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방폭포. 폭포 아래쪽으로 무지개가 떴다. 서귀포 하면 정방폭포라 할 정도로 유명한 관광지다. 정방폭포는 폭포수가 수직 절벽에서 곧바로 바다로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폭포다. 진시황의 사자 서불이 한라산의 불로장생초를 구하려 왔다가 정방폭포를 지나며 정방폭포 왼쪽 위 바위에 '서불과지'라 새겨놓고 갔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정방폭포
서복전시관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 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 : 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 놓고 서쪽(중국)으로 돌아갔다.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불려지게 된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서복전시관 소장
조선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목사 백낙연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 문자인 과두문자여서 해독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 서복 전시관
서복전시관에 전시된, 추사 김정희의 탁본을 참고하여 만든 '서불과지',
서귀포에서 1840년부터 8년간 유배생활을 한 추사 김정희가 이 글자를 탁본하였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지만 탁본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다. 사진으로만 전해진다. 정방폭포 옆에 새겨진 글자나 서복전시관에 전시된 글자는 이 사진을 토대로 만든 것이다. 원래의 새겨진 위치조차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나 여러 기록으로 볼 때 글자가 조선 후기까지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진시황과 불로초, 서복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는 (중국의 동쪽인) 한국과 일본의 해안 지방이 여러 곳 있다. 유일하게 현존하는 남해 금산의 바위에 새겨진 '서불과차(徐市過此)'라고 추정되는 글자가 있고, 부산 영도 봉래산에는 불로초 공원이 있다. 제주 조천포는 서복이 제주도에 도착한 첫 번째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사가현에 서복 전시관, 와카야마현에 서복공원과 서복의 무덤이 있다. 서귀포의 서복전시관은 중국 관광객의 필수 관광 코스다.
왈종 미술관
정방폭포 매표소 앞에 이왈종 화백의 작품을 전시하는 왈종미술관이 있다.'제주생활의 일상을 중도적 관점에서 그려온 이왈종의 그림과 목조와 부조, 도자기, 테라코타 등 다양한 기법과 방법으로 표현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 화백의 작품은 모두 '제주생활의 중도'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 화백은 '중도란 평등을 추구하는 나 자신의 평상심에서 시작된다. 욕심을 버리고 집착을 끊어 중도의 길을 걷자. 좋은 작품은 평상심에서 나온다.'라고 말한다.
요가하는 사람, 개에게 밥 주는 사람, 지저귀는 새 모습, 사랑하는 남녀, 남편과 마주 하고 앉아 잔소리하는 아내, 고기 잡는 어부, 북 치는 무녀ㆍㆍㆍ이 화백은 이 작품들을 통해 지극히 일상적인 삶이 가장 큰 행복임을 관람객에게 알려준다.
소암 기념관
서예가 소암 현중화 선생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기 위한 문화공간이다. 바람, 달, 구름, 물, 대나무 등의 자연을 주제로 한 소암 선생의 서예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소암 현중화 선생은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태어났다. 도일하여 마츠모토 호우수이, 쓰치모토 시유우 문하에서 서예 수업을 받고, 일본과 제주, 서귀포, 마산, 부산, 대구 등에서 서예가로 활동한다.
淸風拂白月(청풍불백월)
맑은 바람이 하얀 달을 씻네
心如雲水(심여운수)
구름이나 물처럼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
구름은 봉우리를 돌아 흘러가고
샘물 소리에 나오는 대나무 굶 뜨네
지금 끝없는 내 마음속 생각은
오직 비췻빛 새만이 알고 있겠지
소암 현중화 선생 상
송산마을 복지회관이 소암 기념관 근처에 있다. 지방선거 사전투표를 한다. 올레꾼들의 사전투표소 같다. 투표소 찾는 사람들이 대부분 올레길 걷는 외지 사람들이라 아예 송산동 주민센터 직원이 사무실 앞에 나와 투표소를 안내하고 있다.
송산마을 복지회관에서 지방선거 사전투표를 한다.
투표를 마치고 먼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서귀 진지로 간다. 역사의 흔적을 더듬는다.
서귀진성 터. 서귀진은 탐라 십경의 하나로, 조선시대 제주의 방어 유적지인 3성 9진의 하나다. 북성 안 중앙에 객사를 두고 좌우로 진사, 무기고, 사랑방, 군관청, 창고 등 11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남천록」은 기록하고 있다.
서귀진성 터
1901년 서귀진성이 폐지된 후, 관아 건물은 정의공립보통학교, 서귀포 심상소학교 등으로 사용되었다. 4ㆍ3 사건 때는 마을 방어를 위한 4ㆍ3성을 쌓는데 이용된다. 2000년에 도지정문화재가 된다.
이중섭 기념관
이중섭 가족은 1·4 후퇴 때 원산을 떠나부산에 잠시 머문 뒤, 정부의 피난민 소개 정책에 따라 서귀포에 도착한다. 1년여 머문 서귀포는 이중섭의 작품세계에 대단히 주요한 공간이 된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이중섭
암울한 시절, 이곳 서귀포에서 예술혼을 불사른 천재화가 이중섭을 기리기 위해 서귀포시는 1996. 3월 이중섭기념관을 개관하고 이 거리를 '이중섭거리'로 지정하였다.
이중섭 가족이 기거하던 초가의 1.4평의 작은 방
이중섭 가족이 정착한 곳은 서귀포 서귀동 512-1. 알자리 동산 마을 이장 송태주, 김순복 부부의 배려로 1.4평의 작은방에서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네 가족이 머물렀다. 1997 서귀포시에서 이중섭이 거주했던 집을 매입하여 복원하였다.
이중섭은 이곳에서 '서귀포의 환상', '닭과 게',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대향 전시실」에는 생전에 그렸던 그림 사본 17점이 걸려 있다.
닭과 게
전통미와 현대적 감각이 조화를 이룬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가진 이중섭은 한국 근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독보적인 인물이다. 암울한 시대와 불우한 환경, 비극적 삶 속에서도 한국 미술사에 빛나는 족적을 남긴 이중섭. 하지만 과대평가되었다는 설도 있다.
1층 기념품점에서 '길 떠나는 가족'이 그려진 시계 하나 샀다.
이상촌을 향해 길 떠나는 이중섭 가족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꽃을 뿌리고 비둘기를 날리는 소달구지 위의 여인과 두 아이. 하늘에는 한 가닥 구름이 그려져 있고 소를 모는 남자는 고개를 젖히고 감격에 겨워한다.
미술관 아래 이중섭 공원이 있고 이중섭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10월이면 이중섭의 사망 주기를 맞아 그의 예술혼을 기리는 '이중섭 예술제'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