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기차, 바다, 술, 그리고
헌 옷을 수거하던 할아버지께서 찾아왔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소주 한병들고 놀러 오시던 분이셨어요. 겨울을 앞둔 날이었고, 평소 남자애들 치곤, 손자처럼 귀여운 말들을 했었는지 절 이쁘게 봐주시고, 이놈만 입으면 겨울 걱정은 하나도 없다고 하며, 농구 선수가 입었을 법한 선수용 롱패딩을 오천 원에 사라고 하셨어요. 몸에 패딩을 두르니, 이불을 덮은 듯 정말 온몸이 땀으로 젖을 만큼 따뜻했습니다. 그때 전 장난감 회사를 다니고 있었어요. 서른살쯤였던 것 같습니다. 정확히 장난감 회사의 창고에서 창고관리를 했어요. 창고 관리는 그 당시에, 쉽게 할 수 있는 일중의 하나였습니다. 장난감 회사라는 게 재밌어 보여서 가보았지요. 그때 제 삶이 창고 바닥에 널브러진 고장 난 장난감에서 마지막 숨결을 내쉬듯 지구를 지킨다는 지지직거리는 소리처럼 참 쓸모없었습니다. 할 줄 아는 게 있는지도 잘 모르고 살았던 시절이지요. 좋아하는 게 무언지도, 아니 좋아하는 것을 돈으로 연결할 생각은 안 하고, 그저 길거리에서 담배나 줏어피며, 어슬렁어슬렁 그런 날만 축내는. 네. 고장난 장난감처럼요.
A/S 전화가 옵니다. 관절이 몇 개 구부러지지 않는 단순한 장난감이었고, 그 장난감의 팔은 어깨로 이어진 팔만 360도 도는 장난감이었는데, 팔꿈치가 부러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장난감을 고쳐달라는 전화였어요.
그 장난감의 팔꿈치는 애초 태어날 때부터 굳은 팔이었고, 일자로 되어있던 아이였지요. 꼬마 아이의 손에 팔만 동그렇게 휘두를 수 있던 그런 장난감이었어요. 그 장난감의 팔꿈치의 해방을 위한 아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그 장난감은 외상을 입었습니다. 조그만 과자상자에 , 찢기듯 고장난 분리되어 있는 팔과 몸이 실려서 창고로 왔었지요. 부모님의 얘기는, 우리 회사는 아이를 위한 장난감을 만드는 회사지 않냐, 그러니 그런 마음으로 이것을 고쳐달라였습니다. 우리 회사는 장난감을 만들지도 않을뿐더러, 만든다고 해도 , 애초에 관절이 없이 태어난 이 장난감은 회생시킬 수가 없었지요. 장난감 앞에서 울었던 아이를 본 부모님은 분노를 느끼셨나 봅니다. 설렁설렁 장난감 창고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저는 그 분노를 누그러뜨려야 했고, 이해가지 않는 그런 부분을 별 의무감 없이 말도 안 되는 말로 설명도 해야 했고요. 아마 그 장난감은 원가가 천 원이 안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택배비는 2500원이지요. 택배비도 우리가 부담해서 보내라는 얘기에, 창고 앞의 마당에서 이쁘게 내리는 태양빛을 받으며, 폭발해 버린 저는 안 그래도 억울한 내 삶에 대해 품어왔던 분노의 바구니를 한 번에 쏟아내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악랄하고 괴팍하고 타협불가능하고 짐승 같은 소리를 질러대었습니다. 머릿속의 산소가 다 날아간 듯,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로 전화기에 대고 상대가 듣든지 말든지 그건 이미 상관이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시팔년이라고 번호를 저장해 두고, 언제든지 각오하라는 마음으로 그 부러진 팔로 된 장난감의 주인의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고스란히 저장해 두었지요. 물론 새 장난감으로 이쁘게 포장해서 보내주었습니다.
