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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굼부리_저지오름 가는 길

올레13길, 용수에서 저지 예술인마을까지

by 정순동

해안가를 이어오던 제주올레의 리본은 용수포구에서 바다와 작별 인사를 하고 내륙으로 들어간다. 용수저수지와 밭길, 작은 숲으로 이어가던 올레길은 아홉굿 의자 마을 낙천리를 지나서 저지오름을 오른다.




우리는 전날 일정을 마친 일주서로 용수리 충혼묘지 정류소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사방이 농작지다. 인적이 없다.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는 차 두대가 비켜 지날 수 있는 제법 넓은 길인데, 농사짓는 농군도 길을 걷는 올레꾼도 보이지 않는다. 들머리부터 햇볕은 따갑고 나무 그늘도 없는 고단한 길이 시작된다.




순례자의 교회, 길 위에서 묻는다.


300m, 4분여 걸었는데 단조롭게 여겨지던 길가에서 뜻밖에 작은 예배당을 만난다.

트로이 목마처럼 생긴 작은 교회가 서 있다.


키가 낮은 돌담.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

건물 뒤에 나지막하게 세워진 십자가.


자신을 드러내기에 익숙한, 보통 보던 개신교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겸손한 교회다. 정기적인 예배도 없다. 담임 목사도 없다. 출석하는 교인도 없다. 그냥 문을 열어놓고 '어서 오라'며 반긴다. ‘순례자의 교회’다.


길 가던 사람 누구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 예배당이라기보다 쉼터에 가깝다.

나는 누구인가?

길 위에서 묻는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신에게 묻는다.

- 순례자의 교회 -


잔잔한 울림이 있다. 불자인 아내는 감동을 받은 듯 두 손을 모은다.


순례자의 교회를 나와 폐경지로 보이는 습지가 드문드문 보이는 채소밭 길을 걷는다. 전날 지나온 당산봉을 옆으로 보면서 걷는 길이다. 찔레꽃 나무와 덩굴성 식물이 뒤얽힌 잡목들이 도로변을 차지하고 있다. 곳곳에 비닐하우스 농가가 있다.

시멘트로 된 농로를 따라가는 지루함을 덜어 주는 볼거리가 나타난다. 하얀 벽에 빨간 대문을 단 깜찍한 집이다. 마당에 이곳이 제주임을 알리는 키 큰 야자수가 서 있다. 커다란 드럼통을 삼각형으로 쌓아 만든 아래채가 있다. 팔강, 파랑, 초록의 원통 모양을 한 집이다. 이렇게도 집을 지을 수 있구나.



용수 저수지


길은 용수저수지를 만난다. 주차장에 환경청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저수지 물을 담아서 둑을 내려온다. 수질관리를 위한 시료를 채취하는가 보다.

"이 저수지요, 1957년에 만든 겁니다. 오시던 길가에 물을 담고 있는 구릉이 많지요. 비교적 큰 용적의 구릉에 제방을 쌓아 만든 저수지인데요, 주변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지만 관수시설이 없습니다. 물을 나르기가 불편하여 농업용수로 사용되는 양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직원은 몇 년 전, 대구대학교에서 조사했다며 말을 이어간다.

"물 위에 마름 군락, 물참새피 군락이 있고, 주변에는 부들 군락, 아기 부들, 갈대 군락이, 물속에는 검정말 군락이 있습니다. 겨울에는 철새들이 많이 옵니다. 황새, 백로, 왜가리, 바다오리 등이 관찰됩니다. 잉어, 붕어, 미꾸라지들도 살고 있지요"


수면에 비친 구름이 주변의 경관을 돋보이게 한다. 멀리 환경감시선이 저수지를 순회하고 있다. 시료를 담은 병을 챙긴 직원은 '이 부근의 버려진 논에 광범위하게 분포한 습지는 습지 생태계의 보고'라는 설명을 덧붙이며 차에 오른다.

멀구슬나무. 구주나무, 구주목이라고도 하는 낙엽 활엽 교목이다. 꽃말은 '경계, 의견 차이' 등으로 알려져 있다.

저수지 제방에는 멀구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멀구슬나무의 열매는 독성이 있지만 조류에게는 좋다고 알려져 있다. 이 열매의 핵으로 염주나 묵주를 만든다. 또 길섶에는 꿀풀이 진분홍 꽃 뭉치를 달고 올레꾼의 눈길을 끈다. 자그마한 벌노랑이도 보인다. 올레길은 저수지 북쪽을 둘러 지나간다.



