깎이가 어려워지고 나도 내 배가 터질까 무서워졌다. 매일 밤 가진통은 여전했고, 너무 불규칙하기에 가진통이 늘 확실하여 맘도 몸도 또 불편한 시기가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