창고 안에는 고장난 장난감이 참 많았는데, 창고 구석 큰 박스 안에 차곡차곡 모아둡니다. 일이 없거나 한가할 때는, 장난감을 한두 개씩 꺼내어서, 창고장님과 함께 고칠 수 있는 아이들을 고쳐요. 하나도 전문적이지 않아도 가능한 선에서 하는 일이지요. 오른 다리가 없는 장난감에는, 오른 다리만 있는 장난감을 찾으면 가능한 그런 일이지요. 그렇게 짝을 찾아서 완성품을 만들거나, 도나 미 혹은 검정 건반들이 고장난 장난감 건반들을 고치는 건 어느 정도의 스킬이 필요했는데, 그것들을 하나하나 제대로 음이 나오게 하는 날은 참 뿌듯했습니다. 배에서 스펀지링이 총알처럼 나가는 장난감이 꽤 비싼 장난감 중 하나였는데, 스펀지가 안에 끼어서 리모컨으로 발사가 되지 않으면, 고장으로 여기고 버리듯이 보내는 그런 경우도 있었어요. 아이들이 욕조 위에 띄우고서 놀 수 있는 오리나 배들은 오래된 것들이 많은데, 건전지가 닿는 녹슨 부분을 깨끗이 닦고 나면 정상으로 사용가능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가장 스페셜한 장난감은 역시, 기차지요. 레일을 다 조립하고 나면, 꽤 근사했는데. 기차에서는 연기도 나며, 제법 웅장한 소리를 내며 레일을 돕니다. 완성된 장난감들이 그렇게 하나하나 쌓이게 되면, 발신자 없는 택배를 보냅니다. 그 순간이 가장 즐겁습니다. 포털을 검색을 해서, 고아원 리스트가 나오면 몇 개 고르거든요. 제 손끝에서 골라진 곳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잔뜩 보내는 거지요. 한 박스 가득 꽤 많은 양입니다. 그렇게 한 번씩 생명이 다시 채워진 장난감들의 아이의 손에게 들어가게 되는 재미가 참 좋았어요. 그 헌 옷 중 깨끗하고 따뜻한 롱패딩도 그런 식으로 제 옷에 걸쳐졌지요. 그 후 5년 정도 입었 던 것 같아요.
겨울마다 찾아오는 제 생일에 그 롱패딩은 제게 어느 곳인가 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건 생일 바로 전날에 생긴 마음이었는데, 생일날 겨울 바다를 보러 가자는 마음이 생겼어요. 혼자서요. 밤기차를 타고요.
멋진 롱패딩을 입은 제가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과 겨울바다와 파도들, 그것들을 감싸는 저의 생일. 막연하게 담고 싶은 마음에 적게 받은 월급에서 큰 지출을 마음먹고, 집 근처 하이마트에 갔습니다. 충동구매에 가까운 마음였지만, 절실함이 묻어서였는지 모르겠어요. 니콘에서 나온 똑딱이 카메라를 골랐어요. 꽤 레트로한 디자인이었는데, 하이마트 직원과 에누리를 했지만 바로 구매를 했습니다. 제 인생의 첫 카메라였지요. 그건 사진을 좋아해서도, 카메라가 좋아서도 아닌, 그날을 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출근을 해서 그날은 매뉴얼만 보았어요. 하지만 카메라 매뉴얼은 키의 이름이나 간단한 조작법, 카메라를 켜거나 끄거나 혹은 배터리를 충전하고 가는 법 정도가 다입니다. 그것들만 알면 내 생일은 완벽하게 될 거라는 믿음하나에 패딩 안의 제 몸에는 봄이 맺혀있습니다.