올레길은 작은 숲길로 이어진다.


들판의 보리는 다른 지역과 달리 아직 여물지 않았다. 청보리가 바람에 일렁인다.

길옆에는 담장나무, 소밥나무라고 불리기도 하는 상록 활엽 덩굴성 식물인 송악이 포도송이 같은 열매를 달고 돌담을 덮고 있다.


선녀가 목욕하고 하늘로 날아간 곳, 선세비(仙洗飛)라는 작은 호수를 지나간다. 마늘대를 베어 밭에 열 지어 눕혀 놓았다. 호박이 비닐을 비집고 나온다. 이제 숲길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올레 리본은 농로를 지나 아스팔트 2차선 차도로 안내한다.

제주올레가 야심 차게 개척한 특전사 숲길이 사유지라 통제된다. 우회하는 길이 아스팔트 길이다. 가장 걷기 힘든 길이 아스팔트 길이다. 작은 숲길을 드나든다. 쪼른 숲길, 고목나무 숲길을 빠져나와 또 콘크리트 포장길로 연결된다. 밭에는 부부가 마늘을 수확하고 있다.


"거기 숲 속으로 들어가야 해요."


일하느라 여념이 없는 아저씨가 (길을 잘 못 가는 것을) 언제 보았는지 낫을 든 손으로 고사리 숲길 입구를 가리킨다.

숲길 양옆으로 개고사리가 땅바닥을 덮고 있다. 고사리 숲길. 제주올레에서 지은 이름이다. 고목나무 숲길이라 명명된 길에 사실 고목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고사리는 많기는 하지만 제주도의 웬만한 숲에는 이 정도 고사리는 있다.



낙천리 아홉굿 의자마을


조용한 마을 낙천리에 들어선다. 올레 리본은 오거리 로터리에서 낙천리 사무소 쪽으로 바로 가지 않고 연꽃이 피어 있는 작은 연못 옆을 둘러서 들어간다.


삼거리에 140여 년이 된 팽나무 정자목 한 그루가 마을을 지키고 서 있어, 동네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한다. 가지 위에 동네 소식을 전하는 나팔 모양의 혼형 스피커 두 대가 걸려 있다.

낙천리 중앙에 연못이 있다. '낙천 아홉굿 의자마을'이라 쓰인 큰 의자가 못 한가운데 설치되어 있다. 마을 기운을 모우는 명당수인 '저갈물(저거흘)'이다. 이 연못은 원시림이 우거졌던 옛날에 웅덩이에 자연적으로 생겨 물이 고였다. 물먹으려 찾아온 멧돼지들이 못을 더 넓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저거흘(猪巨흘)이라 하였다. 연꽃과 수선화가 피어 있다.


낙천리는 올레13코스 중간 기착지다. 아홉굿 의자마을 종합안내판이 마을을 소개한다.


아홉굿마을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 의자를 손보고 있는 마을 청년에게 다가가서 물어본다.


"낙천리 아홉굿마을을 방문하면 아홉 가지 good 한, 아홉 가지 좋은 일이 생기게 된다는 뜻입니다."

알쏭달쏭 한 말로 너스레를 떨고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홉굿마을은 제주에서 대장간이 처음 생긴 마을입니다. 쇠붙이를 녹여 거푸집에 부으려니 형틀을 만들 흙이 필요했지요. 대장간을 하던 여산 송 씨가 구덩이(굿)를 파서 흙을 사용했어요. 그렇게 해서 생긴 구덩이가 아홉 개라 아홉굿이 되었지요. 그 구덩이에 물이 고여 아홉 개의 연못이 되어 지금도 농업용수로 쓰고 있습니다. 물이 좋은 곳이라 낙천리고요."


"의자는 왜 이렇게 많습니까?"

"100가구가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에 1000여 개에 정도의 의자가 있습니다."

말을 끄집어내니 거침없어 이어간다.


"물이 풍부해 농사짓기는 좋지만 별다른 내세울 것이 없던 오지 마을이 있었지요, 낙천리는. 2003년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선정되면서부터입니다. 밤에는 풀벌레 소리 들리고 장수풍뎅이도 찾아드는 청정한 마을이라 농촌체험 교실을 만들려고 했지요. 주민들은 마을을 알리려고 고민을 합니다, 도민들조차도 잘 모르던 마을을."

