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기적적인 일 3·1 독립만세운동 -
내가 고등학교에서 한국사를 배우던 45년 전에는 한국사는 가장 재미없는 과목이었다.
우리 학교의 국사 선생님은 유도를 하신 체육 전공자였는데 한국사 선생님으로 막 새로 시작하여 수업 시간에 국사책을 읽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학생들의 불만은 대단하였지만, 당시에는 교사의 권위가 하늘 같아서 감히 불평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지금은 수능인 학력고사 시험 전날 나의 취약 과목인 국사에 집중하였다. 전날에 국사 교과서를 완전히 정독했다. 그러나 앞뒤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막연히 외운 한국사 시험성적은 우수할 리가 없다. 국사 과목이 내 인생의 발목을 잡은 과목 중 하나였다.
최근 설민석, 최태성, 심용환, 선킴 등 재미나고 생생한 한국사를 설명해 주는 유명인들이 참 많다. 서울 도보 관광 해설에서도 선생님들의 수준이 아주 뛰어난 선생님들도 있다. 탑골공원에서 문화해설을 듣고 난 뒤 인터넷과 동영상 자료를 보면서 고등학교시절 흥미 없었던 과목인 한국사를 새로 공부해 본다. 동영상과 인터넷으로 공부하는 한국사 너무 재미있고 흥미롭다.
여기 브런치 스토리의 내용은 내가 공부하는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어서 잘못된 내용이 있을수 있으며 댓글로 지적해 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그리고 향후 더 자료를 찾아 알아보고 업그레이드할 예정입니다.
< 탑골공원에서 3.1 운동의 역사를 다시 공부하다. >
학교에 다니던 시절 한국사 교과서에서 3·1 운동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이름은 유관순 열사이고 손병희 선생, 최남선 선생, 한용운 선생 등이다. 3·1 운동을 공부해 보니 시대적 배경과 많이 알려지지 않은 숨은 주역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송계백, 송진우, 정재용, 이종일 등이 숨은 주역이었다.
독립운동과 3·1 운동의 처음 모태가 된 곳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상해의 ‘신한청년당’(1918.11.28.)이었고 <한국독립에 관한 진정서> 2통을 작성하여 미국 대통령 윌슨과 파리평화회의 의장에게 전달해 줄 것을 크레인에게 의뢰하였다.
재미교포들은 1918년 12월 1일 <재미한인 전체대표자 회의>를 열고 파리평화회의에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등 3인을 한국 대표로 보내기로 결의하였으나 미국 정부가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아 실현되지는 못했다.
재일본조선유학생학우회도 <조선 독립청년단>을 구성하여 1919년 <2.8 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독립운동하던 분들이 세계정세에 밝아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하였다.
국내에서 처음 불이 지펴지고 들불처럼 일어난 것은 YMCA소속 학생들이었고, 학생들의 고귀한 뜻을 잘 연결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인 곳은 학교와 종교계였다.
< 3·1 운동의 불을 지핀 숨은 주역들, 송계백, 송진우... >
독립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것은 일본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이었다. 세계정세에 먼저 눈을 뜬 유학생들은 1차 세계대전 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고무되어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학생들이 처음 계획을 하였고 2.8 독립선언을 한 것이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송계백은 비밀리에 입국하여 보성학교 1년 선배인 현상윤 선생님을 찾아 이 사실을 알리고 현상윤 선생님은 중앙학교 송진우 교장을 찾아 일본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의 취지를 알린다. 송진우는 정치적 평생동지이자 친구인 김성수, 현상윤, 보성학교 교장 최린과 함께 중앙학교(현 중앙고등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독립선언과 3.1 만세운동을 기획하였으며 일본에 유학 중이던 송계백으로부터 일본 도쿄의 상황과 정보를 입수하기도 하였다. 최린은 당시 천도교에서 설립한 보성학교의 교장이었고 송계백의 보성학교 시절 선생님이기도 했다.
보성학교 최린 교장과 중앙학교 송진우 교장은 천도교 손병희, 불교계 한용운, 기독교 이승훈을 참여시키고 기미독립선언서 기초자로 최남선을 추천하는 등 기획 과정을 주도했으며, 또한 3·1 운동의 3원칙으로 대중화와 단일화, 비폭력을 제시하였다. 이후 최린은 친일인사로 변절하여 ‘가야마 린’으로 살았다. 최남선도 변절하였다.
3·1 운동은 손병희를 위시한 천도교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가톨릭과 유교는 각 단체의 이해관계로 참여하지 않았고,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침투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두 명만이 참가했다. 반면 개신교는 개신교 내의 민족/독립운동을 탄압하는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대한 반감이 올라가 있던 상황이라 천도교의 제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결국 천도교 15인, 개신교 16인, 불교인 2인으로 33인의 민족 대표단이 결성되었다.