예매 없이 청량리역을 갔어요. 여행경험이 없고, 방법 또 한 모르던 제가 선택한 곳은, 귀로만 듣던 정동진이었고요, 그렇게 밤기차를 타러 갔습니다. 패딩을 입고, 카메라 하나를 들고요. 티켓 창구 맞은편 젊은 여자가 어디 가세요, 정동진이요?라고 정확히 들리게 또박또박 말을 하는데, 기계적인 말조차 두근거립니다. 티켓을 들고 안 잃어버리게 패딩 안에 있는 속주머니에 소중히 담고, 대기실 조그만 의자 근처에서 앉아있지 못하고 선채로 기다렸습니다. 아직 잘 모르는 카메라를 자꾸 켜보고, 킬 때마다 충전량이 줄어들까 봐 얼른 끄고요.
생수 한 병을 샀습니다. 목이 마를 것 같아서요. 패딩이 따뜻하니까요. 카메라에 달린 긴 끈이 제 목을 어색하게 대롱대롱 끌고 있으니까요. 기차가 도착할 곳 근처로 가서 기다리고 있으니, 기차역을 적시는 마이크에 맺힌 말이 나와요. 곧 그곳으로 가는 밤기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고, 언제까지 탑승을 해야 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란다는 말도 들릴듯한 이야기요. 안내 음성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티켓을 한번 쳐다보더니 앉아야 할 곳들을 찾아 흩어집니다. 모두 너무나도 차분하거나 익숙한 움직입니다. 매일 밤기차를 타는 사람처럼요. 밤기차는 이렇게 고요하고 침착하게 타야 한다는 걸 모두가 제게 가르쳐 주듯이 그렇게 줄은 흩어집니다. 카메라가 20년이 지난 만큼 그날 또한 20년이 지나서 그 밤기차를 타는 순간부터의 기억은 누군가 쓰다 남은 짙은 새벽용 푸른색 페인트를 가득 부은듯한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온통 푸르지만, 터지는 피처럼 붉은 점의 기억.
밤기차가 출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창가에 앉고 싶었는데 제 자리는 창가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조금 떨어져서 구경을 하는 사람처럼, 멍하게 지나가는 창밖의 나무들을 세어도 보고, 가본 적 있는 듯한 그런 마을도 반가워하고 그러면서 떠나기 시작했어요. 서울을. 기차는 모두 다 함께 타고 모두 다 함께 내리지 않더라고요. 기차는 중간 누군가 타고, 티켓을 한 번 보고 자리에 앉는 그런 거더라고요. 비어있는 창가의 자리가 안 오기를 바라면서 있는데, 어느샌가 여자 한분이 옆에 탔어요. 창가자리로요. 기차는 앞으로 가고 있었지만, 머리에 닿은 의자는 웬지 좌우로 흔들 거리는 듯해서, 혼자 타는 밤기차의 첫인상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어지러웠다고나 할까요. 네.
옆에 앉은 분은 애견용 가방을 무릎 위에 올리고 있었는데, 역을 몇 개 지나서 안에 넣어둔 이쁜 강아지 한 마리를 꺼냈어요. 저도 그때 강아지를 키우던 사람인 걸 알아보고 안전한 마음에 꺼냈을 것 같아요. 하얗지만 붉은 끼가 감도는 조그만 푸들 같았어요. 소리를 내지 않는 얌전한 강아지였습니다. 강아지를 쳐다보는 건 자연스러웠는데, 강아지를 안은 여자분의 옆얼굴은 몰래 보았습니다. 여자분은 강아지만 쳐다보고 있었지만, 제 시선을 느꼈으려나요. 여자분의 옆얼굴은 기억은 이랬어요. 통통했고 통통함에 비해 날씬한 속눈썹을 가졌습니다. 화장을 안 한 강아지를 쳐다보는 눈은 나이에 비해 성숙한 차분함이 있었고, 가끔씩 강아지의 뭔가를 보면 웃었습니다.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제 패딩에 비해서 세련되어 보였어요. 하지만 먼저 내리는 그분의 기차역을 보며, 새벽으로 잔뜩 차있는 잘 보이지 않는 그역 너머로 보이는 조용하고 울창한 산을 보며, 쓸쓸한 귀향길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급한 전화를 받았지만 차분히 준비하고 갔어야 했을 것 같던 개를 안고 가던 그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중간에 제가 가지고 있던 생수를 제 손바닥에 조금 담아서 강아지에게 주었어요. 