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9월생이다.
아이를 낳기 전부터 생각했던 것이 있는데, 바로 돌잔치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돌잔치를 하는 비용으로 양가친지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기부도하고 우리 세 식구는 여행을 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었다. 다행히 나와 뜻이 맞는 남편과 사는 터라 내 결정은 순조로이 진행되었는데 딱 한 사람, 우리 시어머니만 ‘본전’을 운운하시며 아까워하셨더랬다. 그것을 잠잠케 한 것도 남편이었는데 ’ 우리는 주변에 결혼한 친구도, 애를 낳은 친구도 별로 없고 애가 기억도 못할 돌잔치 싫습니다 ‘로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아이의 첫 생일이 다가오고, 시가 식구들과는 값비싼 호텔레스토랑에서 거한 뷔페를 대접해 드렸고, 친정식구들(작은댁까지 함께)과는 강릉여행으로 여행을 가서 현지의 맛난 식사를 대접했다. 그리고 아이 며칠 전에는 구호단체에 직접 찾아가 아이의 이름으로 기부를 하고 소소한 돌잔치상을 받았다.
그리고 생일을 열흘 앞두었을 때 아이 생애 첫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괌.
비행기로 5시간이 걸리는 괌으로 가는 동안은 아이는 잘 자기도 하고, 잘 놀면서 갔다. 여행지에서도 역시나 한국부터 챙겨간 시판 이유식은 입도 데지 않았지만, 모유도 잘 받아먹고 조식으로 나오는 과일과 빵도 잘 먹어주었다. 물놀이도 실컷 하고 모래사장에서는 앉히자마자 모래를 입안에 넣어버려 투몬비치에는 발 한번 담그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모두가 즐거웠다.
문제는 돌아오는 비행기였다.
이륙 후부터 울기 시작하는 아이의 울음이 그칠 줄을 모르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코노미좌석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다. 겨우겨우 승무원들이 계신 구석으로 가서 젖을 물려도 아이는 이게 아니라고 도리질하며 울기만 하고, 나의 속은 검게 타들어갔다.
아무리 아이들이 많이 차있는 비행기라 할지라도 다른 승객들에게도 엄청난 민폐이고, 승무원분들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꼬박 모든 비행을 비행기 문 앞에 서서 아이를 달래며 왔다.
남편은 눈이 마주치는 모든 승객들에게 죄송하다며 인사를 했었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이가 계속 울어 정신없는 내게 남편이 자꾸 오는 게 썽이 났었다. 아이를 달래 수도 없으면서 괜찮냐고 말하는 게 너무 신경질이 났었던 것 같다. 민폐로 끝난 귀국 비행에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져 여행이 마무리되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금세 컨디션을 회복했다만 나는 며칠을 앓아누워있었다.
이게 우리의 첫 해외여행.
그리고 괌에서 돌아올 때의 악몽을 망각한 나는 우리의 두 번째 해외여행으로 아이가 5살이 되던 해에 베트남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