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갑 갤러리 관람을 마치고 점심 먹으려 메밀 국숫집을 들어선다. 점심때가 늦은 시간이라 손님은 없다. 식당이 깔끔하고 주인의 품의 있는 말씨가 인상 깊게 느껴진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수강생과 학생의 아버지를 앉혀놓고 수업을 하는 중이다. 얼핏 들으니 논술 수업인 것 같다. 부산 기장에서 몇 년 전 옮겨와 밀감 농장과 식당, 과외수업을 함께 하고 있단다. 탁자 위에 두터운 지도책이 놓여 있다. 지중해 지도가 펼쳐져 있다. 그 옆에 명리학 책도 보인다. 아무튼 안심식당 인증 음식점으로 지정된 깔끔한 식당에서 메밀국수를 기분 좋게 먹었다.
삼달로 버스 길가로 이어지던 올레는 엘리시움 펜션 앞에서 다시 농로로 들어선다. 차가 지나다닐 수 있는 넓은 밭담 길이다. 농가가 띄엄띄엄 보인다. 축사에서 노는 소를 보고 카메라를 들이댄다. 소의 눈이 왠지 긴장한 듯하다.
월동무와바다목장
성산 월동무. 삼달리는 들이 넓다. 주로 밀감 밭과 무밭이다. 넓은 무밭의 초록은 눈을 시원하게 한다. 미끈하게 자란 무가 올라오고 있다. 무는 배추, 고추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채소로서 다양한 소화 효소를 함유하고 있어 소화촉진과 강장에 효과적이다. 또 몸속의 독을 없애주고 가래를 가라앉힌다.
제주 동부 일대에서 나는 월동무는 당도가 높고 육질이 아삭아삭하며, 수분이 풍부하고 비타민 C를 많이 함유하고 있어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월동무는 성산읍 지역 대표 월동 채소다. 채소가 귀한 한겨울과 이른 봄에 수확하여 천연 지하 암반수로 세척하여 출하되고 있어 소비자에게 인기가 높다.
무밭 너머로 태양광 발전 시설이 있다. 바람이 잘 통하게 쌓은 돌담을 따라가면 일주동로를 만난다. 신풍 교차로를 건너 신풍 포구로 내려선다. 어촌계 식당 앞에서 올레B코스와 합류한다.
바다목장. 남은 길은 해변을 따라 이어진다. 뒤를 돌아본다. 푸른 바다 건너 성산일출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신풍리와 신천리 해변의 오른쪽으로 약 10만 평의 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초원 너머로 한라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초원은 띠와 들꽃으로 덮여 있다. 바닷바람에 맞춰 띠가 춤을 춘다. 넓은 초원이 온통 들꽃이다. 갯쑥부쟁이가 반이고 잔디와 띠가 반이다.
물빛 바다와 풀빛 초원이 어우러진 목장의 한가로운 풍경이 이국적이다. 바다목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색다른 풍경이다.
예전에는 ’신천마장’이라 불리는 마을 공동 말 방목장이었는데, 지금은 사유지다. 날씨가 추워지자 방목하던 소는 축사로 들어가고 초원에는 건초 뭉치만 보인다. 바다목장을 지나가던 올레꾼들이 모여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해변은 현무암의 검은여가 넓게 펼쳐진다.
기암괴석을 요리조리 돌아가며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다. 겨우 차례가 되어 한 컷 찍는다. 물 위에 떠 있는 오리 같기도 하고, 남쪽 바다를 지키던 이순신의 거북선 같기도 하다.
야생화와 야생초의 가을잔치
바다목장의 초원이 끝나면 해안도로의 오른쪽은 무슨 무슨 수산이라는 양식장이 줄지어 있다. 이들도 스스로를 바다목장이라 한다. 올레길은 왼편 현무암 무더기 길과 해안도로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나아간다.
쥐똥처럼 생긴 열매가 익어가는 우묵사스레피 나무가 해변 언덕을 뒤덮고 있다. 그 사이로 난 돌무더기 길을 걷는다. 우묵사스레피는 제주도, 전라남도 및 경상남도 남쪽 해안가에 무리를 이루고 자란다. 꽃말이 '당신은 소중합니다'인 차나무과의 상록 활엽 관목이다.