날씬한 속눈썹만큼 균형 잡힌 도톰한 입술이 열릴까 싶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강아지의 혀끝을 손바닥 위에 담긴 물의 떨림으로 느끼면서, 혼자 하는 생일날의 바다로 향하는 기차에서, 꿈같은 만남을 잠깐 기대해 보며, 한편에는 이대로 이 추억으로 남고 싶어서 날 맘에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오천 원짜리 촌스런 패딩입은 카메라를 든 남자의 꿈이었지요. 그때 손바닥에 물을 담아 준건 나름 기특한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해요. 낭만 있잖아요. 어쨌든 그분은 고마워하며 강아지가 고마움을 대신해 준 거지요. 제게 고개인사를 하고 그렇게 어느 역에서 내린 후,
저는 창가자리로 앉았습니다. 바로 옆자리에서 보는 밖의 세상은 좀 더 시끄러웠어요, 세상이 지나가며 내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게 이쁘고 좋아서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요. 누군가 볼까 봐 창피해하며, 한 장을 찍고 끄고, 주위를 돌아보고, 또다시 마음에 드는 곳이 오면, 카메라를 켜지만 이미 지나간 의도하지 않는 곳만 찍어대며, 소리도 담았습니다. 기차가 세상을 핥는 소리를. 네.
밤기차의 칸들을 잇는 마디마디에 서있으면 더욱 거친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기차가 핥는 신음소리들이요. 그곳에서 피는 담배는 참 맛있습니다. 그 순간 제 패딩은 험브리 보가트가 입던 트렌치코트이고, 담배 피우는 저는 마치 클린트 이스트우드이지요. 끝도 없이 반복되는 기차가 내는 소리에, 기찻길이 내는 소리가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차보다 위대한 건 기찻길인 것 같습니다.
밤기차는 그야말로 새벽을 달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즈음에는 이미부터 잠을 자기 시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때 신기한 경험을 했어요. 옆자리 처음부터 같이 탔던 중년 남자분이 한분 계셨는데, 작업복과 여행복의 중간 어느쯤의 복장이었습니다. 의식을 한건 그분이 대자로 누워있는 모습부터 기억이 나는데요. 담배를 피며 오고 가던 중, 새벽이 짙어짐에 따라서 턱수염이 점점 자라나는 거예요. 제 담배 연기가 그분의 턱으로 스며들어서 수염을 자라게 한 것 같다고 할까요. 그분의 거무티티하게 진해지고 빳빳해지며 길어진 턱수염이 그날 새벽 달리는 밤기차의 기억 중에 가장 선명하고 재미있던 기억입니다. 그분은 아직도 밤기차에서 남의 자리에 다리를 올리고 잠에 들려나요. 이젠 하얀 수염이 나을 터지요. 제 턱수염사이사이에 나고 있는 흰색이랑 비슷하게. 네.
밤기차는 끝도 없이 갔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오래가는 만큼 저는 멀리 가고 있던 거예요. 정동진은 참 먼 곳입니다. 커다란 모래시계에 막힌 모래가 한알씩 떨어지는 시간만큼요.네.
새벽 5시쯤 도착을 한 것 같아요. 기차에서 내리고 나니, 방에서 문을 열면 거대한 바다가 바로 앞에 있는 것 같은 그런 식의 바다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파도는 더 넓은 바다를 집어삼키듯이 앞으로 소리를 내며 뒹굴고 있었고요. 정말 이쁜 푸른 바다였습니다. 그쯔음에 제 감정은 조금 식어 있었어요. 이별의 아픔에 나있던 딱쟁이도 사라지고 없던 터여서 그런지, 눈물이 글썽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지요. 그저 푸른 바다. 영롱하고 영원함의 색이 있다면 그런 빛깔일 거예요. 페일 블루 닷 이란 말이 생각이 나네요. 네.