< 3·1 운동의 불꽃을 태운 숨은 주역들 정재용, 이종일 >
민족 대표 33인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계획이었지만 폭력 사태 우려를 반영하여 태민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은 한용운의 선창과 함께 이루어졌고 독립운동가 정재용(1886∼1976) 선생 역시 팔각정 단상으로 올라가 기미독립선언서를 읽어 내려갔다. 이 모습을 보고 격앙된 학생, 시민들이 동참하면서 3.1 만세운동의 물결이 서울을 넘어 전국으로 퍼지게 됐다. 정재용의 낭독이 없었더라면 수많은 군중은 흐지부지 흩어지고 말았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정재용이 나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용기를 보여주어 만세운동의 불길이 살아났다.
당시 민족 대표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던 천주교에서는 성당을 개방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신변을 보장해 주어 간접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일본 경찰에 아무도 밀고하는 사람이 없어 순조롭게 만세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다.
3만 5,000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찍어낸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일기 묵암 비망록에 이렇게 적었다.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지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대로 일어나 오늘의 거사가 반드시 성공하기를 두 손 모아 빌었다. 이종일은 홀로 남겨질 어린 손녀(이장옥) 생각에 가슴이 아려왔지만, 성사(聖師·손병희)가 전날 민족 대표들과의 최종 회합에서 “가족 생활비로 1인당 매월 10원씩 지급할 것”이라고 약속한 말로 위안을 삼았다.
< 고종황제는 독살되었을까? >
3·1 운동의 결정적인 도화선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2·8 만세운동, 그리고 고종의 독살(?)설이다. 고종의 독살설은 사실일까? 일본을 배척하고 친러 내각을 계획했던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한 일본제국주의가 고종을 독살했을 것 같은 심정은 충분하다. 나무위키에서 찾아보았다.
고종은 1월 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사망했는데, 뇌출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설이 있는 반면, 그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다. 요즘처럼 의학이 발달해 부검을 한다면 쉽게 밝혀질 수 있는 진실이 의도적으로 묻혔다.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년 10월 13일 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윤치호와 한진창에 의하면
1.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2.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 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고 했다.
거사일은 3월 1일로 정해졌다.
3월 3일이 고종의 장례식이 있어 불가하였고 3월 2일은 일요일이라 종교활동 하는 사람들이 많아 어려운 날짜 이어서 3월 1일 토요일을 거사일로 정했다고 한다.
해설사 선생님은 일본어를 능통하게 하여 일본인들에게 문화해설을 한다고 한다. 탑골공원 조각상중에서 일본인들이 잘 물어보는 조각상이 하나 있다고 한다.
일본 경찰이 한국 여성의 머리를 말꼬리에 묶고 끌고 다니는 벽화인데 이 장면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것인지 묻는다고 한다. 일본인들도 일본 경찰의 잔인한 행동에 놀라면서도, 그들의 선조가 한 잔인한 행동에 대해 대신 사과를 잘한다고 한다. 한국에 관심이 있는 일본인들은 점잖고 교양이 많은 사람이겠지.
< 독도가 일본 교과서에 실린 이유가 궁금하다. >
해설사 선생님은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도보해설관광도 하신다고 한다. 그러면 꼭 물어보는 질문이 하나 있다고 한다.
“독도는 일본 땅입니까? 한국 땅입니까?”
도보 해설 관광을 오는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독도가 한국 땅인 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당연히 대답은 ‘한국 땅입니다.’라고 답을 한다고 한다.
그러면 해설사님은 또 이어 질문을 한다고 한다.
“그러면 독도가 한국 땅임을 일본인 대부분도 잘 알고 있는데 국가 간의 갈등을 일으킬 수 있게 왜 교과서에는 일본 땅이라고 명시해 두는 거죠?”
이 질문에 소름이 돋는 답을 하였다. 역사는 기록에 근거하고 그 기록으로 후세 사람들이 자기 땅이라고 다툴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일본 사람들의 집단적인 이기심을 잘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취향을 더 중요하게 여기지만 일본 사람들은 개인의 이익보다는 집단의 이익에 더 우선하는 가치를 두는 것 같았다.
자료를 찾아보니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적었던 일본의 검정 교과서는 2020년 17종 중 82.4%인 14종이었다가 이번에는 88.9%인 16종으로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지리 교과서를 위시해 역사, 공민(사회) 교과서 등 대부분의 교과서가 그 대상이다.
일본은 항일의 대상이 아니라 넘어야 할 극복의 대상임이 분명한 것 같다. 도저히 한국은 당할 수 없는 나라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인생이란 참으로 불공평하여
억울하게 못나고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은 내가 정할 수 없지만
인생이란 참으로 공평하여
나를 위해, 가족을 위해, 의롭게 죽는 것은 내가 정할 수 있다.
친일과 독립투사 선택지를 받게 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본다.
조국을 위해 의로운 죽음을 선택하신 선조 님들께 머리를 숙여 명복을 빕니다.
P.S. : 동아일보 창업자 김성수도 친일언행을 하였으며, 고려대 초대총장을 지낸 현상윤도 창씨개명은 거절하였으나 친일언행을 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광수는 '가야마 미쓰로'로 창씨개명하여 친일파로 분류되었다.
사진설명_ 인사동 경인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