이어지는 양식장으로 따분한 도로가에 현무암 해안의 바다 풍경과 더불어 들꽃들이 소박한 가을잔치를 벌인다.
왼쪽 위로부터 시계침 도는 방향으로 털머위, 갯쑥부쟁이, 태양국, 유카
털머위. '한결같은 마음'으로 제주도 전역에 무더기로 피어 있는 털머위는 '다시 찾은 사랑'을 위해 갯강활과 임무 교대한 것 같다. 해안을 독차지하고 있다.
갯쑥부쟁이. 꽃말이 '그리움, 기다림'인 갯쑥부쟁이도 단조로운 길을 화사하게 만든다.
태양국. 남아프리카가 고향인 정열적인 태양국이 노란 꽃을 피우고 올레꾼들의 인사에 '미소로 대답'한다.
유카. 흰색 꽃이 아래로 향해 반쯤 열려 있는 유카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가지에 많은 꽃을 달고 있다.
해 질 녘의 배고픈 다리
배고픈 다리. 한라산에서부터 흘러내려온 천미천은 표선면 하천리와 성산읍 신천리의 경계다. 그 천미천의 꼬리 부분에 다리가 있다. 고픈 배처럼 밑으로 쑥 꺼져 있다고 '배고픈 다리'라 불린다. 얼마나 해학적인 작명법인가. 다리 이름에서 고달픈 생활 속의 여유가 엿보인다.
배고픈 다리 건너편에 해신당이 보인다. 신당인가 하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다리를 건넌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해신당, 본향 당산, 한국불교 등이 뒤섞여 있다. 자세히 보니 묘점, 신점, 병굿, 신굿도 쓰여 있다. 점집 굿당을 해신당으로 지레짐작했던 우리가 마주 보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해가 짧아진 데다가 김영갑 갤러리에서 시간을 보낸 것이 발걸음을 재촉하게 한다. 서쪽 하늘이 불그스름해진다.
불턱여. 옛날에는 무명천으로 만든 해녀복을 입고 물질했단다. 겨울철 긴 시간 물질하다 밖에 나와 불을 피워 언 몸을 녹이고 옷을 말리던 휴식장소, 불턱여다.
해변에서 언덕 위로 올라선다. 드라이브하던 사람들이 해안도로가에 차를 대어놓고 해 떨어지는 것을 기다린다.
양식장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솟구치는 곳에 철새들이 모여있다. 양식장에서 방출되는 물은 따뜻하고 먹잇감이 많다. 양식장 주변은 갈매기와 가마우지, 청둥오리 등 겨울철새들이 겨울나기에 부족함이 없다.
멀리 갯바위에 낚시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그림처럼 보인다. 갯바위에 앉아 있는 낚시꾼의 모습이, 해질녘인데도 집을 찾아가지 않고 모여 있는 철새 떼와 다를 게 없다.
활엽 관목이 만든 터널 사이로 난 소로와, 야자수, 유카가 심어진 돌무더기 해변이 몇 차례 번갈아 나타난다. 주변의 수목을 살핀다. 모양이 비슷비슷하여 헷갈린다.
돈나무, 굴거리나무, 까마귀쪽나무, 우묵사스레피가 뒤얽힌 상록 활엽수가 우거진 숲 속으로 들어간다. 서쪽 하늘이 붉게 타오르는 듯하더니 금세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걷는다.
표선해수욕장의 야경
올레길은 표선 해안사구로 이어진다. 이 지역은 3~ 6월경에 흰물떼새가 알을 낳는 곳이다. (사)제주올레가 출입 시 알이 훼손되지 않도록 올레꾼의 주의를 당부한다.
날이 어두워져 더 이상 걷기가 어렵다. 표선리 교차로에서 걷기를 멈추고, 다음 날 다시 올레3코스 종점까지 이어간다. (2022. 1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