사람들은 끼리끼리, 연인들이 많았는데. 어디론가 들어갔어요. 바로 앞에 바다가 있는데요. 너무 춥기도 한 날씨이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제가 태어난 날은 정말 추웠다고 어머님께 들었거든요. 안 춥고는 못 베기지요. 이날은. 전 바닷가에서 삼십 분 정도 바닷소리와 그 짙은 어둠에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안녕. 하고요. 오늘은 내 생일이야. 널 보러 왔어요. 하고요.
그리고 근처 국밥집에서 우거지 해장국을 먹었어요. 소주 한 병을 시켰습니다. 맛있게 먹었지요. 밖에서 바다가 점점 환해지는 기운을 기다리며, 해장국과 소주를 먹었습니다. 아침을 먹고 다시 바다로 나서니, 흩어졌던 연인들이 발그레한 얼굴로 한둘 모이기 시작합니다. 가족도 물론 있고요. 저만 혼자 같던걸요?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바다는 하던 파도짓을 계속합니다. 사람들이 모인다는 건 일출을 말하는 건데, 정동진의 크루즈호가 눈에 보이는 곳 즈음 바다 맞닿은 곳에서 시작을 알리는 뜨거운 점 하나가 오릅니다. 이때를 위해 준비한 카메라를 꺼냅니다. 푸른빛 바다가 바다에서 꺼내어지는 태양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태양은 마치 올라왔다가 다시 사라지며 약 올리기라도 하듯, 커졌다가 작아지기도 하고, 눈앞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지기도 합니다. 푸른빛과 싸우며 전사하듯 그 어느 빛조각으로 부서지며 하늘로 올라갑니다. 파도소리는 바다와 태양의 전쟁을 위한 장송곡이며, 제 생일을 위한 위안곡입니다. 저는 카메라를 들고 뻣뻣하게 서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찍으려고 노력합니다. 일출보다 중요한 건 바다 앞에 서 있는 저였고, 미역국 대신 먹은 우거지 해장국이 담긴 몸이며, 소주로 달아오른 뭔가 모른 울컥함이었어요. 앞에 태양은 떠오르는데 자꾸만 그 어디 하늘에 아직 있을 달을 찾고 싶은 마음과 함께요. 혼자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어느 친절한 여자분이 제 카메라를 뺏어서 제 모습을 찍어주었습니다. 어색했지만 웃으려고 노력했고 일출 앞에 장엄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요. 네. 그렇게 생일날 아침을 했습니다.
20여 년이 지났네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모두 돌아가시고, 2년이 지난 후에야 남은 유품을 정리할 용기가 났습니다. 그때 그날 찍었던 카메라를 찾았어요. 그 카메라로는 그날 하루 단 한번 찍었습니다. 다녀온 후 확인 한 사진들은 모두 다 아주 어둡거나, 떨린 손이 그대로 전달되는 파도들. 푸른빛만이 가득한 것들. 온통 푸른빛들. 밤기차가 핥고 지나가는 창과 부서지는 산과 집들. 파도들. 파도들. 우거지 국밥 한 그릇과 한병의 소주.
그리고 끝즈음에 찍힌 그 누군가의 정성으로 찍힌 오천 원짜리 패딩을 입고 어설프게 웃고 있던 나.
카메라는 켜지지 않았어요. 충전기를 구하면 켜질 수가 있겠지요. 켜지지 않는 카메라 안에 그것들은 제 안에 그대로 남아있기에. 저는 아버지와 어머님의 유품과 함께 보내주었습니다.
밤기차가 기다릴 거예요. 어느 제 생일날에. 그날은 멋진 사진을 담을 수 있을 겁니다. 그때와 다르게.
파도 소리를 듣고 싶어요. 그리고 국밥 한 그릇과 소주 한잔을 먹고 싶네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