"욕심이 생긴 거지요. 전국적인 명소로 만들기 위한 사업을 벌였습니다. 마을을 알리려고 주민 모두가 나섰지요. 마을을 찾아오는 방문객이 쉬어갈 수 있는 의자를 만들자 하고. 이곳 낙천리 마을에 의자가 채워지기 시작한 건 2007년부터인데, 그렇게 시작한 게 1000여 개나 됩니다."

의자가 천개가 넘는다.

이 모든 의자들을 이곳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만들었고 한다. 평범한 의자부터 크기가 4층 건물 높이의 의자까지 크기도 모양도 다양하다. 천여 개의 의자마다 이름이나 재미있는 문구를 새겨 놓았다. 의자에 써넣을 이름과 문구를 공모하는 이벤트를 전국적으로 벌려 입소문이 퍼졌다. 이로써 '대한민국 농어촌 마을 대상'을 수상하였다고 한다.

아내는 나비 의자에 앉아 포즈를 취한다.


의자공원 전망대에 올라가 주변을 둘러본다. 한경면의 중앙에 위치한 낙천리다. 동쪽으로 저지오름, 서쪽으로 당산봉, 남쪽으로 새신오름, 북쪽으로 판포오름이 둘러싸고 있어 분지 형세를 하고 있다. 작은 곶자왈도 있다.

돌담이 안내하는 잣길을 지나 화산석이 울퉁불퉁한 까마귀쪽나무 숲을 힘들게 올라가니 길이 넓어진다. 조수리로 들어간다. 소와 말이 한가로이 쉬고 있는 목장이 나오고 400년 된 팽나무 보호수를 만난다.

이내 저지 수동 뒷자락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면서 '뒷동산 아리랑길'을 올라간다.

농가는 인적이 없고 강아지가 홀로 집을 지킨다.


가막살나무에 하얀 꽃이 탐스럽게 달려 있다.

길섶에는 지칭개가 분홍색 꽃을 피우고 꽃대를 밀어 올린다.

돌아본다.

조금 전 전망대보다 고도가 높아졌다. 서쪽 바다가 보인다. 숲 속에 드문드문 집들과 비닐하우스가 보인다.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의 풍경이다.



환상적인 굼부리를 품은 저지오름


올레 13코스의 하이라이트는 저지오름이다.

제주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숲이다. 닥나무가 많아서 닥몰오름으로 불렀다. 해발 239m, 비고 100m이다.

원래 새(띠)가 군락을 이루던 곳인데 주민들이 나무를 심어 울창한 숲을 만든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 저지마을 사람들은 저지오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다. 2005 생명의 숲, 2007년 제8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대상(생명상)을 받을 만큼 유명하다.

곰솔, 자금우, 참느릅나무, 쥐똥나무, 생달나무, 참식나무 등이 빼곡히 자라고 있다.


먼저 굼부리 둘레길을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돈다. 3/4쯤 지나면 전망대가 있다. 느지리오름, 당산오름, 정물오름, 도너리오름, 산방산, 금오름, 돌오름, 대병악, 소병악, 바굼지오름이 보인다.

굼부리 관찰로로 내려간다. 둘레 800m, 깊이 62m 규모의 깔때기 형상을 한 원형 굼부리는 화구벽으로 바깥세상과 차단되어 있다. 아늑하다는 말이 적당하다고 할 만큼 별천지를 이루고 있다. 수십 년 전에는 굼부리 안에서 유채, 보리, 감자 같은 작물을 재배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상록수와 낙엽수, 덩굴식물이 뒤엉켜 밀림을 방불케 한다.


이 비경에 홀려 내려갈 때는 몰랐는데, 올라오려고 위를 쳐다보니 까마득하다. 복식호흡을 하면서 계단수를 헤아리며 단숨에 올라간다. 얼마 남았는가 위를 쳐다보지 않고 발 밑의 계단만 보고 올라간다. 그래야 올라가기가 수월하다. 기록해 놓지 않아 자신은 못 하지만 260계단인 것으로 기억한다.

다시 공동묘지 주차장 쪽으로 내려와서 저지오름 둘레길을 반시계 방향으로 반 바퀴 돌고 저지마을로 내려간다. 저지예술정보화마을에는 서양화, 조각, 서예 등 15개 장르 예술인들이 창작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


저지리 농촌체험 휴양마을 안내센터 앞에는 온통 마을 소개와 자랑이다. 여기서 오늘 일정을 마친다. 제주올레 안내센터에서 돌아갈 버스 편을 문의하니 관광지 순환버스 820번을 안내한다.(2022.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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